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안 먼저 상정·표결' 文의장 의사진행에 속수무책 당해
'10일 예산안 처리' 합의 두고 내부비판…沈·金 책임론도 제기
협상도, 수정안도 모두 무위로…수적 열세에 무릎꿇은 한국당
자유한국당이 10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의 예산안 힘겨루기 끝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512조원 규모의 내년도 '슈퍼 예산안'이 민주당의 주도 하에 강행 처리된 것이다.

한국당은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이날 예산안에 대한 여야 3당의 합의 처리를 주장하면서 민주당·바른미래당 등 3당 교섭단체와 협상을 벌였다.

민주당이 한국당을 제외한 다른 야당들과 꾸린 '4+1 협의체'를 두고 "불법단체"로 규정한 한국당은 이 협의체에서 마련된 수정안 역시 조금도 인정할 수 없다는 강경 기류였다.

그러면서 '4+1 수정안'에서 독자적으로 진행해 온 감액사업과 증액사업 내역을 공개해야 구체적인 예산안 규모를 확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같은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재철 원내대표는 입장문에서 "무엇을 증액했는지, 무엇을 감액했는지, 누구 호주머니로 들어가는지 아무도 모른다"며 "제1야당에게 그 항목을 한번도 공개하지 않는 전대미문의 깜깜이 예산"이라고 비난했다.

더는 여야 합의를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민주당은 '4+1 수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문희상 국회의장은 이를 즉각 상정했다.

한국당도 즉각 자체적으로 마련한 수정안을 제출했고, 이 역시 상정됐다.

한국당은 예산안과 함께 처리토록 묶여 본회의에 상정된 예산안 부수법안들에 대해서도 무더기로 수정안을 냈다.

수정안에 대한 찬반 토론으로 시간을 끌며 '4+1 수정안'의 정기국회 처리를 무산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당의 의도는 빗나가고 말았다.

예산안에 앞서 부수법안을 먼저 표결하던 관행을 노린 것인데, 문 의장이 예산안을 먼저 상정한 것이다.

이후 표결까지는 일사천리였다.

과반을 차지한 민주당의 '4+1 동맹'은 자체 예산안을 가결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당은 거세게 항의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김재원 정책위의장은 예산안 처리 직후 기자들과 만나 "(예산안이) 세금 도둑들에 의해 날치기 처리됐다"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불법의 총동원"이라고 했다.

협상도, 수정안도 모두 무위로…수적 열세에 무릎꿇은 한국당
당내 일각에선 심재철·김재원 원내지도부가 예산안 협상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부수법안 수정안 대응도 상대에게 수를 읽힌 탓에 무위로 돌아갔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예산안이 통과되고 문 의장이 정회를 선포하자 한국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에서 심 원내대표를 에워싼 채 경위를 따져 묻는 장면도 목격됐다.

한 한국당 의원은 "어제 심 원내대표가 선출 직후 문 의장, 민주당·바른미래당 원내대표와 만나 '10일 예산안 처리'라고 날짜를 못 박은 것부터 패착이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회동에선 예산안 합의 처리를 조건으로 한국당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철회하고, 민주당 역시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들의 정기국회 상정을 보류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필리버스터 카드는 꺼내지도 못했다.

패스트트랙은 약속대로 정기국회에서 상정되지 않았지만, 11일 곧바로 임시국회가 소집된다.

물론 예산안 처리를 한국당의 '완패'로 보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4+1 수정안'을 재협의하는 과정에서 한국당의 입장도 일부 반영됐다는 것이다.

원내에서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여당에 일방적으로 당한 모습은 총선에서 지지층에 호소할 여지도 있다.

김 정책위의장은 "저희는 소수당이라 기껏 하는 게 소리 지르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사실 '본게임'은 처리 자체를 막을 수 없는 예산안이 아니라 일단 상정이 보류된 패스트트랙 법안, 즉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법과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으로 꼽힌다.

한국당 원내지도부로선 임시국회 소집으로 재개될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이들 법안을 어떤 전략으로 저지할지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협상도, 수정안도 모두 무위로…수적 열세에 무릎꿇은 한국당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