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경주, 수로 교통 발달한 해항 도시…초기부터 日 혼슈 지역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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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바다로 나간 신라인들
江 이용한 수로교통
형산강 거쳐 포항서 동해로 빠져
태화강 통해 울산만으로 연결
토함산 너머 감포는 국가항구로
江 이용한 수로교통
형산강 거쳐 포항서 동해로 빠져
태화강 통해 울산만으로 연결
토함산 너머 감포는 국가항구로
신라는 진한 12국 가운데 하나인 사로국을 중심으로 출발했다. 4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자체 통일을 완수하지 못했으며, 초기부터 가야는 물론 왜 세력의 침공을 받는 수난을 겪었다. 학자들은 신라가 고대국가로 늦게 발전한 원인을 영역이 동남부 내륙지방에 국한돼 고립됐고, 수도가 교통이 불편한 분지였다는 데서 찾는다.
항구 도시 경주의 선택
정말 그럴까?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한전(韓傳)에 따르면 진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한국에 온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이들은 산둥(山東)이나 랴오둥(遼東) 등의 해안가에 살았던 동이족들로 뱃길을 이용해 서해를 건너왔으며, 후에는 중국 지역과 무역을 벌였다. 또 변진(가야의 전신)과 마찬가지로 바다를 건너 제주도의 주호, 일본 열도의 왜 등과 철 등을 무역했다. 그렇다면 진한을 계승한 신라는 초기부터 교역망과 해양 활동 능력이 발달했을 것이다.
수도인 경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큰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가 우물과 관련된 여인(水神)과 결혼해 건국한 땅이다. 이런 신령성 때문에 ‘금성(金城·신령스러운 도읍)’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경주는 실제로는 지정학적이고 지경학적인 가치가 풍부했으며, 이는 해양 활동과 깊이 연관돼 있다.
경주시에서 북쪽으로 형산강을 따라가다 보면 포항 영일만에서 동해로 들어간다. 아달라왕 때인 157년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라는 제사집단이 일본 열도를 향해 출항한 ‘도기야’가 있다. 또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을 넘어서 내려가면 감포가 있다. 면적은 좁지만 직선 거리로는 경주와 불과 20여㎞ 남짓해 국가 항구로 사용됐다. 훗날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왜적을 막기 위해 해룡이 된 수중릉과 감은사가 있다. 또 경주권과 연결되는 태화강은 48.5㎞를 흐르다가 서생포 등의 포구들이 발달한 울산만으로 들어간다(윤명철 <해양역사상과 항구도시들>). 삼국사기에 따르면 4대 임금인 석탈해(昔脫解)는 왜국의 동북 1000여 리 떨어진 다파나국(多波那國)에서 출발한 상자() 속에 넣어져 울산 지역인 아진포(阿珍浦)에 들어왔다. 통일신라시대에 이슬람 상인으로 추정되는 처용과 연관된 개운포와 처용암도 울산만에 있다. 이처럼 경주는 육로 교통은 불편하지만 강을 이용한 내륙 수로교통과 연결된 동해 남부에 훌륭한 외항들을 갖고 있는 해항 도시였다. 이 때문에 신라는 초기부터 해외로 진출했고, 외지 사람이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동해를 건너간 초기 신라인들
박혁거세가 해양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확실치 않지만, 그 시대에 왜국에서 표주박을 차고 바다를 건너온 호공은 훗날 재상이 됐다. 또 4대왕 석탈해는 왜와 연관된 인물인데, 즉위 3년째에는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했다. 바다를 건너온 외부 세력이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신라와 우호적인 이 왜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선사시대부터 이 지역 주민들은 일본 열도의 혼슈 일대에 진출했다. 동해 중부에서 출항해 울릉도와 독도를 지형지물로 활용하면서 횡단하거나, 동해 남부에서 출항해 해류를 타고 바람을 이용하면 혼슈 남부 해안지방인 야마구치(山口)현, 시마네(島根)현, 돗토리(鳥取)현, 후쿠이(福井)현에 상륙할 수 있다. 특히 영일만 지역과 이즈모 지역은 동일하게 북위 35.5도 선상에 있으므로 교류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실제로 동해와 남해 근처 해역에서 표류병을 투하한 실험 결과를 보면 겨울에는 약 40%가 시마네현 해안에 도착했다.(일본전국연안해양지)
이 때문에 이런 지역에서는 우리, 특히 신라계와 연관된 유적과 유물, 이야기는 물론이고, ‘시라기(신라)’라는 지명도 많이 남아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실린 신라 왕자인 ‘아메노히보코(天日槍(천일창) 또는 天之日矛(천지일모))’가 8개(또는 7개)의 보물을 갖고 도착해 활동한 지역들이다. 일본 신화에서 가야계인 태양여신과 격돌을 벌인 해양과 폭풍의 신인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신라계다. 그는 패배한 뒤 근국(뿌리 나라)인 신라로 돌아갔다. 또 다른 기록에는 그가 신라국에서 흙배를 타고 이즈모에 내려왔다고 한다.
이즈모의 고진타니 유적에서는 358개의 청동칼이 나왔고, 청동창, 동탁(제사용 방울) 등의 금속제품들이 출토됐다. 신라에서 제철(製鐵) 집단이 진출했고, 이들이 철광산을 발견하면서 대량으로 무기와 농기구를 생산했으며, 거대한 고분군들이 증명하듯 소국들을 세웠다. 결국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시마네현 주민들은 신라인 피가 많이 섞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왜인의 침입은 상세하게(?) 기록한 반면 신라인의 진출은 기록을 안 해서 결과적으로 역사와 자존심을 왜곡시켰다. 다행스럽게도 <삼국유사>에는 157년에 근오기(영일만)에 거주하던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바위’를 타고 동해를 건너가 일본 땅에서 소국의 왕과 왕비가 됐다는 기록이 있다. 아름답고 신비한 사연이 담긴 이 신화는 중앙정부와 갈등을 일으킨 ‘해와 달’을 숭배하는 제사 집단이 혼슈 남부의 이즈모 지역으로 진출했으며, 계속 교류한 역사를 알려준다.
신라를 침공한 ‘규슈 倭’
해양 진출에 유리한 경주를 둘러싼 해양 환경은 양날의 비수처럼 때로는 왜의 침략을 야기했고, 신라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2대 남해왕 때 왜인들이 100여 척의 배로 영일만 지역을 침범했다. 233년에 신라는 해상에서 왜와 화공전까지 벌였고, 295년에는 백제와 공모해 왜국을 치려고 했으나 중지했다. 왜병은 실성왕 때인 405년에 경주의 명활성까지 공격했고, 다음해에는 해안을 공격했다. 그러자 실성왕은 408년에 대마도를 정벌하는 계획을 수립했는데 실천은 못했다. 왜는 444년에 수도인 금성을 10일 동안 포위했고, 459년 4월에는 100여 척으로 공격하고, 수도의 월성(月城)을 포위했다. 이어 낙동강 하류인 양산을 공격하고 사람들을 납치했다.
이런 자연환경과 현실 속에서 신라는 수군을 양성하고 활용해야만 했다. 석탈해의 수군들은 가야의 선단(船團)과 낙동강 하구에서 전투를 벌였다. 209년에는 남해안 일대의 8개 도시국가들(浦上八國)이 김해 지역을 공격하자 군사를 파병해 가야를 구원했다. 467년에는 전함을 수리했으며, ‘선부(船府)’라는 전문 관청을 설치했다. 이뿐만 아니라 수도권 요소요소에는 해양 방어체제를 구축해 463년에는 성 2개를 쌓았으며, 493년에는 군사기지인 임해진과 장령진을 설치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왕성이 경주처럼 해안과 쉽게 연결되면서도, 적당하게 먼 거리이고,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도시가 아니었다면, 신라는 거듭된 왜의 해양 공격에 존속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그런데 궁금증이 생긴다. 가야나 백제가 아니라 유독 신라 지역만을 공격한 이 왜병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고대에는 해양환경에 따라 정치 군사 외교 등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통계를 보면 왜병들은 주로 남풍이 부는 봄철에 침입했다. 남동풍이 불 때 규슈나 대마도에서 배를 띄우면 북동진하는 해류(쿠로시오해류)와 조류를 타고 울산, 포항 등 동해 남부에 도착할 수 있다. 따라서 신라를 수십여 차례 공격한 왜는 규슈 지역에 바탕을 둔 가야, 백제와 연관이 깊었으며, 혼슈의 친(親)신라계 왜와는 적대적인 세력이었다.
4세기 말부터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추진해 장수왕 때인 481년에는 안동, 청송, 울진, 영해 등을 영토로 삼았고, 포항시인 흥해까지 공격했다. 또 백제와 가야, 왜는 해양외교를 성사시키면서 신라를 압박하고 공격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신라는 해양 능력의 강화라는 시대의 필요성과 요구를 외면하지 않았고, 산골의 강인함과 농토의 순박함에 해양의 진취적이고 실용적인 행동을 조화시켰다. 그 결과 6세기에 들어서면서 해양 활동은 새롭게 발전했고, 이는 삼국 통일의 토대가 됐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
항구 도시 경주의 선택
정말 그럴까?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한전(韓傳)에 따르면 진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한국에 온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이들은 산둥(山東)이나 랴오둥(遼東) 등의 해안가에 살았던 동이족들로 뱃길을 이용해 서해를 건너왔으며, 후에는 중국 지역과 무역을 벌였다. 또 변진(가야의 전신)과 마찬가지로 바다를 건너 제주도의 주호, 일본 열도의 왜 등과 철 등을 무역했다. 그렇다면 진한을 계승한 신라는 초기부터 교역망과 해양 활동 능력이 발달했을 것이다.
수도인 경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큰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가 우물과 관련된 여인(水神)과 결혼해 건국한 땅이다. 이런 신령성 때문에 ‘금성(金城·신령스러운 도읍)’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경주는 실제로는 지정학적이고 지경학적인 가치가 풍부했으며, 이는 해양 활동과 깊이 연관돼 있다.
경주시에서 북쪽으로 형산강을 따라가다 보면 포항 영일만에서 동해로 들어간다. 아달라왕 때인 157년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라는 제사집단이 일본 열도를 향해 출항한 ‘도기야’가 있다. 또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을 넘어서 내려가면 감포가 있다. 면적은 좁지만 직선 거리로는 경주와 불과 20여㎞ 남짓해 국가 항구로 사용됐다. 훗날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왜적을 막기 위해 해룡이 된 수중릉과 감은사가 있다. 또 경주권과 연결되는 태화강은 48.5㎞를 흐르다가 서생포 등의 포구들이 발달한 울산만으로 들어간다(윤명철 <해양역사상과 항구도시들>). 삼국사기에 따르면 4대 임금인 석탈해(昔脫解)는 왜국의 동북 1000여 리 떨어진 다파나국(多波那國)에서 출발한 상자() 속에 넣어져 울산 지역인 아진포(阿珍浦)에 들어왔다. 통일신라시대에 이슬람 상인으로 추정되는 처용과 연관된 개운포와 처용암도 울산만에 있다. 이처럼 경주는 육로 교통은 불편하지만 강을 이용한 내륙 수로교통과 연결된 동해 남부에 훌륭한 외항들을 갖고 있는 해항 도시였다. 이 때문에 신라는 초기부터 해외로 진출했고, 외지 사람이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동해를 건너간 초기 신라인들
박혁거세가 해양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확실치 않지만, 그 시대에 왜국에서 표주박을 차고 바다를 건너온 호공은 훗날 재상이 됐다. 또 4대왕 석탈해는 왜와 연관된 인물인데, 즉위 3년째에는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했다. 바다를 건너온 외부 세력이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신라와 우호적인 이 왜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선사시대부터 이 지역 주민들은 일본 열도의 혼슈 일대에 진출했다. 동해 중부에서 출항해 울릉도와 독도를 지형지물로 활용하면서 횡단하거나, 동해 남부에서 출항해 해류를 타고 바람을 이용하면 혼슈 남부 해안지방인 야마구치(山口)현, 시마네(島根)현, 돗토리(鳥取)현, 후쿠이(福井)현에 상륙할 수 있다. 특히 영일만 지역과 이즈모 지역은 동일하게 북위 35.5도 선상에 있으므로 교류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실제로 동해와 남해 근처 해역에서 표류병을 투하한 실험 결과를 보면 겨울에는 약 40%가 시마네현 해안에 도착했다.(일본전국연안해양지)
이 때문에 이런 지역에서는 우리, 특히 신라계와 연관된 유적과 유물, 이야기는 물론이고, ‘시라기(신라)’라는 지명도 많이 남아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실린 신라 왕자인 ‘아메노히보코(天日槍(천일창) 또는 天之日矛(천지일모))’가 8개(또는 7개)의 보물을 갖고 도착해 활동한 지역들이다. 일본 신화에서 가야계인 태양여신과 격돌을 벌인 해양과 폭풍의 신인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신라계다. 그는 패배한 뒤 근국(뿌리 나라)인 신라로 돌아갔다. 또 다른 기록에는 그가 신라국에서 흙배를 타고 이즈모에 내려왔다고 한다.
이즈모의 고진타니 유적에서는 358개의 청동칼이 나왔고, 청동창, 동탁(제사용 방울) 등의 금속제품들이 출토됐다. 신라에서 제철(製鐵) 집단이 진출했고, 이들이 철광산을 발견하면서 대량으로 무기와 농기구를 생산했으며, 거대한 고분군들이 증명하듯 소국들을 세웠다. 결국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시마네현 주민들은 신라인 피가 많이 섞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왜인의 침입은 상세하게(?) 기록한 반면 신라인의 진출은 기록을 안 해서 결과적으로 역사와 자존심을 왜곡시켰다. 다행스럽게도 <삼국유사>에는 157년에 근오기(영일만)에 거주하던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바위’를 타고 동해를 건너가 일본 땅에서 소국의 왕과 왕비가 됐다는 기록이 있다. 아름답고 신비한 사연이 담긴 이 신화는 중앙정부와 갈등을 일으킨 ‘해와 달’을 숭배하는 제사 집단이 혼슈 남부의 이즈모 지역으로 진출했으며, 계속 교류한 역사를 알려준다.
신라를 침공한 ‘규슈 倭’
해양 진출에 유리한 경주를 둘러싼 해양 환경은 양날의 비수처럼 때로는 왜의 침략을 야기했고, 신라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2대 남해왕 때 왜인들이 100여 척의 배로 영일만 지역을 침범했다. 233년에 신라는 해상에서 왜와 화공전까지 벌였고, 295년에는 백제와 공모해 왜국을 치려고 했으나 중지했다. 왜병은 실성왕 때인 405년에 경주의 명활성까지 공격했고, 다음해에는 해안을 공격했다. 그러자 실성왕은 408년에 대마도를 정벌하는 계획을 수립했는데 실천은 못했다. 왜는 444년에 수도인 금성을 10일 동안 포위했고, 459년 4월에는 100여 척으로 공격하고, 수도의 월성(月城)을 포위했다. 이어 낙동강 하류인 양산을 공격하고 사람들을 납치했다.
이런 자연환경과 현실 속에서 신라는 수군을 양성하고 활용해야만 했다. 석탈해의 수군들은 가야의 선단(船團)과 낙동강 하구에서 전투를 벌였다. 209년에는 남해안 일대의 8개 도시국가들(浦上八國)이 김해 지역을 공격하자 군사를 파병해 가야를 구원했다. 467년에는 전함을 수리했으며, ‘선부(船府)’라는 전문 관청을 설치했다. 이뿐만 아니라 수도권 요소요소에는 해양 방어체제를 구축해 463년에는 성 2개를 쌓았으며, 493년에는 군사기지인 임해진과 장령진을 설치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왕성이 경주처럼 해안과 쉽게 연결되면서도, 적당하게 먼 거리이고,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도시가 아니었다면, 신라는 거듭된 왜의 해양 공격에 존속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그런데 궁금증이 생긴다. 가야나 백제가 아니라 유독 신라 지역만을 공격한 이 왜병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고대에는 해양환경에 따라 정치 군사 외교 등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통계를 보면 왜병들은 주로 남풍이 부는 봄철에 침입했다. 남동풍이 불 때 규슈나 대마도에서 배를 띄우면 북동진하는 해류(쿠로시오해류)와 조류를 타고 울산, 포항 등 동해 남부에 도착할 수 있다. 따라서 신라를 수십여 차례 공격한 왜는 규슈 지역에 바탕을 둔 가야, 백제와 연관이 깊었으며, 혼슈의 친(親)신라계 왜와는 적대적인 세력이었다.
4세기 말부터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추진해 장수왕 때인 481년에는 안동, 청송, 울진, 영해 등을 영토로 삼았고, 포항시인 흥해까지 공격했다. 또 백제와 가야, 왜는 해양외교를 성사시키면서 신라를 압박하고 공격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신라는 해양 능력의 강화라는 시대의 필요성과 요구를 외면하지 않았고, 산골의 강인함과 농토의 순박함에 해양의 진취적이고 실용적인 행동을 조화시켰다. 그 결과 6세기에 들어서면서 해양 활동은 새롭게 발전했고, 이는 삼국 통일의 토대가 됐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