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이 한국투자신탁을 인수합병한 2005년, 통합 리서치본부장은 고민에 빠졌다. 섹터(분야)마다 담당 애널리스트가 두 배가 됐지만 노사 협약에 따라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불가능했다. 인력 재배치를 통해 새로운 팀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중국 시장이 뜨고 펀드 투자가 태동하던 시기였다. 중국과 펀드만 분석하는 별도 리서치 조직을 둔 증권사도 없었다. 조직 신설에 나섰지만 내부 반발이 컸다. 새로운 모험을 달가워하지 않는 애널리스트들 때문이었다. 리서치본부장은 직접 설득에 나섰다. “누군 날 때부터 알고 나왔냐” “어차피 공부해야 하는 직업 아니냐”는 갖은 회유와 ‘협박’ 끝에 중국팀과 펀드팀이 꾸려졌다.

그로부터 석 달 후 리서치본부가 주관한 투자 포럼이 열렸다. 섹터별로 차려진 부스는 한산한 반면 중국팀과 펀드팀의 행사장은 발표를 들으러 온 투자자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중국·펀드팀의 대박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이 신화를 이끌어낸 리서치본부장이 바로 조홍래 한국투자신탁운용 사장이다.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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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에 헤딩’ 정신으로 무장

조 사장은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넉넉하지는 않아도 부족함 없이 자랐다. 공부도 잘했다. 은평구 일대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하고 1979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들어갔다. 전공 공부도 재미있었다. 수학을 좋아했지만 사회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로 유학을 떠났다.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밟던 중 슬럼프가 찾아왔다. 논문만을 남겨 놓은 시점에서 돌연 공부에 회의가 들었다. 학위를 포기하고 귀국한 그는 등 떠밀리듯 취업 전선에 나섰다. 30세의 늦은 나이에 석사만 소지한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연구소뿐이었다. 한 국책 연구소를 거쳐 1991년 현대경제연구원으로 옮겼다. 계열사들이 발주하는 각종 용역 과제를 ‘맨땅에 헤딩’해가며 공부하고 분석했다.

“자동차, 중공업, 종합상사 등 주요 기업을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환율 금리 유가 등 책으로만 배웠던 거시 경제 변수와 실물 경제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됐죠.”

삼성·현대·LG·대우 등 민간 연구소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절, 다른 곳보다 앞서 발표한 보고서가 경제신문 지면에 큼지막하게 실리면 자축하기도 했다. 입사한 지 약 10년 만인 2000년, 39세에 임원(경제연구본부장·이사)을 달았다.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그해 현대그룹에서 ‘왕자의 난’이 터졌다. 계열사 지원금이 절반으로 쪼그라들었다. 임원으로서 첫 임무가 동료들의 명예퇴직 신청을 받는 일이었다. 고통스러웠다. 연구소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이용우 당시 동원증권 상무(현 카카오뱅크 대표)가 이직을 제안해왔다. 그렇게 자본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눈앞보다 5년, 10년 후를 봐야

한국투자증권에서 리서치본부장, 홀세일본부장, 법인본부장 등 요직을 섭렵한 그는 2008년 지주사로 옮겼다.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위기가 터지면서 해외 금융시장 동향 파악을 위해 신설된 글로벌리서치실을 맡았다. 쉴 새 없이 출장을 다녀야 했다. 2주 동안 미국 유럽 등을 넘나들며 7~8개국을 돌고 오는 일도 허다했다. 그는 “미국발 금융위기부터 유럽발 재정위기까지 숨 가빴던 4년간 글로벌리서치 업무를 수행하면서 스스로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깨달았다”며 “그 덕에 점쟁이는 못되더라도 미래 예측이 타당한지 검증할 만한 눈을 갖게 됐다”고 자부했다. 글로벌리서치실은 ‘셰일혁명’이란 용어조차 새롭던 2010년께 이미 내부 보고서를 통해 미국이 향후 10년 내 세계 최대 석유 수출국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하기도 했다.

2011년부터 운용지주실장(현 경영관리실장)을 겸직하면서 운용사 경영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곳곳에 아쉬운 점이 보였다. 조 사장은 “경쟁사인 삼성자산운용이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에서 치고 나가는 모습을 뼈아프게 바라봤다”며 “눈앞의 손익보다 5년과 10년 후를 내다보는 장기 전략이 필요하다는 명제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고 했다.

글로벌·퇴직연금에서 승부수

2015년 1월 대표이사로 취임한 뒤 퇴직연금과 글로벌 시장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는 “5년과 10년 뒤에도 성장할 분야를 꼽으라면 퇴직연금과 해외 시장 외에 답이 없었다”며 “ETF 사례에서 보듯 운용업은 패스트팔로어보다 시장 선점 전략이 더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한국투자신탁운용은 2016년 2월 베트남 주식형펀드인 ‘한국투자베트남그로스’ 펀드를 선보였고 순자산 1조원 펀드(환노출 및 헤지형 합계)로 키워냈다. 내친김에 일본 수출까지 이뤄냈다. 지난해 7월 같은 전략으로 노무라증권에서 출시된 ‘도쿄해상베트남주식펀드’는 목표한 5000억원을 가뿐히 돌파하면서 소프트클로징(판매 완료)됐다.

퇴직연금 분야에서는 2015년 10월 전담부서를 신설해 1년 반가량 공들인 끝에 2017년 2월 ‘한국투자타깃데이트펀드(TDF)알아서’ 시리즈를 내놨다. 펀드 이름부터 운용 전략에 이르기까지 조 사장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게 회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TDF알아서 시리즈는 현재 3000억원 규모로 국내 시장에서 3위에 올라 있다.

이 같은 성과에 힘입어 한국투자신탁운용의 운용자산은 조 사장의 취임 직전인 2014년 말 31조818억원에서 지난달 말 52조5371억원으로 급증했다. 지난해 기준 매출과 순이익도 각각 1184억원과 354억원으로, 2014년(834억원, 250억원)에 비해 40% 이상 늘었다.

조 사장에게 비결을 물었다. “고대 로마인이 왜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솔선수범)를 지켰는지 아십니까.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닙니다. 귀족들의 오랜 관습과 문화에 등 떠밀려 한 거죠. 운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과 혁신에 나서야 하고 그때마다 맨땅에 헤딩할 수밖에요.” 우문현답이었다.

■ 조홍래 한국투자신탁운용 사장

△1961년 서울 출생
△명지고,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예일대 경제학 석사, 박사과정 수료
△1991년 현대경제연구원 입사
△2000년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이사)
△2002년 동원증권 리서치본부장
△2005년 한국투자증권 리서치본부장, 홀세일본부장
△2008년 한국투자금융지주 글로벌리서치실장, 경영관리실장
△2015년 1월~ 한국투자신탁운용 대표이사


이호기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