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수정도 새 윤리적·법적 문제 양산
'자녀 복리' 우선하며 법제도 정비해야
윤성근 <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법은 일정한 가치와 정책목표를 갖고 제도를 설계한다. 민법 제844조의 친생추정 규정도 마찬가지다. 부인이 혼인 중에 임신한 자녀는 남편의 자녀로 추정한다. 이 추정을 벗어나려면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날로부터 2년 내에 친생부인(否認)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자녀의 출생 후 친생자임을 승인한 자는 다시 친생부인 소송을 제기하지 못한다.
다만 친생추정 원칙의 예외에 해당할 때는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소송(친생부인 소송과는 다른 것이다)을 제기할 수 있다. 부부의 한쪽이 장기간 해외에 나가 있는 등 부인이 남편의 자녀를 포태할 수 없는 것이 외관상 명백한 사정이 있는 경우 예외가 인정된다(198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반대의견도 있음). 그동안 과학기술이 발전해 유전자 검사는 친자관계를 99% 이상의 확률로 판정한다. ‘외관상 명백한 사정’보다 유전자 검사 결과가 더 확실한 것 아닌가 의문이 들 수 있다.
국회가 사회의 변화에 부합하는 법을 내놓지 않고 있을 때 법원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법원은 법률의 문언이나 정책목표에 더 기속되는 것일까 아니면 과학적으로 인정된 사실에 복종해야 하는 것일까? 위 판결의 다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자녀의 복리는 친자관계의 성립과 유지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혼인 중의 부부 사이에 태어난 자녀에게 당연히 친생추정이 적용되고, 생물학적 혈연관계가 없다는 점이 확인됐다는 사정만으로 친생추정이 미치지 않는다거나 그 예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인공수정에 동의했고 출생 후 이의 없이 자신의 자녀로 출생신고해 20년 이상 동거하며 실질적 친자관계를 형성해온 것은 친생자 승인으로 볼 수 있다.
이 판결에는 여러 별개의견, 반대의견, 보충의견이 있다. 지면관계상 일일이 소개하기 어렵지만 모두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견해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그중 하나만 소개한다. 인공수정 등 과학기술의 발전은 과거 ‘운명의 문제’를 ‘선택의 문제’로 바꿨다. 인공수정을 통한 자녀의 출생을 희망한 남편과 부인의 ‘의사’에 대한 법적 평가와 그 책임 한계를 논의할 시점이다. 혈연관계 없이 형성된 가족관계도 헌법과 민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가족관계에 해당하며, 생물학적 친자관계 외에 사회적 친자관계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미국의 사례도 참고할 수 있다. 한 미국 남성이 가이아나에서 현지 여성과 성관계를 가졌고 그 후 딸이 태어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남성은 그 아이를 딸처럼 취급해 여러 번 만났고 아버지로서 책임지겠다는 말도 했으며 생명보험 수익자로 지정하기도 했다. 그 여성과 딸이 뉴욕 가정법원에 인지 및 부양청구를 하자 남성은 DNA 검사를 요구했고, 그 결과 생물학적 혈연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정법원은 아이와 정서적 관계가 확립된 것으로 보아 금반언(禁反言·estoppel)의 원칙에 따라 DNA 검사 결과와 무관하게 딸에 대해 친자관계를 부인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주 대법원에서 확정됐다(Shondel J v Mark D).
이 판결에도 소수의견이 있으며 많은 찬반 논의가 있다. 생물학적인 아버지라며 친자관계를 주장하는 것이 아이가 현재 아버지로 삼고 있는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를 파탄시켜 아이의 최선의 이익에 해가 된다며 배척한 사례도 있다(Fidel A v Sharon N). 동성혼과 관련된 사례도 상당히 쌓여 있다.
혼인제도의 변화, 인공수정을 포함한 출산 방식의 다양화 등 사회문화의 변화와 기술의 발전은 수많은 새로운 윤리적 법적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 진지한 사회적 논의와 대안에 대한 합의 및 법제도 정비가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