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의 기업경영 개입을 본격화하기 위해 마련한 ‘경영참여 목적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지침)’에 제동이 걸렸다. 지난 13일 공청회를 통해 발표한 지침 초안에 재계와 법조계가 “상위 법령과 무더기로 충돌하는 경영권 침해 조항을 담고 있어 연금사회주의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며 거세게 반발하자 정부가 추가적인 의견 수렴 및 조율에 나서기로 했다.

▶본지 11월 26일자 A1, 3면 참조
가이드라인 재논의하기로

국민연금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29일 서울 태평로 더플라자호텔에서 회의를 열어 복지부가 마련한 ‘국민연금 경영권 참여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심의했지만 의결에 이르지 못한 채 재논의하기로 했다.

이날 회의에서 경영계 대표위원들이 “가이드라인이 기업 경영에 과도한 부담을 줄 수 있어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우려를 제기하자, 기금운용위원장인 박능후 복지부 장관이 “가이드라인을 다시 마련하겠다”며 한발 물러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지침은 국민연금이 배당을 적게 주거나 법령을 어긴 ‘나쁜 기업’을 골라 정관변경, 이사해임 등 주주제안 방식으로 경영에 개입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달 13일 초안이 공개되면서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초안 중 15개 안팎 조항이 헌법 상법 등 상위법과 충돌해 ‘초법적 가이드라인’이란 비판이 제기됐다. 사회적 책임투자(ESG) 평가 등급이 떨어진 기업에 경영 개입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면서도 평가 결과는 비공개로 해 ‘깜깜이 지침’ 논란도 일었다.

논란이 번지자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8일 녹실회의를 열고 과도한 경영 간섭으로 해석되는 부분에 대해 부처 간 의견을 조율했다. 복지부는 녹실회의 결과를 반영해 지침 명칭을 ‘경영참여 목적 가이드라인’에서 ‘적극적 주주활동 가이드라인’으로 바꾸는 ‘꼼수’까지 동원했지만 이날 기금위는 재논의 결정을 내렸다.

예측 가능성 높여야

한 경제단체 임원은 “국민연금의 ‘초법적 경영 개입’에 따른 혼란 발생 가능성이 줄어든 것은 다행”이라며 “각계의 다양한 의견을 담아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경영참여 지침은 국민연금이 작년 7월 도입한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 책임원칙)를 실무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일종의 ‘해설서’다. 이 때문에 지침 최종안은 △‘나쁜 기업’ 선정 방식 △경영 참여 단계 및 절차 △주주제안(경영개입) 방법 및 내용을 최대한 정밀하게 담아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한 대형 로펌의 지배구조 전문 변호사는 “가이드라인을 이번 초안처럼 ‘배당정책 합리성’ ‘주주가치의 훼손’ 같은 추상적인 단어를 남발하며 달랑 10쪽짜리로 만들면 안 된다”며 “예를 들어 배당성향 30% 이상인 기업, 주가가 1년 이상 50% 이상 하락한 기업 등 구체적인 수치를 최대한 넣어 모호성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한 국장급 관료는 “금융시장 전문성이 낮은 복지부에 지침 작성을 전적으로 맡겨두기보다 기재부 금융위원회 등이 참여하는 ‘범부처 실무 조직’을 구성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통해 상법, 자본시장법 등 관련 법률과의 정합성, 실제 운영상 문제까지 충분히 검토한 지침을 시장에 내놔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상열/황정환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