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별세…한국경제 압축성장 역사와 함께 사라진 대우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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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영 신화, 외환위기로 무너져…분식회계로 큰 피해 끼쳐
1967년 창사 후 한 때 재계 2위로 성장…대마불사 공식 깨져
한국경제 압축성장기 중심에 있던 대우그룹은 창립자인 고(故) 김우중 전 회장보다 먼저 역사 뒤로 사라졌다.
열평 남짓 사무실에서 출발한 대우그룹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김 전 회장의 철학처럼 빠르게 뻗어나갔으나 30여년 만에 불명예스럽게 해체되는 운명을 맞았다.
자산규모 2위 재벌그룹은 외환위기를 맞아 공중분해됐고 20년이 지난 지금은 '대우'라는 이름만 흔적처럼 남았을 뿐이다. 대우그룹은 1967년 3월 22일 대우실업이 문을 열며 시작됐다.
트리코트 원단 수출의 귀재라고 해서 `트리코트 김'이라 불리던 청년 김우중은 서울 충무로에 사무실을 빌려 셔츠 내의류 원단을 동남아시아에 내다 팔았다.
김 전 회장의 수완과 정부의 수출진흥정책을 양날개로 달고 대우실업은 급성장했다.
경제 고도성장기 '이카루스의 꿈'을 꾼 김 전 회장은 기업 인수·합병을 통해 '다계열, 다업종' 확장에 나섰다.
대우는 1973년 한 해에만 대우기계, 신성통상, 동양증권, 대우건설 등 10여개의 계열사를 인수했다.
1976년에는 한국기계를 흡수해 대우조선으로 개편한 옥포조선소과 묶어 대우중공업을 만들었다.
1978년엔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한자동차를 인수하고 1983년 대우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4년 세운 대우전자는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더해서 주력기업으로 키웠다.
대우그룹의 상징이던 서울역 대우센터 빌딩은 앞서 1977년 완공했다.
지상 23층 규모의 사옥은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종합상사'에 기반한 대우그룹의 문화와 대우센터는 드라마 '미생'에서 엿볼 수 있다.
창사 15년 만에 체급을 부쩍 키운 대우그룹은 1982년 대우실업을 ㈜대우로 바꾸고 그룹 회장제를 도입해 제대로 그룹의 모습을 갖췄다.
1990년대 들어서도 대우그룹은 성장 위주 전략을 유지했다.
1993년에 '세계경영 우리기술'을 슬로건으로 폴란드 자동차 공장을 인수하는 등 동구권 시장 개척에 공격적으로 나섰다.
1995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대북협력사업의 일환으로 첫 남북한 합작투자회사인 민족산업총회사를 북한 남포에 설립했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에 쌍용차도 인수했다.
1998년에는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리며 자산 기준으로 삼성과 LG를 제치고 재계 2위 대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국내 10만5천명, 해외사업장 21만9천명으로 임직원이 30만명이 넘었다.
거침없이 몸집을 불리던 대우그룹은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순식간에 허망한 결말을 맞았다.
무리하게 빚을 내 과잉투자를 하는 차입경영의 허점이 드러났다.
외형확대에 치중하느라 다른 그룹에 비해 구조조정이 늦었다. 국가신용등급 추락 여파로 해외 채권자들의 상환 압력이 거세지고 해외 자산가치가 추락하자 대우그룹은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1998년 12월 계열사를 10개로 감축하는 구조조정안이 발표되면서 대우그룹은 확연히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삼성차를 받고 대우전자를 주는 빅딜 계획이 실패하며 이듬해 8월엔 12개 주요 계열사 워크아웃이라는 극약 처방을 받았다.
큰 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 법칙이 이 때 깨졌다.
이어 2000년에 수십조원 규모 분식회계가 적발되며 대우그룹은 회생 불능 사태가 됐다.
대우그룹 분식회계는 1997년 19조여원, 1998년 21조여원 수준이다.
대우그룹은 한국 경제성장기에 주요한 역할을 했지만 분식회계와 부실경영으로 국가 전체를 휘청이게 하고 투자자들에게 큰 손실을 입히며 공과를 모두 남겼다.
/연합뉴스
1967년 창사 후 한 때 재계 2위로 성장…대마불사 공식 깨져
한국경제 압축성장기 중심에 있던 대우그룹은 창립자인 고(故) 김우중 전 회장보다 먼저 역사 뒤로 사라졌다.
열평 남짓 사무실에서 출발한 대우그룹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김 전 회장의 철학처럼 빠르게 뻗어나갔으나 30여년 만에 불명예스럽게 해체되는 운명을 맞았다.
자산규모 2위 재벌그룹은 외환위기를 맞아 공중분해됐고 20년이 지난 지금은 '대우'라는 이름만 흔적처럼 남았을 뿐이다. 대우그룹은 1967년 3월 22일 대우실업이 문을 열며 시작됐다.
트리코트 원단 수출의 귀재라고 해서 `트리코트 김'이라 불리던 청년 김우중은 서울 충무로에 사무실을 빌려 셔츠 내의류 원단을 동남아시아에 내다 팔았다.
김 전 회장의 수완과 정부의 수출진흥정책을 양날개로 달고 대우실업은 급성장했다.
경제 고도성장기 '이카루스의 꿈'을 꾼 김 전 회장은 기업 인수·합병을 통해 '다계열, 다업종' 확장에 나섰다.
대우는 1973년 한 해에만 대우기계, 신성통상, 동양증권, 대우건설 등 10여개의 계열사를 인수했다.
1976년에는 한국기계를 흡수해 대우조선으로 개편한 옥포조선소과 묶어 대우중공업을 만들었다.
1978년엔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한자동차를 인수하고 1983년 대우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4년 세운 대우전자는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더해서 주력기업으로 키웠다.
대우그룹의 상징이던 서울역 대우센터 빌딩은 앞서 1977년 완공했다.
지상 23층 규모의 사옥은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종합상사'에 기반한 대우그룹의 문화와 대우센터는 드라마 '미생'에서 엿볼 수 있다.
창사 15년 만에 체급을 부쩍 키운 대우그룹은 1982년 대우실업을 ㈜대우로 바꾸고 그룹 회장제를 도입해 제대로 그룹의 모습을 갖췄다.
1990년대 들어서도 대우그룹은 성장 위주 전략을 유지했다.
1993년에 '세계경영 우리기술'을 슬로건으로 폴란드 자동차 공장을 인수하는 등 동구권 시장 개척에 공격적으로 나섰다.
1995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대북협력사업의 일환으로 첫 남북한 합작투자회사인 민족산업총회사를 북한 남포에 설립했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에 쌍용차도 인수했다.
1998년에는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리며 자산 기준으로 삼성과 LG를 제치고 재계 2위 대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국내 10만5천명, 해외사업장 21만9천명으로 임직원이 30만명이 넘었다.
거침없이 몸집을 불리던 대우그룹은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순식간에 허망한 결말을 맞았다.
무리하게 빚을 내 과잉투자를 하는 차입경영의 허점이 드러났다.
외형확대에 치중하느라 다른 그룹에 비해 구조조정이 늦었다. 국가신용등급 추락 여파로 해외 채권자들의 상환 압력이 거세지고 해외 자산가치가 추락하자 대우그룹은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1998년 12월 계열사를 10개로 감축하는 구조조정안이 발표되면서 대우그룹은 확연히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삼성차를 받고 대우전자를 주는 빅딜 계획이 실패하며 이듬해 8월엔 12개 주요 계열사 워크아웃이라는 극약 처방을 받았다.
큰 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 법칙이 이 때 깨졌다.
이어 2000년에 수십조원 규모 분식회계가 적발되며 대우그룹은 회생 불능 사태가 됐다.
대우그룹 분식회계는 1997년 19조여원, 1998년 21조여원 수준이다.
대우그룹은 한국 경제성장기에 주요한 역할을 했지만 분식회계와 부실경영으로 국가 전체를 휘청이게 하고 투자자들에게 큰 손실을 입히며 공과를 모두 남겼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