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포퓰리즘의 덫에서 벗어나야
21세기 초부터 베네수엘라, 폴란드 등에서 풍미해 온 정치체제로서의 포퓰리즘이 횡행하고 있다. 포퓰리즘은 단순히 지지층 확보를 위한 선거 전략으로만 볼 수 없는 새로운 정치 이념이다. 시민을 ‘국민’과 엘리트, 우리와 그들, 친구와 적(敵)으로 구분하는 게 이 체제의 본질이다. 국민은 정치·경제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계층이다. 경제적 엘리트는 국민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재벌, 대기업, 금융 엘리트, 부자 등으로 경제적 적폐요, 청산 대상일 뿐이다.

불안감에 짓눌린 국민의 삶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겠다는 게 포퓰리즘 체제의 최고 목표다.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 ‘저녁이 있는 삶’이란 명분의 주 52시간제 일률 적용 같은,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정책 수단은 당장에는 경제 문제의 근사한 해법처럼 보이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막대한 피해만 남길 뿐이란 것도 포퓰리즘 정책의 특성이다.

예를 들어 저소득층의 소득을 단기간에 끌어올려 투자와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실업과 성장률 추락, 경제침체를 불러왔을 뿐이다. 주력 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킨 반(反)시장·기업 정책, 되레 아파트값 급상승을 부추겼을 뿐인 ‘집값과의 전쟁’도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정책의 사례다.

그런 정책은 자유, 경쟁, 사적 소유, 시장 등 우리 경제 질서의 중요한 기초를 파괴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정책을 입안하는 자유주의는 보편·추상적 규칙에 입각해 재산을 보호하고 계약의 준수와 공정한 경쟁질서를 확립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적자 예산과 국가 부채, 통화량은 얼마든지 늘려도 된다는 믿음도 포퓰리즘의 본질이다. 필요하면 빚을 내서라도 쓰고 보자는 생각인 것이다. ‘예산 중독’이라는 말이 이에 적합한 표현이다. 후세대의 비용 부담을 외면하고 세대 간 따뜻한 유대감도 도외시한다. 현재와 미래 세대를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국가부채 한도를 엄격히 제한하자는 자유주의 헌법정신과는 다르다.

유권자를 ‘우리’와 ‘그들’로 편가르기 하는 것도 포퓰리즘의 특징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적으로 소외된’ 국민이다. ‘촛불’은 그런 국민이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시키는 운동으로 상징된다. 국가권력은 법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나오는데, 국민으로부터 백지위임을 받아 선출된 정부의 권력에는 제한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정부는 법적으로 보면 민주적이지만, 법 위에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법치와 권력 분립을 거부한다. 국민의 직접 선출과 통제로부터 독립적인 제도, 즉 재판의 독립성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며 검찰의 독립성까지 부정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들’이라는 범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필요할 때마다 바꾼다. 전임 대통령과 지지세력, 정부를 비판하는 세력은 적폐요, 청산의 대상일 뿐인 ‘그들’이다. 포퓰리즘의 편가르기 정치는 태양광 사업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편’에 일감을 몰아주는 정실주의와 이로 인한 분배의 양극화로 나타난다.

포퓰리즘 체제는 가족, 교우, 마을공동체 같은 소규모 사회에서나 적합한 이타심, 유대감 등의 도덕적 가치를 지키도록 시민에게 강요한다. 포퓰리즘 정부는 그런 강요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타심도 없고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른다는 이유로 청산의 대상이라고 낙인 찍는다. 낙인찍기는 포퓰리즘 정부는 사심을 버리고 국리민복을 위해 헌신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 전제는 위선의 표현이다. 도덕을 강요할 경우에는 오히려 유대감, 공동체감, 책임감, 독립심은 물론 정직성, 기업가 정신, 타인의 인격·재산에 대한 존중심 등 사회의 발전·유지에 필요불가결한 도덕의 파괴와 가치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이게 우리 사회의 참담한 현실이다.

번영을 위해서는 하루빨리 포퓰리즘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부 지출과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푸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소규모 사회의 기초가 되는 자생적 도덕률과 함께 보편·추상적 규칙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시장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