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통상의 파도를 넘자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기억하시는지? 조선의 젊은 세종 이도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거나 갈등을 겪을 때마다 혼자만의 공간으로 달려가 마방진 풀이에 골몰한다. 이도가 성장하면서 왕의 고민도 다양해지고 방진 역시 처음 풀었던 3방진에서 점점 복잡해져 드라마가 클라이맥스에 이를 즈음에는 33방진을 놓고 씨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왕이라는 자리의 고독함, 그가 처한 상황의 난해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우리가 처한 통상환경을 보면 이 마방진이 떠오른다. 과거 통상은 정부의 일이었다. 정부는 주요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열심히 추진하고 기업은 이를 활용해 좋은 제품을 생산해 수출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였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미국발 보호무역주의는 마른 벌판에 들불 번지듯 전 세계로 번지고 있다. 여기에 미·중 통상분쟁 때문에 위축되는 글로벌 밸류체인(GVC)과 각국의 수입규제, 각종 무역협정의 이합집산까지 기업의 고민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전문가들은 내년 통상환경이 더욱 나빠질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내 주요 기업이 꼽은 2020년 경영환경 리스크 순위를 봐도 보호무역과 통상압력이 단연 1위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는 통상의 파도가 아무리 거칠어도 바다로 나가야 한다. 절대적인 지혜를 가진 인공지능(AI)에 도움받을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정부와 기업, 기관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으는 수밖에 없다.

무역협회는 기업에서 통상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초청해 ‘통상인의 밤’ 행사를 연다. 철강 석유화학 기계 등 다양한 업종에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규모도 천차만별이다.

초면에 서먹한 순간도 잠시, 중국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트위터에 잠 못 이루던 밤, 우리 제품에 막대한 반덤핑 관세를 부과한다는 수입국 발표에 밤새 소주잔을 기울인 일까지 이야기가 봇물을 이룬다. 그간의 고충과 애환을 나누다 보면 어느새 행사 종료 시간을 훌쩍 넘기지만, 통상 노하우를 익히고 네트워크를 쌓을 소중한 기회이기에 쉽사리 자리를 뜰 수 없다.

기업들은 수입국의 보호무역 조치를 겪으며 사내에 통상 전담조직을 키우기 시작했다. 수출팀, 해외영업팀이 아니라 ‘통상팀’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통상업무 전문화를 위해 기존 직원의 교육과 인재 영입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민관이 지혜를 모아 험난한 통상의 파도를 넘는 2020년이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