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前회장이 남긴 말
"기업인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에선 경제에 희망 없어"
김 전 회장은 1999년 10월 세상을 피해 출국한 지 5년8개월 만인 2005년 6월 14일 귀국했다. 이후 베트남과 한국을 오가며 떠돌듯 지냈다. 기자가 그를 직접 본 건 그 무렵부터다. 매년 3월 대우그룹 창립기념 행사(3월 22일)에 나와 ‘옛 대우맨’들과 서로 안부를 묻곤 했다. 2017년 3월 19일엔 대우 창립 50주년을 맞아 본지와 인터뷰를 했다. 그가 언론에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이다. 눈물 많은 기업인
2012년 3월 22일 서울 부암동 AW컨벤션센터. 대우 창립 45주년 행사 도중 ‘마이웨이(My Way)’ 노래가 흘러나왔다. 양쪽 귀에 단 보청기를 매만지던 김 전 회장은 감정이 북받친 듯 한동안 눈을 지그시 감았다. 노래가 끝날 무렵엔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기자가 큰 소리로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그는 “괜찮다. 잘 지낸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2017년 3월 22일 서울 남대문로 밀레니엄힐튼호텔. 대우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 나온 김 전 회장은 백발이었지만 비교적 건강해 보였다. 500여 명의 옛 대우 임직원과 일일이 악수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외환위기로 세계경영의 과업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며 “우리가 품었던 꿈과 열정, 이룩한 성과는 반드시 평가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이어 “한결같은 마음으로 우리는 가장 먼저 세계로 나갔고, 해외 시장 개척과 관련한 대부분의 기록을 만들어냈다”고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옛 대우맨’들에게 미안함을 전할 땐 눈물을 보였다. 그는 “대우를 떠나면서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헤어진 게 아직도 가슴에 사무친다”며 “나를 믿고 뜻을 모아 세계를 무대로 함께 뛰어준 대우가족 노고에 보답하지 못해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미완으로 끝난 세계경영 회한
‘창조, 도전, 희생.’ 김 전 회장이 가끔 들렀던 서울역 부근 대우재단빌딩 18층 사무실에 걸려 있는 글귀다. 1999년 해체된 대우그룹의 사훈이었다. 대우 창립 50주년 인터뷰를 위해 사무실에 갔을 때(2017년 3월 19일)도 글귀는 여전히 선명했다. 대우는 지금 없지만, 대우 정신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인터뷰 당시 그는 보청기를 끼고도 잘 듣지 못했다. 배석한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전 (주)대우 사장)이 종종 답변을 거들어줬다. 김 전 회장은 1992년 북한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난 일과 우즈베키스탄에서 국민차 사업에 힘겹게 뛰어든 일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김 전 회장은 1967년 대우실업을 창업한 뒤 세계경영을 앞세워 대우그룹을 재계 2위로 키웠다. 외환위기 때 경영난을 겪으면서 1999년 그룹이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다. 미완으로 끝난 세계경영에 대한 회한도 그만큼 깊었다. 그래도 시곗바늘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다시 기업가의 길을 가겠다고 했다.
“대우가 수출과 해외 현지 사업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보여줬어요. 중동과 아프리카, 심지어 쿠바 등 사회주의 국가까지 들어가 사업했습니다. 그게 대우 정신이었습니다.”
세계경영과 자신에 대한 재평가도 간절히 원했다. 그는 “비록 대우는 실패했지만 남이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찾아다닌 대우의 세계경영정신을 되새겨보면 요즘 같은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며 “대우가 겪은 경험이 국가 자산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원한 청년 김우중
김 전 회장은 한국 기업인들이 맞닥뜨린 현실을 걱정했다. 그는 “기업인이 존경은커녕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에선 경제에 희망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자기 자식이 삼성전자에 취직하길 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구속해야 속 시원하다고 여기는 이율배반적 시각부터 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후배 기업인에게 하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는 “지갑 속 돈을 세는 것보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성취감에 몰두해야 한다”며 “그래야 기업도, 국가도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는 다시 ‘흔적’ 얘기를 꺼냈다. “대우의 성공과 실패는 역사 속에 남겠지요. 이제 저는 청년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려고 애썼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가 타계 직전까지 베트남에서 ‘청년 김우중’을 키워내기 위해 ‘글로벌 청년 사업가 육성’ 사업을 해온 이유다.
장창민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