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명예이사장이 20일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명예이사장이 20일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지낸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마리오 드라기 전 ECB 총재, 폴 볼커 전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 컬럼비아대 교수,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 스탠퍼드대 교수,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 ….

이들 세계적 명망가·석학과 모두 친분을 쌓은 인물을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다. 지역·언어적 장벽 때문이다.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명예이사장은 이 같은 장벽을 넘어섰다. 전화 한 통으로 이들과 약속을 잡고 한국으로 초대하기도 한다. 주변 측근조차 그의 인맥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가늠하지 못한다. 이처럼 거미줄 인맥을 쌓은 배경에 대해 묻자 사공 명예이사장은 새로 구입한 최신형 스마트폰인 아이폰11과 세계 각국의 유명 서적으로 가득 찬 책장을 가리켰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휴대폰으로 뉴욕타임스, 파이낸셜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을 꼼꼼하게 읽는다. 끊임없이 세계 경제 흐름을 챙기면서 넓혀온 식견과 대통령 수석경제비서관, 재무부 장관으로 쌓은 연륜을 바탕으로 명망가들과 교류했다.

그가 최근 한국을 둘러싼 복잡다단한 변수들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진단 방안을 담은 두 권의 책 <세계 속에서 우리 경제의 살길을 찾자>와 <한국 경제의 지속 번영을 위한 우리의 선택>을 펴냈다. 그동안 언론에 기고한 글과 인터뷰를 묶어냈다. 사공 명예이사장은 20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직면한 대내외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하다”며 “더 늦기 전에 우리에게 닥친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두 권의 책을 펴낸 계기가 궁금합니다.

“국정 최고책임자와 당국에 편지를 쓴다는 심정으로 언론을 통해 국정 전반에 관한 여러 제언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회신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지금이라도 귀 기울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시 책자로 묶어 출판했습니다.”

▷정부 정책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봅니까.

“문재인 정부는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소득주도성장’을 바탕으로 하는 단편적 경제정책을 펼쳤습니다. 시대적 사명인 성장잠재력 확충이라는 큰 틀에서 우리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의 장·단기 정책을 펴야 합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노동·교육개혁도 일관되게 추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대통령이 각 부처 장관에게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장관에게 부처 인사권을 돌려주고 또 오랜 기간 임기를 보장해야 합니다. 대통령 책임제의 장점은 부처 수장이 장기 재임하면서 긴 호흡으로 정책을 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수시로 장관을 교체하면서 정책의 일관성이 흐트러지는 등 내각책임제의 단점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경제부총리가 부처 조정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노동과 교육개혁을 책에서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노조 가입자는 전체 근로자의 10% 수준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전체 근로자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며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노조는 자신들의 일자리를 보호하는 데만 급급합니다. 반면 다른 근로자를 보호하는 것에는 소홀합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고 기존 일자리는 사라지는 현상이 반복될 겁니다. 기존 일자리를 지키는 데만 관심을 쏟으면 산업 경쟁력이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보호해야 할 대상은 일자리가 아니라 근로자입니다. 실직자에 대한 복지와 직업훈련을 강화하는 동시에 노동시장을 더욱 유연하게 바꿔야 합니다. 인문사회와 과학기술 교육을 구분하는 과거 교육 패러다임에서도 탈피해야 합니다.”

[한경 인터뷰] 사공일 "정부지출, 경기 불쏘시개에 그쳐야…재정악화땐 외환위기로 직결"
▷정부가 노동계와의 관계를 의식해 노동개혁을 주저하는 게 아닐까요.

“노동개혁은 오히려 문재인 정부가 주도해야 합니다. ‘유럽의 병자’라던 독일은 2000년대 초반 노동개혁을 추진해 쓰러져가던 경제를 일으켰습니다. 친(親)노동 진보정당인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가 개혁을 주도했죠. 이 정부가 거울로 삼아야 할 대목입니다. 현 정부는 노조를 깊이 있게 알고 있는 만큼 설득할 능력도 있습니다.”

▷정부 임기가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임기 후반에 가장 중점적으로 챙겨야 할 정책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국정의 최우선 순위에 둬야 할 것은 규제개혁입니다. 규제개혁특별위원회를 만들고 매달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회의를 정례화해야 합니다. 관계 부처 장관들과 각 정당 관계자, 언론인, 전문가가 참석한 가운데 대통령이 장관들로부터 규제개혁 내용과 추진 상황을 보고받고 점검하는 형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남은 2년 반의 임기 동안 규제만 깨뜨린다는 각오로 나서야 우리 경제가 활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청와대에 설치된 ‘일자리 상황판’ 앞에도 ‘규제개혁 상황판’을 설치해야 합니다. 규제를 개혁하면 일자리는 저절로 생겨납니다. 규제개혁을 이끌어내기 위한 국민의 이해와 협조는 필수입니다. 정부가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개혁의 필요성을 설득해야 합니다. 정부도 각 부처와 부서별 소통을 바탕으로 개혁 의지와 시각을 일관된 형태로 정리해야 합니다.”

▷정부가 되레 시장 규제를 강화한다는 우려가 커집니다.

“시장에 대한 과도한 규제가 부작용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경제의 기존 상식입니다. 분양가 상한제가 대표적입니다. 자장면 가격을 제한하면 양이 줄고 재료가 부실해지는 게 당연한 이치입니다. 분양가 상한제를 도입하면 아파트 공급이 줄어들고 부실공사가 늘어날 겁니다. 소비자들이 치러야 할 전체 비용은 커집니다. 정부가 시장을 이길 수 없고 시장원리를 무시한 정책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정부 확장 재정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습니다. 확장 정책이 불가피하다는 의견과 재정 남발이라는 우려가 엇갈리는데 이에 대한 견해가 궁금합니다.

“확장 재정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 없지요. 재정은 민간의 투자와 소비를 이끌어내기 위한 ‘불쏘시개’ 역할에 그쳐야 합니다. 지나친 확장 재정은 민간의 투자·소비를 위축시키고 재정건전성을 무너뜨립니다. 종종 재정지표를 비교할 때 재정이 취약한 유럽 국가 사례를 거론하면서 ‘우리는 괜찮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 국가 상당수는 유로존에 속해 기축통화인 유로화를 쓰기 때문에 외환위기 걱정이 없습니다. 기축통화가 아닌 원화를 쓰는 한국은 다릅니다. 국고가 비면 국제시장에서 자금을 빌리지 못하고 국내에서 자본이 빠져나갑니다. 재정건전성에 문제가 생기면 외환위기로 직결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장의 활력이 죽어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위축된 투자와 소비를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로벌 경제가 동시 침체되면서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도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정부가 이 와중에 기업 투자를 저해하는 정책을 펴면서 시장 활력이 더욱 줄어든 것입니다. 친기업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기업들이 적극적인 투자에 나설 때는 면밀한 시장 분석보다 케인스가 지적한 ‘즉흥적 낙관(spontaneous optimism)’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업들이 ‘한번 해보자’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을 자극해야 합니다.”

▷세계 경제와 무역 질서가 바뀌면서 한국을 둘러싼 갈등도 고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미·중 무역분쟁은 앞으로 상당 기간 지속될 강대국 패권 경쟁의 일환으로 봐야 합니다. 세계 경제 여건의 불안은 지속되고 보호무역주의 강화, 강대국의 일방주의가 확산될 겁니다. 한국은 미·중 패권 전쟁의 장기화를 염두에 두고 경제·외교 전략을 짜야 합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수출 다변화·다층화로 대(對)중국 의존도를 낮춰가는 동시에 중국과 미국 등 강대국에 대한 경제적 ‘레버리지’를 살려가야 합니다.”

▷경제적 레버리지를 어떻게 살려야 할까요.

“중국이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보복의 수단으로 관광 부문에 제재를 가한 반면 제조업에는 보복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수출 중간재 상당수를 한국에서 수입하는 중국이 한국 제조업에 제재를 가하면 그만큼 중국도 타격을 받기 때문에 우리 주력 산업에는 손을 못 댄 것이죠. 이처럼 앞으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우리가 가진 산업적 우위를 계속 유지해야 미·중 갈등 속에서도 우리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중국제조 2025’ 전략 추진으로 중국 제조업 부품의 자급률이 올라가면 한국의 경제적 레버리지는 그만큼 약화될 겁니다. 앞으로는 한국 제조업에 대한 압박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공일 명예이사장은…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명예이사장은 1983년 버마(미얀마) 아웅산 테러로 순직한 김재익 전 경제수석의 뒤를 이어 4년 동안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았다. 이후 재무부 장관, IMF 특별고문 등을 지냈다. 사공 명예이사장은 현직 퇴임 이후인 1993년 세계경제연구원을 세워 정기적으로 해외 명사를 초청하는 ‘해외 석학 초청 세미나’를 열고 있다.

△1940년 경북 군위 출생 △경북고, 서울대 상대 졸업 △미국 UCLA 경제학 박사 △1969년 미국 뉴욕대 교수 △1982년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원장 △1983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1987년 재무부 장관 △1989년 IMF 특별고문 △2008년 대통령 직속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 △2009년 27대 무역협회장 △현 세계경제연구원 명예이사장

김익환/고경봉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