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무역 봉쇄…개간으로 토지 늘리며 농업국가로, 여전히 밭농사 중심…최초의 농업서 펴내 생산성 높여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36) 15세기의 토지제도와 농업 (하)
1452년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는 전국 지역별 주요 생산물과 그것을 규정한 생태 환경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최초의 지리서다. 전국 8도의 토지는 총 171만 결에 달했다. 1결은 대략 2헥타르(㏊)다. 고려 말기인 1389년에는 평안도와 함길도를 제외한 6도의 통계인데 총 79만 결이었다. 두 도를 합하면 108만 결로 추산된다. 이후 1405년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 8도의 토지는 총 126만 결이었다.
경지와 작목의 구성
이로부터 14세기 말과 15세기 전반에 걸쳐 토지의 개간이 무척이나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왕조는 고려말에 성행한 민간의 육로와 해상을 통한 대중(對中) 무역을 일체 봉쇄했다. 그 대신 유교적 기풍의 질박한 농본주의 국가를 지향했다. 15세기 전반의 대규모 개간은 그런 문명사적 전환을 상징했다.
농업의 중심은 여전히 밭농사였다. 총 171만 결 가운데 밭이 123만여 결로 72%, 논이 47만여 결로 28%였다. 지역별 차이가 있어 경기·충청·경상·전라의 남부지방에서 논 비중은 37~46%인 반면, 황해·강원·평안·함길의 북부지방에서는 10%대에 불과했다. 가장 일반적으로 재배된 작목을 순위대로 열거하면 기장, 콩, 벼, 보리, 피였다. 이를 가리켜 오곡이라 했다. 섬유류 작물로서 지배적인 것은 뽕나무와 마였다. 1360년대 문익점(文益漸)이 중국에서 종자를 반입해 보급한 목면(木棉)의 재배는 전국 334개 군현에서 42개 군현에 불과했다. 15세기까지 의류의 주종은 견포와 마포였으며, 이를 위한 뽕나무와 마의 재배가 전국 대부분 군현에서 성하게 이뤄졌다. 뽕나무 재배가 가장 성한 지역은 황해도였다. 특히 서흥, 봉산, 장련의 3개 군은 누에치기를 생업으로 삼는다고 할 정도였다.
복합적 생태환경
이전에 소개한 대로 7세기 말의 신라촌장적이 전하는 생태환경은 곡작, 목축, 양잠, 임업이 적절히 어울린 초기 농경 사회의 그것이었다. 그런 생태 환경은 15세기까지도 작지 않은 비중으로 남아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강원도 삼척을 비롯한 7개 군현은 어업을 생업으로 삼는다고 했다. 평안도에 대해서는 의주를 비롯한 13개 군현에서 사냥의 이익이 있다고 했다. 이 밖에 여러 군현에 대해 염철(鹽鐵)을 숭상한다든가, 선상(船商)이나 상고(商賈)를 좋아한다고 했다. 전술한 대로 농업에서 벼농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부차적이었다. 벼는 지배계층의 사치적 식료로 수취됐으며, 아직 농촌 주민의 주곡으로는 널리 섭취되지 않았다. 인골에 대한 안정동위원소 분석에 의하면, 벼의 생산량이 많아져 농촌의 상위 계층이 벼를 주식으로 섭취함이 분명해지는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후 농촌의 생태 환경은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증산의 압력이 커짐에 따라 곡작 일변으로 단순화했다. 목면 재배의 보급은 견직업을 후퇴시켰다. 국제시장이 닫혀 있음도 그 같은 생태적 악화를 조장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농사직설>의 간행
과전법이 상정한 논 1결의 생산량은 벼 750두였다. 고려 초기인 10세기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준이었다. 그 사이 휴한농법이 극복되고 연작농법이 정착한 덕분이었다. 토지가 매년 경작되기 위해서는 비료 투여가 필수적이다. 1429년 <농사직설(農事直說)>이 간행됐다. 한국인이 편찬한 최초의 농서였다. 이 농서는 모든 작물에 비료를 투여하는 유비(有肥) 농업을 전제했다. 논에는 해마다 객토를 하거나 가축의 분이나 잡초를 투여했다. 밭에는 사람이나 가축의 분뇨와 아궁이의 재를 섞은 분회(糞灰)가 비료의 주종을 이뤘다. <농사직설>의 또 하나의 특질은 축력농구와 인력농구의 능숙한 결합이었다. 소가 끄는 축력농구로는 쟁기, 써레, 번지, 밀개 등이 있었고, 인력농구로는 쇠스랑, 곰배, 호미 등이 있었다. 특히 제초구로서 호미가 지방별로 다양한 크기로 보급된 점은 축력농구 중심의 화북농법에서는 찾을 수 없는 조선 농법의 특질이었다.
기억해주세요
1429년 <농사직설(農事直說)>이 간행됐다. 한국인이 편찬한 최초의 농서였다. 이 농서는 모든 작물에 비료를 투여하는 유비(有肥) 농업을 전제했다. 논에는 해마다 객토를 하거나 가축의 분이나 잡초를 투여했다. 밭에는 사람이나 가축의 분뇨와 아궁이의 재를 섞은 분회(糞灰)가 비료의 주종을 이뤘다.
경지와 작목의 구성
이로부터 14세기 말과 15세기 전반에 걸쳐 토지의 개간이 무척이나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왕조는 고려말에 성행한 민간의 육로와 해상을 통한 대중(對中) 무역을 일체 봉쇄했다. 그 대신 유교적 기풍의 질박한 농본주의 국가를 지향했다. 15세기 전반의 대규모 개간은 그런 문명사적 전환을 상징했다.
농업의 중심은 여전히 밭농사였다. 총 171만 결 가운데 밭이 123만여 결로 72%, 논이 47만여 결로 28%였다. 지역별 차이가 있어 경기·충청·경상·전라의 남부지방에서 논 비중은 37~46%인 반면, 황해·강원·평안·함길의 북부지방에서는 10%대에 불과했다. 가장 일반적으로 재배된 작목을 순위대로 열거하면 기장, 콩, 벼, 보리, 피였다. 이를 가리켜 오곡이라 했다. 섬유류 작물로서 지배적인 것은 뽕나무와 마였다. 1360년대 문익점(文益漸)이 중국에서 종자를 반입해 보급한 목면(木棉)의 재배는 전국 334개 군현에서 42개 군현에 불과했다. 15세기까지 의류의 주종은 견포와 마포였으며, 이를 위한 뽕나무와 마의 재배가 전국 대부분 군현에서 성하게 이뤄졌다. 뽕나무 재배가 가장 성한 지역은 황해도였다. 특히 서흥, 봉산, 장련의 3개 군은 누에치기를 생업으로 삼는다고 할 정도였다.
복합적 생태환경
이전에 소개한 대로 7세기 말의 신라촌장적이 전하는 생태환경은 곡작, 목축, 양잠, 임업이 적절히 어울린 초기 농경 사회의 그것이었다. 그런 생태 환경은 15세기까지도 작지 않은 비중으로 남아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강원도 삼척을 비롯한 7개 군현은 어업을 생업으로 삼는다고 했다. 평안도에 대해서는 의주를 비롯한 13개 군현에서 사냥의 이익이 있다고 했다. 이 밖에 여러 군현에 대해 염철(鹽鐵)을 숭상한다든가, 선상(船商)이나 상고(商賈)를 좋아한다고 했다. 전술한 대로 농업에서 벼농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부차적이었다. 벼는 지배계층의 사치적 식료로 수취됐으며, 아직 농촌 주민의 주곡으로는 널리 섭취되지 않았다. 인골에 대한 안정동위원소 분석에 의하면, 벼의 생산량이 많아져 농촌의 상위 계층이 벼를 주식으로 섭취함이 분명해지는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후 농촌의 생태 환경은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증산의 압력이 커짐에 따라 곡작 일변으로 단순화했다. 목면 재배의 보급은 견직업을 후퇴시켰다. 국제시장이 닫혀 있음도 그 같은 생태적 악화를 조장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농사직설>의 간행
과전법이 상정한 논 1결의 생산량은 벼 750두였다. 고려 초기인 10세기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준이었다. 그 사이 휴한농법이 극복되고 연작농법이 정착한 덕분이었다. 토지가 매년 경작되기 위해서는 비료 투여가 필수적이다. 1429년 <농사직설(農事直說)>이 간행됐다. 한국인이 편찬한 최초의 농서였다. 이 농서는 모든 작물에 비료를 투여하는 유비(有肥) 농업을 전제했다. 논에는 해마다 객토를 하거나 가축의 분이나 잡초를 투여했다. 밭에는 사람이나 가축의 분뇨와 아궁이의 재를 섞은 분회(糞灰)가 비료의 주종을 이뤘다. <농사직설>의 또 하나의 특질은 축력농구와 인력농구의 능숙한 결합이었다. 소가 끄는 축력농구로는 쟁기, 써레, 번지, 밀개 등이 있었고, 인력농구로는 쇠스랑, 곰배, 호미 등이 있었다. 특히 제초구로서 호미가 지방별로 다양한 크기로 보급된 점은 축력농구 중심의 화북농법에서는 찾을 수 없는 조선 농법의 특질이었다.
기억해주세요
1429년 <농사직설(農事直說)>이 간행됐다. 한국인이 편찬한 최초의 농서였다. 이 농서는 모든 작물에 비료를 투여하는 유비(有肥) 농업을 전제했다. 논에는 해마다 객토를 하거나 가축의 분이나 잡초를 투여했다. 밭에는 사람이나 가축의 분뇨와 아궁이의 재를 섞은 분회(糞灰)가 비료의 주종을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