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전략담당 임원 A씨는 최근 솔깃한 얘기를 들었다. 돈을 받지 않고 경영자문을 해주겠다는 컨설턴트의 제안이었다. 원가 절감이나 수익성 개선 등 성과가 나면 그때 사례비를 주면 된다는 단서가 달렸다. A씨는 “성과가 나야만 보수를 받는다고 해 부담 없이 컨설팅 계약을 했다.
그래픽 = 허라미 기자 ra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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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관련 업계와 기업들에 따르면 국내 컨설팅업계에 ‘성공보수 계약’이 확산되고 있다. 계약금이나 착수금 없이 컨설팅을 받은 뒤 원가가 줄거나 이익이 늘면 일정 비율을 보수로 지급하는 방식이다. 컨설팅 결과에 관계없이 컨설턴트가 일한 시간만큼 일정한 돈을 내는 기존 정액제 컨설팅과는 완전히 다르다. “비현실적인 대안만 내놓는다”며 ‘컨설팅 무용론’을 주장하던 국내 기업들도 이런 성공보수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성공보수 계약이 오랜 불황에서 벗어날 탈출구로 떠오르면서 컨설팅업체들은 앞다퉈 성공보수 전담팀을 신설하고 있다. 맥킨지와 보스턴그룹에 이어 AT커니가 최근 성공보수 조직 설립에 나섰다. 컨설팅 효과를 바로 확인하기 힘들기 때문에 성공보수 계약은 1년 이상 장기간으로 하는 게 일반적이다. 국내 한 컨설팅사 대표는 “오랜 기간 함께 논의하면서 컨설팅 성과를 지켜볼 수 있어 양쪽 모두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성과 안 나면 보수 안 줘도 됩니다"
이래도 컨설팅 안 받으시겠습니까?


"착수금 0원…성과나면 돈 주세요" 불황 컨설팅업계 '성공보수' 확산
글로벌 컨설팅업계에서 성공보수 계약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곳은 맥킨지다. 맥킨지 본사는 2010년 성공보수 계약을 전담하는 사업부를 신설했다. 200명 이상의 전직 기업 최고경영자(CEO)와 기업 혁신 전문가, 전담 컨설턴트들로 조직을 꾸렸다. 그동안 100개 이상의 기업을 자문해 50억달러(약 5조8000억원) 규모의 성과 개선을 이끌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맥킨지의 성공 경험이 알려지자 다른 컨설팅 업체들도 전담 조직을 설립했고 한국에서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기업인마다 호불호가 갈리는 컨설팅.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꼽힌다. ‘실현 가능성이 낮은 아이디어만 늘어놓는다’는 회의론과 ‘보고서 하나 쓰면 그만’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컨설팅 업체가 꺼내 든 카드가 ‘성공보수 계약’이다. 초기 계약금(착수금) 부담을 줄여주고 성과에 따라 돈을 받는 방식이다. ‘컨설팅은 돈 먹는 하마’라는 선입견을 해소하고 컨설턴트의 의욕도 고취할 수 있어서 인기다. 무엇보다 컨설팅 업체와 기업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게 장점이다. 컨설팅 성과가 바로 나오는 게 아니어서 1년 이상의 장기 계약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대 단골은 사모펀드

성공보수 컨설팅 계약 시장을 키운 것은 사모펀드(PEF)다. 사모펀드가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의 주축으로 등장한 뒤부터다. 기업을 인수하거나 매각하면 최소한 한쪽은 사모펀드였고, 이때마다 컨설팅 업체가 끼어 있었다. M&A 이전 이후의 컨설팅 계약은 대부분 성공보수 형태다.

한 사모펀드가 2015년 인수한 A사, 2016년 토종 사모펀드에서 국내 대기업으로 주인이 바뀐 B사, 2017년 해외 사모펀드에 핵심 사업부를 매각한 C사. 컨설팅 회사와 기업 간 비밀유지 계약 때문에 이름을 공개할 수 없지만 성공보수 컨설팅 계약에는 꼭 사모펀드가 들어갔다.

사모펀드가 단골이 된 건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사모펀드는 언젠가 기업을 되팔아 매각 차익을 내야 한다. 당연히 조급할 수밖에 없다. 단기간에 해당 기업의 원가를 절감하거나 이익을 늘려 몸값을 높여야 한다. 이때 컨설팅 업체가 성공보수 계약을 맺으며 사모펀드들을 지원했다.

성과주의가 확고한 외국계 기업도 성공보수 형태의 컨설팅 계약을 선호한다. 성과만큼 보수를 주는 것에 인색한 편인 국내 업체와 달리 외국계 기업은 성과에 연동해 돈을 주는 것에 후한 편이다. 해외 업체들은 새로운 전략을 짤 때뿐만 아니라 단기 실적 개선 방안을 찾을 때 컨설팅 업체를 쓴다. 그때마다 대부분 성과연동형으로 계약한다.

대기업 사업구조 전환도 호재

최근엔 국내 대기업도 성공보수 컨설팅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안팎의 복합위기 때문에 사업구조 혁신이 대기업의 공통 화두가 되면서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취임 이후 줄곧 강조해온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디지털 전환)이나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제시한 ‘딥체인지’ 모두 같은 맥락이다. 이런 변화를 이뤄내려면 기업 내부의 힘뿐 아니라 외부의 조언도 필요하다. 하루아침에 혁신 성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기업들은 장기 성공보수 형태로 컨설팅 계약을 맺는다.

모 대기업 전략담당 임원은 “사업구조를 실질적으로 바꾸는 데 보통 18~24개월이 걸리고 디지털 전환 같은 대혁신은 끝나는 시기를 알 수 없다”며 “장기간 성과를 측정하는 형태로 컨설팅 계약을 맺는 게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컨설팅 업체에도 성공보수 계약은 가뭄의 단비 같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수년간 국내 컨설팅업계는 불황을 겪었다. 경영진단팀 같은 이름으로 컨설팅 업무를 내부적으로 하는 기업도 급속히 늘었다. 컨설팅 업체들은 몸집을 줄여야 했다. 컨설턴트 수를 줄이고 급여를 깎았다.

이런 상황에서 성공보수 계약은 불황 탈출구 중 하나였다. 대표적인 컨설팅 업체들은 경쟁적으로 성공보수 계약만 하는 부서를 신설했다. 대부분 기업구조 혁신이나 디지털 전환을 담당하는 조직이었다. 한국맥킨지와 보스턴컨설팅그룹 모두 이런 사업부를 설립했다. AT커니도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 이들은 성과연동형을 컨설팅 계약의 핵심 요소로 넣고 있다.

컨설팅 업체들은 성공보수 계약이 단순한 돈벌이 이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해리 로빈슨 맥킨지 트랜스포메이션 리더는 “일한 시간만큼 돈을 받는 정액제보다 성과연동형으로 계약할 때 컨설턴트가 기업의 입장에서 더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결과는 ‘극과 극’

해외에선 성공보수 방식의 컨설팅 계약이 일반화돼 있다. 싱가포르텔레콤이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거론된다. AT커니는 지난해 싱가포르텔레콤이 이용자별 맞춤형 요금을 추천해주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수억달러의 수익을 창출해 고액의 성과연동 자문료를 받았다.

물론 쪽박을 찰 위험도 있다. 맥킨지는 2015년 파산 위기에 빠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영기업 에스콤과 자문 계약을 맺었다. 재무 개선을 통해 에스콤이 회생하면 성공보수로 7억달러(약 7830억원)를 받는 계약이었다. 하지만 남아공 법규는 성공보수 형태의 계약을 금지했다. 결국 맥킨지는 자문료를 받지 못한 채 남아공에서 철수해야 했다. 회사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최고경영자(CEO)가 교체되는 수모까지 겪었다.

정인설/고재연/황정수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