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은행들의 VC 설립 열풍이 걱정되는 이유
국내 1위 온라인 패션 플랫폼 무신사가 이달 11일 세계 최대 벤처캐피털(VC)인 미국 세쿼이아캐피털에서 2000억원을 투자받으며 18억9000만달러(약 2조2000억원)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로써 한국은 쿠팡, 크래프톤(옛 블루홀), 위메프,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 비바리퍼블리카(토스), 야놀자 등에 이어 열 번째 유니콘기업(기업 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을 갖게 됐다.

유니콘기업은 해당 국가의 산업 혁신성을 보여준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CB인사이츠에 따르면 한국의 유니콘기업(10개)은 미국(196개)과 중국(98개)보다 적지만 프랑스(5개), 일본(3개), 싱가포르(2개)보다는 많다. 벤처 강국으로 꼽히는 이스라엘(6개)도 추월했다. 적어도 양적 측면에서 한국의 창업·벤처 생태계는 나름 선방하고 있다.

여기에 돈을 대는 국내 VC산업은 아직 갈 길이 멀다. 국내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의 유니콘기업행(行)은 한국이 아니라 해외 VC가 주도하고 있다. 위메프를 제외한 나머지 국내 유니콘기업 아홉 곳은 모두 세쿼이아캐피털(우아한형제들 등), 중국 텐센트(크래프톤), 일본 소프트뱅크그룹(쿠팡), 미국 골드만삭스(지피클럽 등), 싱가포르투자청(토스 등) 등의 투자를 받아 성장했다.

이런 현상은 본질적으로 국내 VC들이 운용하는 펀드가 너무 왜소하기 때문이라는 게 업계의 공통된 설명이다. 벤처 투자를 크게 확대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내 벤처펀드는 총 17조3200억원에서 지난 9월 말 25조7800억원으로 50% 가까이 급증했다. 그럼에도 국내 벤처펀드의 평균 규모는 274억원에서 295억원으로 7% 남짓 늘어나는 데 그쳤다. 국내 VC 숫자가 118개에서 142개로 20% 넘게 급증하며 벤처 자금을 ‘나눠 먹기’한 결과다.

개별 벤처펀드는 리스크 관리를 위해 10~20개 벤처기업에 분산 투자한다. 수백억원 규모의 벤처펀드로는 유니콘기업 투자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한국투자파트너스 등 일부 VC가 조성한 1000억~3000억원짜리 대형 벤처펀드 10여 개가 있지만 분산 투자를 하다 보면 역부족이긴 마찬가지다.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쿠팡, 우버 등 글로벌 유니콘기업에 대거 투자한 건 ‘비전펀드 1호’가 1000억달러(약 117조원)짜리여서 가능했다.

은행계 금융지주가 최근 VC 자회사를 앞다퉈 설립하고 있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우려를 낳는다. 2000년 이후 국내 은행계 VC는 KB인베스트먼트가 유일했지만 작년 12월 하나금융이 하나벤처스를 설립해 복수가 됐다. 올 들어선 NH금융과 지방은행 계열인 BNK금융까지 VC를 신설했다. 우리금융과 신한금융도 VC 자회사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국내 벤처펀드는 그동안 정부 자금(한국벤처투자) 40%, VC 자체 출자 및 전략적 투자자(SI) 자금 30%, 민간 자금 30% 비중으로 조성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 중 민간 자금에는 은행 출자금이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한 대형 VC 사장은 “VC 신설로 은행들이 ‘민간 투자자’에서 ‘벤처 운용사’로 전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은행들이 계열 VC에 자금 배분을 집중하면 나머지 VC는 은행 출자금 공백으로 펀드 자금 유치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벤처펀드 규모는 작아지고 국내 VC의 유니콘기업 자금 지원 역할도 더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다.

금융지주들은 VC 설립 취지로 벤처산업 육성을 내세우고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가 될 것 같아 걱정이 든다.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