[박희권의 호모글로벌리스 (30)] 쉼표 하나가 국제계약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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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영국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에 소속된 선덜랜드 AFC 클럽이 스테판 슈워츠 선수와 계약할 때였다. 구단은 슈워츠 선수의 코치가 버진 갈락틱호의 우주여행을 예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가 슈워츠 선수와 함께 여행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구단은 슈워츠 선수가 지구 대기권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넣었다.
마이클 조던이 미국 농구계를 호령하던 시절, 소속팀 시카고 불스는 선수 보호를 위해 조던이 즉흥 게임에서 농구하는 것을 방지하는 조항을 계약서에 포함하려 했다. 그러나 조던은 언제 어디서나 농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농구 사랑 조항’을 관철시켰다. 이 조항은 오늘날 다른 선수들의 계약서에도 포함되고 있다.
서구인들이 계약서 작성에 얼마나 신중하게 접근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작성은 신중하게 하되, 일단 서명한 계약은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 서구인의 사고방식이다. 그런 만큼 거래의 백미(白眉)는 계약서 작성에 있다. 장기간의 힘든 협상도 결국 계약서에 어떤 내용을 포함시키느냐로 결판난다. 또 계약서는 법정에서 다투는 데 준거가 된다.
작성엔 '신중', 서명 뒤엔 '준수'
계약서 작성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기업인은 법률 비용을 줄이기 위해 변호사 도움 없이 계약을 체결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법을 잘 알지 못할 경우 전문가의 조력을 받는 것이 훨씬 경제적일 것이다.
필자는 외교관 생활 중 상당 기간을 정부를 대표하는 국제법 전문가로 일했다. 경험을 토대로 계약서 작성 시 숙지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소개한다.
첫째, 조동사 사용에 신중해야 한다. 영어의 ‘shall’과 ‘must’는 의무조항에 사용되는 조동사로 법적 구속력을 갖는다. 이에 비해 ‘will’과 ‘may’는 법적 구속력이 없거나 약하다. 어느 한국 기업이 외국 기업과 맺은 계약서의 기밀유지 조항에서 실수로 shall이 아니라 may를 썼다. 나중에 외국 기업이 기밀을 유출했으나 강제력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shall’과 ‘should’도 법적 구속력에서 차이가 있다. 2015년 말 파리 기후변화협상에서 참가국들은 shall과 should를 둘러싸고 대립했다. 기후변화로 타격받는 개발도상국 지원 의무를 규정한 조항에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shall 대신 구속력이 약한 should를 쓰지 않으면 협정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둘째, 분쟁이 발생할 경우 ‘어느 법정에서 어떤 법을 적용하느냐’의 준거법과 관할 법원은 중요한 문제다. 가급적 한국 법정에서 국내법을 적용하도록 하되, 불가능할 경우 중립적인 제3국의 법원과 법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컨대, 국제투자분쟁해결기구(ICSID), 국제상거래법위원회(UNCITRAL)와 런던 파리 싱가포르에 소재하는 중재원 등이다.
필자가 주페루 대사로 재직하던 2012년 11월 페루 국방부에서 국산 훈련기(KT-1) 20대의 수출계약 서명식이 열렸다. 우리나라가 중남미 에 최초로 항공기를 수출한 사례였다. 2년여의 정부 간 협상은 인내와 능력 한계를 시험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정도로 힘들었다. 그중에서도 준거법과 관할법원 문제는 최종 타결될 때까지 걸림돌로 작용했다. 페루 정부는 분쟁 발생 시 페루 국내법을 기초로 페루 법원이 관할권을 행사해야 하며 한국어, 스페인어, 영어 3개 언어본 중 스페인어본을 기초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양국 간 동등한 자격하에 체결되는 정부 간(G2G) 계약인 점을 페루 대통령에게 강조해 결국 제3국인 미국 뉴욕주의 법과 법정 관할권을 관철시켰다.
마지막으로 단어 하나 또는 구두점 하나도 잘못 사용하면 막대한 손해가 발생할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글로벌 협상에서는 이질적인 문화, 통·번역상의 실수 등으로 그런 사례가 많다.
구두점 하나에도 유의해야
1984년 8월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이때 쉼표 위치에 따라 정강 정책의 뜻이 뒤바뀌는 소위 ‘쉼표 전쟁’이 발생했다. 정책 초안에는 “우리는 경제 회복을 저해할 수 있는 어떠한 세금 인상 시도에도 반대한다(We therefore oppose any attempt to increase taxes which would harm the recovery)”고 돼 있었다. 이때 ‘taxes’와 ‘which’ 사이에 쉼표의 유무를 둘러싸고 논란이 제기됐다. 쉼표가 있으면 “우리는 어떠한 세금 인상 시도에도 반대하는데, 그것은 (반대는) 경제 회복에 해를 끼칠 수 있다(We therefore oppose any attempt to increase taxes, which would harm the recovery)”는 정반대 뜻이 되기 때문이었다. 원래 숨을 쉬라는 표시로 사용된 쉼표가 오늘날 열한 가지나 되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니 쉼표 사용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박희권 < 글로벌리스트·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
마이클 조던이 미국 농구계를 호령하던 시절, 소속팀 시카고 불스는 선수 보호를 위해 조던이 즉흥 게임에서 농구하는 것을 방지하는 조항을 계약서에 포함하려 했다. 그러나 조던은 언제 어디서나 농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농구 사랑 조항’을 관철시켰다. 이 조항은 오늘날 다른 선수들의 계약서에도 포함되고 있다.
서구인들이 계약서 작성에 얼마나 신중하게 접근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작성은 신중하게 하되, 일단 서명한 계약은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 서구인의 사고방식이다. 그런 만큼 거래의 백미(白眉)는 계약서 작성에 있다. 장기간의 힘든 협상도 결국 계약서에 어떤 내용을 포함시키느냐로 결판난다. 또 계약서는 법정에서 다투는 데 준거가 된다.
작성엔 '신중', 서명 뒤엔 '준수'
계약서 작성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기업인은 법률 비용을 줄이기 위해 변호사 도움 없이 계약을 체결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법을 잘 알지 못할 경우 전문가의 조력을 받는 것이 훨씬 경제적일 것이다.
필자는 외교관 생활 중 상당 기간을 정부를 대표하는 국제법 전문가로 일했다. 경험을 토대로 계약서 작성 시 숙지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소개한다.
첫째, 조동사 사용에 신중해야 한다. 영어의 ‘shall’과 ‘must’는 의무조항에 사용되는 조동사로 법적 구속력을 갖는다. 이에 비해 ‘will’과 ‘may’는 법적 구속력이 없거나 약하다. 어느 한국 기업이 외국 기업과 맺은 계약서의 기밀유지 조항에서 실수로 shall이 아니라 may를 썼다. 나중에 외국 기업이 기밀을 유출했으나 강제력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shall’과 ‘should’도 법적 구속력에서 차이가 있다. 2015년 말 파리 기후변화협상에서 참가국들은 shall과 should를 둘러싸고 대립했다. 기후변화로 타격받는 개발도상국 지원 의무를 규정한 조항에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shall 대신 구속력이 약한 should를 쓰지 않으면 협정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둘째, 분쟁이 발생할 경우 ‘어느 법정에서 어떤 법을 적용하느냐’의 준거법과 관할 법원은 중요한 문제다. 가급적 한국 법정에서 국내법을 적용하도록 하되, 불가능할 경우 중립적인 제3국의 법원과 법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컨대, 국제투자분쟁해결기구(ICSID), 국제상거래법위원회(UNCITRAL)와 런던 파리 싱가포르에 소재하는 중재원 등이다.
필자가 주페루 대사로 재직하던 2012년 11월 페루 국방부에서 국산 훈련기(KT-1) 20대의 수출계약 서명식이 열렸다. 우리나라가 중남미 에 최초로 항공기를 수출한 사례였다. 2년여의 정부 간 협상은 인내와 능력 한계를 시험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정도로 힘들었다. 그중에서도 준거법과 관할법원 문제는 최종 타결될 때까지 걸림돌로 작용했다. 페루 정부는 분쟁 발생 시 페루 국내법을 기초로 페루 법원이 관할권을 행사해야 하며 한국어, 스페인어, 영어 3개 언어본 중 스페인어본을 기초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양국 간 동등한 자격하에 체결되는 정부 간(G2G) 계약인 점을 페루 대통령에게 강조해 결국 제3국인 미국 뉴욕주의 법과 법정 관할권을 관철시켰다.
마지막으로 단어 하나 또는 구두점 하나도 잘못 사용하면 막대한 손해가 발생할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글로벌 협상에서는 이질적인 문화, 통·번역상의 실수 등으로 그런 사례가 많다.
구두점 하나에도 유의해야
1984년 8월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이때 쉼표 위치에 따라 정강 정책의 뜻이 뒤바뀌는 소위 ‘쉼표 전쟁’이 발생했다. 정책 초안에는 “우리는 경제 회복을 저해할 수 있는 어떠한 세금 인상 시도에도 반대한다(We therefore oppose any attempt to increase taxes which would harm the recovery)”고 돼 있었다. 이때 ‘taxes’와 ‘which’ 사이에 쉼표의 유무를 둘러싸고 논란이 제기됐다. 쉼표가 있으면 “우리는 어떠한 세금 인상 시도에도 반대하는데, 그것은 (반대는) 경제 회복에 해를 끼칠 수 있다(We therefore oppose any attempt to increase taxes, which would harm the recovery)”는 정반대 뜻이 되기 때문이었다. 원래 숨을 쉬라는 표시로 사용된 쉼표가 오늘날 열한 가지나 되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니 쉼표 사용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박희권 < 글로벌리스트·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