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언제까지 미제 물건만 사 쓰고 라디오 하나 몬 맹글어서 되겄나. 누구라도 해야 하는 기 아니가. 우리가 한 번 해 보는 기라. 먼저 하는 사람이 고생도 되겄지만서도 하다 보면 나쇼날이다, 도시바다 하는 거 맹키로 안 되겄나.” 1958년 1월, 구인회 금성사(현 LG전자) 창업주가 라디오 국산화를 결심하면서 동생들과 장남에게 한 말이다.

이듬해인 1959년 첫선을 보인 금성사 라디오는 국내 전자산업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모델명 ‘A-­501’의 A는 교류전원(AC)의 첫 글자, 5는 진공관 수, 01은 국산 1호를 의미했다. 한 대 가격이 2만환으로 금성사 직원 평균 월급(6000환)의 세 배를 넘었지만,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외제 라디오(약 3만3000환)보다는 40%가량 저렴했다.

한국공학한림원이 다음주에 발간할 <꿈이 만든 나라-대한민국 산업기술 100장면>에는 한국 경제발전사의 극적인 순간들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는 ‘금성 라디오’를 국산화한 지 3년 만에 미국에 수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후 삼성전자의 64Kb D램 반도체 개발과 LG전자의 세계 첫 올레드TV 상용화 등에 성공하며 ‘전자강국’으로 우뚝 섰다.

영일만의 허허벌판에서 철강산업을 일으킨 포항제철(현 포스코)은 1973년 제1고로에서 쇳물을 처음 생산한 여세를 몰아 세계 5위 철강사에 이름을 올렸다. 1968년 첫 삽을 뜰 때 “제철소를 짓지 못하면 우향우해서 바다에 빠져 죽자”며 34명의 창업 멤버를 다그치던 ‘악바리’ 박태준 사장은 첫 쇳물을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현대자동차가 미국 포드의 하청 공장에서 벗어나 1975년 자체 개발한 국산차 1호 ‘포니’는 세계 7대 자동차 생산국(지난해 기준)으로 발돋움한 시발점이 됐다. 이들이 뿌린 씨앗 덕분에 한국은 농업국가에서 첨단 기술국가로 성장했고, 1990년대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이동통신시스템의 세계 최초 상용화까지 이룰 수 있었다.

안타까운 장면도 있다. 1959년 원자력연구소 설립과 함께 출발한 원자력발전산업은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에 400억달러 규모의 원전을 수출하는 쾌거를 이뤘지만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에 발목 잡혀 고사 위기를 맞고 있다. 앞으로 100년 뒤에는 어떤 산업, 어떤 기술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살찌운 100대 장면으로 기록될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