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조선 최고 천재 화가, 民草 얼굴서 행복을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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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화가 김홍도
이충렬 지음 / 메디치미디어
480쪽 / 2만2000원
이충렬 지음 / 메디치미디어
480쪽 / 2만2000원
단원 김홍도는 조선 영조 때인 1745년 태어나 정조, 순조까지 세 명의 임금을 섬기면서 40년 동안 그림을 그렸다. 그가 남긴 작품은 실로 다양하다. 민초들의 삶의 표정 하나하나가 생생히 살아 있는 풍속화부터 근엄한 임금의 초상화, 실경산수화, 화조도, 인물화, 시를 주제로 한 시의도(詩意圖), 궁중기록화 등에 이르기까지 현존 작품 중에는 국보·보물이 수두룩하다.
임금의 초상을 세 차례나 그린 어용화사(御容畵師)였지만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무반의 길로 나갔으면 평탄했을 텐데 잘되면 도화서 화원, 여차하면 천한 환쟁이 신세를 면치 못하는 화가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이 때문에 단원은 평생 두 가지 벽과 마주해야 했다. 그림은 귀하게 여기면서도 정작 화가는 천시했던 조선의 관습과 중인이라는 신분의 한계였다.
<천년의 화가 김홍도>는 이런 단원의 삶을 기록한 첫 번째 전기다. 조선 최고의 천재화가로 꼽히는 단원이지만 그의 삶에는 구멍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생몰의 상황과 주요 그림에 얽힌 사연, 심지어 단원이라는 유명한 호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불명확해 논란이 분분했다.
간송 전형필,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 김수환 추기경의 전기를 써 전기문학의 새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 이충렬 씨는 이런 구멍을 메우기 위해 다양한 자료에서 김홍도의 흔적을 찾아냈다.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승정원일기’ ‘일성록’ 같은 국가 기록물은 물론 단원 스승인 강세황의 ‘표암유고’, 김광국의 ‘석농화원’ 등 단원과 동시대인들이 남긴 기록에 흩어져 있는 편린을 끌어모아 단원의 삶을 촘촘히 복원해냈다.
책은 전기인 만큼 대화체로 풀어내 술술 읽힌다. 경기 안산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이웃 마을에 살던 표암 강세황을 첫 번째 스승으로 섬기고, 표암을 통해 당대 거장 현재 심사정을 두 번째 스승으로 섬기게 된 과정, 심사정 문하에서 동갑내기 이인문과 동문수학하며 평생의 벗으로 지낸 일 등이 아름다운 동화처럼 펼쳐진다. 단원은 마침내 도화서 화원이 돼 실력을 인정받고 영조의 어진을 그린 공로로 벼슬까지 얻게 된다.
스물여덟 나이에 임명된 사재감의 종6품 주부. 녹봉도 받지 못하는 그 벼슬이 화근이었다. 과거시험을 통하지 않고 6품직을 받으면 사서삼경에 관한 시험을 봐야 했는데 여기서 낙방한 것. 영조의 배려로 재시험의 기회가 주어져 파직은 면했으나 모욕감과 수치심으로 인한 상처가 컸다. 생계를 위해 퇴근 후 그림을 그려 광통교에 내다 팔아야 했다. 신선도든 산수화든 주문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사례도 주는 대로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광통교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싱글벙글 웃는 사람, 낮술을 걸친 듯 불콰한 사람, 호박엿을 손에 쥔 채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아이…. 김홍도는 근엄하기만 한 조정 대신, 관료들과 달리 다양하고 생생한 평민들의 얼굴에서 행복을 발견했다. 강세황은 ‘속된 그림, 풍속화를 그려도 되느냐’는 김홍도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세상에 속된 그림과 속되지 않은 그림이 있는 게 아니라 속된 화가와 속되지 않은 화가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김홍도는 세상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고 빨래터, 우물가, 대장간, 말 목장, 어촌 등을 두루 찾아가 후세에 길이 남을 풍속화를 남겼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구가한 영조, 정조도 단원의 재주를 다 알아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단원은 도화서를 떠나 과일밭을 가꾸고, 얼음창고(동빙고·서빙고)와 말목장을 관리하고, 경북 안동 옆에 있는 안기 역참 찰방으로 일하는 등 그림과는 무관한 세월도 적잖이 보내야 했다. 연풍현감에서 억울하게 파직되기도 했다.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을 답사해 그림을 남긴 것은 다행이었다. 정조는 말년에 단원에게 수원 화성에 비치할 화성팔경도 병풍을 맡긴 데 이어 도화서로 그를 다시 불렀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정조의 승하로 상황이 달라졌고, 단원은 늦게 얻은 아들의 월사금을 주지 못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 속에 삶을 마감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상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우선 단원의 출생지를 안산 성포리 갯가마을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힌 점이다. 지금까지 단원의 고향은 서울설, 안산설로 엇갈리다 안산설로 굳어졌지만 구체적인 장소는 불확실한 상태였다. 저자는 김홍도가 연령대에 따라 썼던 서호(西湖), 단원(檀園), 단구(丹丘·丹邱) 등의 아호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이들 아호가 모두 성포리 부근과 관련돼 있음을 여러 사실로 고증한다. 안산 성포리 앞바다의 별칭이었다고 한다.
‘단원’이라는 호의 연원도 새롭게 밝혀냈다. 지금까지는 단원이 그림공부 교재로 삼았던 중국 화보 ‘개자원화전’을 지은 명나라 화가 이장형의 호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라는 주장이 대세였다. 하지만 저자는 성포리에 있는 노적봉 기슭의 박달나무 숲에서 호를 따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단원이 그린 ‘단원도’의 배경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인왕산 옆 백운동천 계곡이었다는 것도 밝혀냈다. 100여 장의 단원 그림과 함께 그의 삶을 읽노라면 그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임금의 초상을 세 차례나 그린 어용화사(御容畵師)였지만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무반의 길로 나갔으면 평탄했을 텐데 잘되면 도화서 화원, 여차하면 천한 환쟁이 신세를 면치 못하는 화가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이 때문에 단원은 평생 두 가지 벽과 마주해야 했다. 그림은 귀하게 여기면서도 정작 화가는 천시했던 조선의 관습과 중인이라는 신분의 한계였다.
<천년의 화가 김홍도>는 이런 단원의 삶을 기록한 첫 번째 전기다. 조선 최고의 천재화가로 꼽히는 단원이지만 그의 삶에는 구멍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생몰의 상황과 주요 그림에 얽힌 사연, 심지어 단원이라는 유명한 호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불명확해 논란이 분분했다.
간송 전형필,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 김수환 추기경의 전기를 써 전기문학의 새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 이충렬 씨는 이런 구멍을 메우기 위해 다양한 자료에서 김홍도의 흔적을 찾아냈다.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승정원일기’ ‘일성록’ 같은 국가 기록물은 물론 단원 스승인 강세황의 ‘표암유고’, 김광국의 ‘석농화원’ 등 단원과 동시대인들이 남긴 기록에 흩어져 있는 편린을 끌어모아 단원의 삶을 촘촘히 복원해냈다.
책은 전기인 만큼 대화체로 풀어내 술술 읽힌다. 경기 안산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이웃 마을에 살던 표암 강세황을 첫 번째 스승으로 섬기고, 표암을 통해 당대 거장 현재 심사정을 두 번째 스승으로 섬기게 된 과정, 심사정 문하에서 동갑내기 이인문과 동문수학하며 평생의 벗으로 지낸 일 등이 아름다운 동화처럼 펼쳐진다. 단원은 마침내 도화서 화원이 돼 실력을 인정받고 영조의 어진을 그린 공로로 벼슬까지 얻게 된다.
스물여덟 나이에 임명된 사재감의 종6품 주부. 녹봉도 받지 못하는 그 벼슬이 화근이었다. 과거시험을 통하지 않고 6품직을 받으면 사서삼경에 관한 시험을 봐야 했는데 여기서 낙방한 것. 영조의 배려로 재시험의 기회가 주어져 파직은 면했으나 모욕감과 수치심으로 인한 상처가 컸다. 생계를 위해 퇴근 후 그림을 그려 광통교에 내다 팔아야 했다. 신선도든 산수화든 주문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사례도 주는 대로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광통교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싱글벙글 웃는 사람, 낮술을 걸친 듯 불콰한 사람, 호박엿을 손에 쥔 채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아이…. 김홍도는 근엄하기만 한 조정 대신, 관료들과 달리 다양하고 생생한 평민들의 얼굴에서 행복을 발견했다. 강세황은 ‘속된 그림, 풍속화를 그려도 되느냐’는 김홍도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세상에 속된 그림과 속되지 않은 그림이 있는 게 아니라 속된 화가와 속되지 않은 화가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김홍도는 세상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고 빨래터, 우물가, 대장간, 말 목장, 어촌 등을 두루 찾아가 후세에 길이 남을 풍속화를 남겼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구가한 영조, 정조도 단원의 재주를 다 알아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단원은 도화서를 떠나 과일밭을 가꾸고, 얼음창고(동빙고·서빙고)와 말목장을 관리하고, 경북 안동 옆에 있는 안기 역참 찰방으로 일하는 등 그림과는 무관한 세월도 적잖이 보내야 했다. 연풍현감에서 억울하게 파직되기도 했다.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을 답사해 그림을 남긴 것은 다행이었다. 정조는 말년에 단원에게 수원 화성에 비치할 화성팔경도 병풍을 맡긴 데 이어 도화서로 그를 다시 불렀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정조의 승하로 상황이 달라졌고, 단원은 늦게 얻은 아들의 월사금을 주지 못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 속에 삶을 마감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상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우선 단원의 출생지를 안산 성포리 갯가마을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힌 점이다. 지금까지 단원의 고향은 서울설, 안산설로 엇갈리다 안산설로 굳어졌지만 구체적인 장소는 불확실한 상태였다. 저자는 김홍도가 연령대에 따라 썼던 서호(西湖), 단원(檀園), 단구(丹丘·丹邱) 등의 아호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이들 아호가 모두 성포리 부근과 관련돼 있음을 여러 사실로 고증한다. 안산 성포리 앞바다의 별칭이었다고 한다.
‘단원’이라는 호의 연원도 새롭게 밝혀냈다. 지금까지는 단원이 그림공부 교재로 삼았던 중국 화보 ‘개자원화전’을 지은 명나라 화가 이장형의 호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라는 주장이 대세였다. 하지만 저자는 성포리에 있는 노적봉 기슭의 박달나무 숲에서 호를 따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단원이 그린 ‘단원도’의 배경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인왕산 옆 백운동천 계곡이었다는 것도 밝혀냈다. 100여 장의 단원 그림과 함께 그의 삶을 읽노라면 그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