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아파트는 이기적인 주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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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는 과밀화에 따른 정상적인 주택
공공성 측면에선 별다른 혜택 받지 못해
농촌과 비교해 공동체 붕괴 논할 수 없어
김광현 < 서울대 명예교수·건축학 >
공공성 측면에선 별다른 혜택 받지 못해
농촌과 비교해 공동체 붕괴 논할 수 없어
김광현 < 서울대 명예교수·건축학 >
신문 기사나 토론회에서 ‘아파트’를 언급할 때면 항상 나오는 말이 있다. 천박한 욕망으로 이뤄진 집, 획일적인 집, 도시 경관을 파괴하고 독점하는 집, 받기만 하고 줄 줄 모르는 이기적 집단이 모여 사는 집…. 그래서 아파트는 희박해진 인간관계에서 생긴 집이고, 지역 공동체를 붕괴하는 주범이라고도 한다. 아파트는 왜 이리도 이기적이라고 비난받는 집이 됐을까? 그런데도 이런 아파트가 그렇게 많이 지어졌고, 지어지고 있다.
아파트가 이기적인 집단의 집이라면 단독주택, 연립주택, 빌라, 다세대주택 등 아파트를 제외한 다른 유형의 도시 주택은 이타적이며 깊은 인간관계로 지역 공동체를 유지해주는 주택 형식인가? 단독주택을 제외한 다른 주택의 평면은 아파트와 같고, 쌓아올리는 방식도 같다. 그렇다면 도시의 주택은 모두 나름의 이기적인 욕망을 담고 있는 집들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지하철에 몸을 싣고 도시 속을 빠르게 움직이며 산다. 더군다나 혼자 이동한다. 이렇게 이동하며 살다 보니 어디로 가는 사이에 저 먼 곳에 있는 역의 식당에서 식사하고, 길모퉁이를 돌게 되고, 길과 광장을 걷게 된다. 그래서 도시에서 활동 영역의 경계는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사는 동네 사람만 보고 사는 게 도시가 아니다.
농촌은 밀도가 낮아 적당한 거리를 충분히 떼고 살 수 있다. 그 적당한 거리가 이웃하는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준다. 그러나 도시는 과밀해서 어쩔 수 없이 신체는 가까워지고, 좁은 공간을 강요받는다. 오죽 그 거리가 짧으면 지하철에서 서로 얼굴도 보지 않고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이어폰의 음악 소리로 자기만의 사적인 공간을 만들겠는가. 물리적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우면 사회적인 거리는 멀어진다.
농촌에서는 인간관계가 깊고 지속적이며, 이웃집에 관심이 많고, 생활의 속도도 느리다. 그래서 농촌공동체는 동심원적이다. 그러나 도시는 다르다. 인간관계가 얕고 일시적이며, 이웃집에 무관심하고 익명적으로 살며, 생활 속도도 빠르다. 그래서 동심원적인 농촌 공동체를 모델로 도시의 공동체를 바라보는 이상 ‘도시에는 공동체가 없다’ ‘공동체가 붕괴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농촌 공동체를 이타적인 공동체 모델이라 믿고 이것으로 도시의 공동체를 규정하는 것은 환상이다. 도시라고 공동체가 없는 게 아니다. 다만 농촌 공동체와 같은 공동체가 없을 뿐이다.
아파트는 도시 전반의 독특한 현상이 만든 주택이다. 과밀하게 살아야 하는 도시의 문제를 안고 있는 ‘정상적인’ 주택이다. 과밀한 도시가 거리를 좁히다 못해 다닥다닥 붙게 하고, 그 결과 같은 구조와 같은 형식의 평면을 반복하게 된다. 따라서 아파트는 그저 획일적인 집이 아니다. 과밀한 도시 주택의 현실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반복하며 애쓰고 있는 집이다.
아파트를 받기만 하고 줄 줄 모르는 주택이라고 하는데, 단독주택지에서는 공공이 도로, 상하수도, 가스, 전기를 집 문 앞까지 이어주고 공적인 도로에 ‘거주자우선주차구획’까지 만들어준다. 그러나 아파트에서는 공공도 부담해야 할 녹지, 놀이터, 커뮤니티 시설, 폐기물 재활용, 도로에서 자기 집까지의 수도관과 가스관까지 아파트 단지 주민이 부담한다. 이것이 모든 원인은 아니겠으나 공용공간은 좁아지고 옆집은 지하철의 옆 사람처럼 내 집에 붙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이동하며 지역에 근거하지 않고 살고 있는데, 과밀해 붙게 된 이웃에 대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익명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도어락’에서 묘사되듯이 도어락이 붙은 아파트의 철문 현관은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마지막 방어선이 돼 버렸다.
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프라이버시란 무언가를 빼앗겨버린(deprived) 상태를 의미한다”고 했다. 프라이버시는 이기적이어서 지키려는 것이 아니다. 빼앗겨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파트는 무언가를 빼앗겨버린 채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공(公)이 나서서 사(私)에게서 얻은 것을 공(共)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공공성이라는 입장에서 아파트를 생각한다면, 아파트는 오히려 주기만 하고 제대로 받지 못한 주택 형식인지도 모른다.
아파트가 이기적인 집단의 집이라면 단독주택, 연립주택, 빌라, 다세대주택 등 아파트를 제외한 다른 유형의 도시 주택은 이타적이며 깊은 인간관계로 지역 공동체를 유지해주는 주택 형식인가? 단독주택을 제외한 다른 주택의 평면은 아파트와 같고, 쌓아올리는 방식도 같다. 그렇다면 도시의 주택은 모두 나름의 이기적인 욕망을 담고 있는 집들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지하철에 몸을 싣고 도시 속을 빠르게 움직이며 산다. 더군다나 혼자 이동한다. 이렇게 이동하며 살다 보니 어디로 가는 사이에 저 먼 곳에 있는 역의 식당에서 식사하고, 길모퉁이를 돌게 되고, 길과 광장을 걷게 된다. 그래서 도시에서 활동 영역의 경계는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사는 동네 사람만 보고 사는 게 도시가 아니다.
농촌은 밀도가 낮아 적당한 거리를 충분히 떼고 살 수 있다. 그 적당한 거리가 이웃하는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준다. 그러나 도시는 과밀해서 어쩔 수 없이 신체는 가까워지고, 좁은 공간을 강요받는다. 오죽 그 거리가 짧으면 지하철에서 서로 얼굴도 보지 않고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이어폰의 음악 소리로 자기만의 사적인 공간을 만들겠는가. 물리적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우면 사회적인 거리는 멀어진다.
농촌에서는 인간관계가 깊고 지속적이며, 이웃집에 관심이 많고, 생활의 속도도 느리다. 그래서 농촌공동체는 동심원적이다. 그러나 도시는 다르다. 인간관계가 얕고 일시적이며, 이웃집에 무관심하고 익명적으로 살며, 생활 속도도 빠르다. 그래서 동심원적인 농촌 공동체를 모델로 도시의 공동체를 바라보는 이상 ‘도시에는 공동체가 없다’ ‘공동체가 붕괴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농촌 공동체를 이타적인 공동체 모델이라 믿고 이것으로 도시의 공동체를 규정하는 것은 환상이다. 도시라고 공동체가 없는 게 아니다. 다만 농촌 공동체와 같은 공동체가 없을 뿐이다.
아파트는 도시 전반의 독특한 현상이 만든 주택이다. 과밀하게 살아야 하는 도시의 문제를 안고 있는 ‘정상적인’ 주택이다. 과밀한 도시가 거리를 좁히다 못해 다닥다닥 붙게 하고, 그 결과 같은 구조와 같은 형식의 평면을 반복하게 된다. 따라서 아파트는 그저 획일적인 집이 아니다. 과밀한 도시 주택의 현실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반복하며 애쓰고 있는 집이다.
아파트를 받기만 하고 줄 줄 모르는 주택이라고 하는데, 단독주택지에서는 공공이 도로, 상하수도, 가스, 전기를 집 문 앞까지 이어주고 공적인 도로에 ‘거주자우선주차구획’까지 만들어준다. 그러나 아파트에서는 공공도 부담해야 할 녹지, 놀이터, 커뮤니티 시설, 폐기물 재활용, 도로에서 자기 집까지의 수도관과 가스관까지 아파트 단지 주민이 부담한다. 이것이 모든 원인은 아니겠으나 공용공간은 좁아지고 옆집은 지하철의 옆 사람처럼 내 집에 붙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이동하며 지역에 근거하지 않고 살고 있는데, 과밀해 붙게 된 이웃에 대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익명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도어락’에서 묘사되듯이 도어락이 붙은 아파트의 철문 현관은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마지막 방어선이 돼 버렸다.
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프라이버시란 무언가를 빼앗겨버린(deprived) 상태를 의미한다”고 했다. 프라이버시는 이기적이어서 지키려는 것이 아니다. 빼앗겨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파트는 무언가를 빼앗겨버린 채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공(公)이 나서서 사(私)에게서 얻은 것을 공(共)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공공성이라는 입장에서 아파트를 생각한다면, 아파트는 오히려 주기만 하고 제대로 받지 못한 주택 형식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