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팔순 시인이 부르는 '늦저녁 버스킹'
‘나뭇잎 떨어지는 저녁이 와서/내 몸속에 악기가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그간 소리내지 않았던 몇 개의 악기/현악기의 줄을 고르는 동안/길은 더 저물고 등불은 깊어진다/나 오랫동안 먼 길 걸어왔음으로/길은 등 뒤에서 고단한 몸을 눕힌다/삶의 길이 서로 저마다 달라서/네거리는 저 혼자 신호등 불빛을 바꾼다/오늘밤 이곳이면 적당하다/이 거리에 자리를 펴리라’

김종해 시인의 신작 시집 <늦저녁의 버스킹>(문학세계사)을 펼치고 표제작을 읽다가 한참 생각한다. 팔순을 앞둔 노시인이 왜 하필 ‘버스킹(거리 공연)’에 나섰을까. 시인은 “사람 몸 하나가 온갖 감정과 영혼을 담고 있는 악기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며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도, 한 잎의 풀잎에서도 바람이 가진 고유의 악기를 느낀다”고 답한다.

"사람 몸은 온갖 감정 담은 악기"

그가 저물녘 네거리에서 현악기의 줄을 고른 뒤 온몸으로 연주할 곡목은 무엇일까. 그 목록에는 그동안 못했던 ‘나를 위해 내가 부르고 싶은 나의 노래’와 삶의 고비마다 맞닥뜨렸던 ‘나그네의 한철 시름’, ‘이생에서 뛰놀았던 생의 환희’가 들어 있다.

‘나뭇잎 떨어지고 해지는 저녁/내 몸속의 악기를 모두 꺼내어 연주하리라/어둠 속의 비애여/아픔과 절망의 한 시절이여/나를 위해 내가 부르고 싶은 나의 노래/바람처럼 멀리 띄워 보내리라/사랑과 안식과 희망의 한때/나그네의 한철 시름도 담아보리라/저녁이 와서 길은 빨리 저물어 가는데/그 동안 이생에서 뛰놀았던 생의 환희/내 마음속에 내린 낙엽 한 장도/오늘밤 악기 위에 얹어서 노래하리라’

이 버스킹에서 그는 연주자이면서 관객이다. 그의 ‘몸관악기’는 깊은 내면에서 울리는 심금(心琴)이자 우리의 영혼을 건드리는 현금(弦琴)이다. 그는 첫 시집 <인간의 악기>에서부터 사람과 음악을 ‘삶의 오선지’에 그려왔다. 이번 시집에서는 그 선율과 리듬을 더욱 선명한 음표에 담아냈다.

일상에서 체득한 삶의 의미와 행복에 관한 성찰도 전한다. 떨어지는 나뭇잎에서 ‘저마다 몸속에 제 이름을 새긴 문양’을 발견하고, 시멘트 길바닥을 뚫고 나온 풀꽃 앞에서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한없이 공손해진다.

나는 누구 심금 울릴 수 있을까

아내에 관한 시편도 많다. 눈 내린 성탄절 다음날의 결혼식을 떠올리는 ‘축복이 잊히지 않는 이유’, 늙어서야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간 얘기인 ‘호놀룰루는 아름답다’, 갈현동에서 세종로로 이사한 뒤의 일상을 다룬 ‘광화문의 달’ 등이 따스하다. ‘아내를 사랑하라’에서는 해학적인 노년의 사랑법을 현자의 조언처럼 들려준다.

‘프로야구에 빠져 거실의 TV를 보다가도/아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방영시간이면 방을 옮겨라/주중엔 집안에 오래 머무르지 말며/없는 듯 지내고, 소리 내지 말라/(…)/낮시간에 가끔 영화관도 함께 가라/가서, 눈가에 감도는 눈물도 아내 몰래 닦아내라’

그는 또 ‘아내가 생기 있게 살아 있는 삶이 나는 행복하다/아직은 아프지 않고/이 세상에서 아내와 함께하는 삶이/나에게는 은혜롭다’고 고백한다. 아내가 곧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등단 57년째를 맞은 그의 시는 이처럼 삶과 한몸을 이루고 있다. 생의 높낮이를 초월한 달관의 경지처럼 편안하고 울림이 깊다.

시집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다시 생각한다. 나는 훗날 ‘늦저녁의 버스킹’에서 무슨 노래를 부를까. 그때 내 몸의 악기에서는 어떤 음이 나올까. 그 소리로 누군가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까.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고 사람들 마음도 갈수록 척박해진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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