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그곳] 인간과 괴물은 공존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익숙한 것 중 하나가 '선긋기'다.

유아기 '너'와 다른 '나'를 인지하면서 시작되는 선긋기는 우리-너희, 남자-여자, 국민-외국인 등으로 무한 증식한다.

주체의 확립에서 비롯되는 현상인 만큼 인간에게 숙명적일 수 있겠다.

사회가 복잡·다양해지면서 선긋기는 남용된다.

그곳에서 '차별'이 모습을 드러내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집단 내에서 다수와 소수 사이에, 강자와 약자 사이에 그어지는 선은 흔히 '낙인'과 '배제'가 되며, 그 어떤 선 안에도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주변인'으로 떠돌게 된다.

이 시대 우리는 무차별적 '선긋기'를 극복해야 할 행위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인간과 괴물 사이에 그어진 선은 절대 넘을 수 없는 선일까.

스웨덴 영화 '경계선'(알리 아바시 감독)은 우리에게 이 다소 황당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영화 속 그곳] 인간과 괴물은 공존할 수 있을까
◇ 티나와 보레
스웨덴 출입국 세관 직원인 티나는 남들과 다른 외모로 세상과 어울리지 못한다.

외롭기 때문에 자신을 경제적으로 이용하려는 남자와 사랑 없이 동거한다.

티나에겐 냄새로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는 남다른 능력이 있다.

세관을 통과하는 밀수자나 아동포르노 제작자 등 범죄자들을 그들이 가진 '수치심'으로 읽어내 검거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티나는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남자 보레와 마주치는데, 그로부터 자신이 인간과는 DNA가 다른 '트롤'(Troll)임을 알게 된다.

트롤은 남녀의 생식기가 뒤바뀌어 있고 벌레를 먹으며 살아간다.

티나는 보레와 이성적으로 가까워졌지만, 트롤 종족을 차별하는 인간에 대한 복수심으로 아기를 납치해 팔아넘기는 보레를 이해하지 못한다.

티나는 결국 보레와 만나기로 한 날 경찰을 부르고 이별을 택한다.

후일 티나에게는 자신과 비슷한 외모의 트롤 아기가 상자에 담겨 배달된다.

티나에게 아기는 어떤 존재일까.

아기를 어떻게 처리할까.

티나는 자신의 품에 안긴 아기에게 벌레를 먹인다.

[영화 속 그곳] 인간과 괴물은 공존할 수 있을까
◇ 괴물과의 화해
트롤은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괴물이다.

십자가와 번개, 교회의 종소리를 싫어한다.

등에는 커다란 혹이 있고 긴 코와 소꼬리 같은 꼬리를 가지고 있다.

때로 인간의 아이를 훔치고 대신에 자기가 아기로 변신해서 그 부모에게 양육을 받기도 한다.

트롤이 다가오면 가축은 겁을 먹는다.

암소의 젖은 잘 나오지 않고 암탉은 달걀을 낳지 않는다.

이 괴물은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에 나타나서 서투른 걸음으로 마을을 배회한다.

이 때문에, 트롤이란 말은 뚜렷한 목적 없이 여기저기 걸어 다니는 것, 나아가 같은 일을 반복하거나 돌림 노래를 부르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정해진 주제에서 벗어난 내용이나 다른 사람의 화를 부추기고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내용을 일부러 공격적으로 올려 판을 어지럽히는 사람을 트롤이라고 부른다.

좀 더 나중에는, 소리가 비슷한 저인망 어업(trawl)과 혼동되면
서 사람을 미끼로 낚거나 홀리는 것까지를 뜻하게 됐다.

[영화 속 그곳] 인간과 괴물은 공존할 수 있을까
트롤의 원래 모습은 이렇듯 온순하거나 친근한 긍정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괴물 트롤을 인간 세계에 끌어들이고 공존을 모색하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1930년대 핀란드 작가 토베 얀손이 귀엽고 포동포동한 이미지의 트롤을 형상화한 캐릭터 '무민'(Moomin)을 창조한 것도 트롤과 가까워지려는 시도였다.

무민은 뒤늦게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에 앞서 1909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탄 스웨덴 작가 셀마 라게를뢰프는 단편 동화 '트롤의 아이'에서 인간과 트롤의 화해를 그렸다.

'트롤의 아이'는 영화에도 나오는 '아이 바꿔치기'가 모티브다.

트롤에게 아이를 뺏기고 대신 트롤의 아이를 맡게 된 어느 농부는 화가 나서 트롤을 계속 위험에 빠뜨리지만, 그럴 때마다 그의 아내는 트롤을 지켜내고 자신의 아이처럼 돌본다.

농부는 그런 아내의 행동에 화를 내고 결국 집을 나가는데 숲속에서 뜻밖에 잃어버린 자신의 아이를 만난다.

그는 그동안 트롤의 아이를 불구덩이에 던져 넣었을 때 트롤도 아이를 불구덩이에 던졌고, 아내가 트롤의 아이를 구했을 때 트롤도 아이를 구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타인과의 공존의 조건은 동등함을 바탕으로 한 존중이며, 공존을 거부했을 때 그 위해는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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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티나가 보레를 만나 악마처럼 살 수 없다고 하자 보레는 "인간이 되려고요?"라고 묻는다.

티나는 "누구도 해치기 싫어요.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인가요?"라고 반문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동화가 110년 만에 영화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 스웨덴의 항구 카펠스카
티나가 트롤 아기에게 벌레를 먹이는 마지막 장면은 인간 세상에서 공존하며 살아가더라도 트롤로서의 정체성은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정체성을 지키는 소수의 타자에게 우리는 공간을 내어줄 수 있을까.

영화 '경계선'은 인류가 탄생과 더불어 지속해온 차별과 배제로서의 '선긋기'에 대한 우화지만, 동시에 가장 가깝게, 또 가장 정확하게는, 유럽의 이주자와 난민 문제를 겨냥하고 있다.

난민들이 합법적인 입국을 꿈꾸는 그곳, 영화 속 항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북쪽으로 90㎞ 떨어진 카펠스카(Kapellskar)다.

발트해에 접해 있고 핀란드, 에스토니아 등으로의 배편이 분주히 오가는 해상교통의 요지다.

소수자의 뒤섞임을 제어하는 선긋기의 상징적 장소로서의 항구 출입국 세관원이 이방인 트롤이라는 영화적 설정은 절묘하다.

[영화 속 그곳] 인간과 괴물은 공존할 수 있을까
'경계선'의 감독 알리 아바시는 이란에서 태어나 20세에 덴마크로 유학한 뒤 지금은 스웨덴에서 영화를 만든다.

경계선을 넘어 다니며 늘 소수의 이방인이었던 감독의 정체성이 영화에 그대로 묻어 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