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구자경 LG 명예회장 "절대로 1등 하지 말라" (2003년 한경 인터뷰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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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과거'에서 '미래'를 보는 경영자였다. 1995년 그룹 경영권을 장남인 고(故) 구본무 회장에게 물려준 뒤 충남 천안시 성환읍에 있는 연암대학교에서 농업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썼다. 한국의 미래는 결국 '농·축산업'에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1974년 연암대학교(당시 연암축산고등기술학교)를 설립했다. 농촌으로 돌아가 농·축산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학생들을 육성하기 위한 학교다. 설립 당시 입학금은 물론 숙식과 그 밖의 모든 비용을 학교에서 제공해 화제가 됐다. 농·축산업에서 미래를 발굴하려는 노력은 각 사업 영역에서도 이어졌다. 2016년 LG화학이 동부팜한농을 5000억원에 인수하고, LG화학은 그린 바이오를 핵심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2003년 정구학 한국경제신문 기자가 연암대학교(당시 연암축산원예대학)에서 구 명예회장을 만났다. 은퇴 후 명예회장의 일상을 살펴보고 그의 인생 철학 등을 들어보기 위해서다. 당시 인터뷰 기사를 두 차례에 나눠 소개한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옮겨 커피를 마시며 인터뷰를 계속했다. 가족얘기부터 LG의 지분구조 정리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를 물어보았다.
-가족들은 자주 들르나요.
"안 사람은 이곳에 잘 안와. 별 수 없이 일요일 오후에 내가 올라가지. 가족끼리는 한달에 한번 호텔이나 음식점에서 모여 식사하는데 6월에는 제사다 약혼, 결혼이다 해서 일주일에 두번씩은 모인 것 같아."
-손주들도 자주 만나십니까.
"저희들이 오기도 하고, 내가 부르기도 하고 그래. 다들 잘하는 편이야. 일요일 같은 때 만나서 내가 젊었을 때 기업을 일구던 이야기도 해주고 그러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항상 조상들의 제사를 잘 모시고 어른들을 잘 공경하는 거야."
그는 증조부 만회공(晩悔公)이 조선말기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던 집안의 유교가풍 때문인지 집안 얘기를 할 때는 유난히 효(孝)를 강조했다. 아들과 며느리, 손주들의 촌수와 이름 등을 들어가며 집안 일에 대해서도 간략히 이야기해 주었다.
-LG의 지분정리는 어떻게 되나요.
"LG가 지주회사로 전환했는데 복잡한 지분구조를 정리하려면 앞으로 2,3년 더 걸릴거야.
전자, 화학, 금융은 구씨쪽이고 정유, 건설은 허씨쪽이지." -경제가 어려워 난리인데 기업 경쟁력을 높이려면 어떤 분야에 주력해야 한다고 보세요.
"기술이 하도 빠르게 발전하니까 솔직히 나도 어느 쪽으로 가는게 좋은지 잘 모르겠어.
지금은 LG의 가전제품이 일본산보다 우위에 있는 제품이 있는데…. PDP(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 모듈은 우리가 일본의 히타치나 도시바 등에 수출을 많이 해. 아무래도 기술 경쟁력은 연구개발(R&D)에서 나온다고 봐야지."
-구본무 회장이 '일등 LG'를 밀어붙이면서 그룹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회장이 나름대로 잘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보기에 구조조정본부장(강유식 LG 부회장을 말함)과도 호흡이 잘 맞는 것 같고. 사실은 회장한테 절대로 1등하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얘기입니까. 1위를 하지 말라면 2등만 하라는 얘긴가요.
"(파안대소하며) 절대 1등을 하지 말라고 했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잖아. 예전에는 정말 그랬어. 정치적으로 얻어맞기도 하고 반대세력이라든지 노조로부터 얻어맞을 수 있었어."
-명예회장님이 이끌던 15년전에도 LG의 골드스타가 가전에서 부동의 1위를 하지 않았나요.
"맞아, 그렇지만 그거야 저희끼리(계열사끼리) 싸워서 그렇게 된거지 뭐. 가령 엘리베이터는 같은 계열사인 미쓰비시합작사(나중에 LG가 지분 완전인수)와 LG전자, 두 회사가 죽자살자 싸우더라구. 속내용을 잘 아니까 더 치열하게 싸우는거야. 그래서 최고 품질의 엘리베이터 제품이 나와 기분이 좋았지만 ."
-전경련 회장 시절은 어땠나요.
"지난 87년부터 2년간 했었는데 노조 파업이 가장 심했던 시절이라 여러가지로 힘들었어. 정치적 상황도 지금보다 나빴던 것 같구." (구 명예회장은 이 시절에 설화로 몇차례 시달렸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대선에도 나갔었는데 혹시 정치를 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요.
"정치요, 난 욕심이 없어서 그런 생각은 안듭디다." 취재를 마친 기자에게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버섯사업에 4,5년간 돈을 쏟아붓다가 요즘은 이익을 내. 우리나라에서 대형 기업화로 돈을 벌 수 있는 농업은 버섯과 양돈 뿐일게야."
바로 그때 그의 셔츠 앞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역시 LG가 만든 휴대폰이었다.
"그래, 별 일 없다니까… "
손님이 있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는 그에게서 오늘의 한국 경제를 일궈낸 기업영웅과 우리 이웃의 편안한 시골노인 모습을 함께 엿볼 수 있었다.
정리=고재연 기자/인터뷰 원문=정구학 기자 yeon@hankyung.com
1974년 연암대학교(당시 연암축산고등기술학교)를 설립했다. 농촌으로 돌아가 농·축산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학생들을 육성하기 위한 학교다. 설립 당시 입학금은 물론 숙식과 그 밖의 모든 비용을 학교에서 제공해 화제가 됐다. 농·축산업에서 미래를 발굴하려는 노력은 각 사업 영역에서도 이어졌다. 2016년 LG화학이 동부팜한농을 5000억원에 인수하고, LG화학은 그린 바이오를 핵심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2003년 정구학 한국경제신문 기자가 연암대학교(당시 연암축산원예대학)에서 구 명예회장을 만났다. 은퇴 후 명예회장의 일상을 살펴보고 그의 인생 철학 등을 들어보기 위해서다. 당시 인터뷰 기사를 두 차례에 나눠 소개한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옮겨 커피를 마시며 인터뷰를 계속했다. 가족얘기부터 LG의 지분구조 정리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를 물어보았다.
-가족들은 자주 들르나요.
"안 사람은 이곳에 잘 안와. 별 수 없이 일요일 오후에 내가 올라가지. 가족끼리는 한달에 한번 호텔이나 음식점에서 모여 식사하는데 6월에는 제사다 약혼, 결혼이다 해서 일주일에 두번씩은 모인 것 같아."
-손주들도 자주 만나십니까.
"저희들이 오기도 하고, 내가 부르기도 하고 그래. 다들 잘하는 편이야. 일요일 같은 때 만나서 내가 젊었을 때 기업을 일구던 이야기도 해주고 그러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항상 조상들의 제사를 잘 모시고 어른들을 잘 공경하는 거야."
그는 증조부 만회공(晩悔公)이 조선말기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던 집안의 유교가풍 때문인지 집안 얘기를 할 때는 유난히 효(孝)를 강조했다. 아들과 며느리, 손주들의 촌수와 이름 등을 들어가며 집안 일에 대해서도 간략히 이야기해 주었다.
-LG의 지분정리는 어떻게 되나요.
"LG가 지주회사로 전환했는데 복잡한 지분구조를 정리하려면 앞으로 2,3년 더 걸릴거야.
전자, 화학, 금융은 구씨쪽이고 정유, 건설은 허씨쪽이지." -경제가 어려워 난리인데 기업 경쟁력을 높이려면 어떤 분야에 주력해야 한다고 보세요.
"기술이 하도 빠르게 발전하니까 솔직히 나도 어느 쪽으로 가는게 좋은지 잘 모르겠어.
지금은 LG의 가전제품이 일본산보다 우위에 있는 제품이 있는데…. PDP(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 모듈은 우리가 일본의 히타치나 도시바 등에 수출을 많이 해. 아무래도 기술 경쟁력은 연구개발(R&D)에서 나온다고 봐야지."
-구본무 회장이 '일등 LG'를 밀어붙이면서 그룹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회장이 나름대로 잘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보기에 구조조정본부장(강유식 LG 부회장을 말함)과도 호흡이 잘 맞는 것 같고. 사실은 회장한테 절대로 1등하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얘기입니까. 1위를 하지 말라면 2등만 하라는 얘긴가요.
"(파안대소하며) 절대 1등을 하지 말라고 했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잖아. 예전에는 정말 그랬어. 정치적으로 얻어맞기도 하고 반대세력이라든지 노조로부터 얻어맞을 수 있었어."
-명예회장님이 이끌던 15년전에도 LG의 골드스타가 가전에서 부동의 1위를 하지 않았나요.
"맞아, 그렇지만 그거야 저희끼리(계열사끼리) 싸워서 그렇게 된거지 뭐. 가령 엘리베이터는 같은 계열사인 미쓰비시합작사(나중에 LG가 지분 완전인수)와 LG전자, 두 회사가 죽자살자 싸우더라구. 속내용을 잘 아니까 더 치열하게 싸우는거야. 그래서 최고 품질의 엘리베이터 제품이 나와 기분이 좋았지만 ."
-전경련 회장 시절은 어땠나요.
"지난 87년부터 2년간 했었는데 노조 파업이 가장 심했던 시절이라 여러가지로 힘들었어. 정치적 상황도 지금보다 나빴던 것 같구." (구 명예회장은 이 시절에 설화로 몇차례 시달렸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대선에도 나갔었는데 혹시 정치를 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요.
"정치요, 난 욕심이 없어서 그런 생각은 안듭디다." 취재를 마친 기자에게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버섯사업에 4,5년간 돈을 쏟아붓다가 요즘은 이익을 내. 우리나라에서 대형 기업화로 돈을 벌 수 있는 농업은 버섯과 양돈 뿐일게야."
바로 그때 그의 셔츠 앞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역시 LG가 만든 휴대폰이었다.
"그래, 별 일 없다니까… "
손님이 있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는 그에게서 오늘의 한국 경제를 일궈낸 기업영웅과 우리 이웃의 편안한 시골노인 모습을 함께 엿볼 수 있었다.
정리=고재연 기자/인터뷰 원문=정구학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