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논단] 유로존, 재정 확대정책 논의해야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개국)은 곤경에 처해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의 연이은 통화 부양책에도 불구하고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목표치보다 낮다. 금리가 제로(0)에 가깝다보니 전통적인 통화정책에 양적완화 조치까지 내놔도 별다른 효과를 못 내고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정정책 의존도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투자자들은 국채를 마이너스 금리로 매입하고 있다. 유럽 정부들에 돈을 빌려주겠다고 간청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환경에서도 개인 소비가 늘지 않아 성장률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공공 지출을 늘리는 게 알맞은 처방일 것이다.

문제는 독일을 필두로 여러 유로존 국가의 정책 입안자들이 재정 확대를 단호히 반대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탈리아 등 다른 나라를 돕기 위해 자국민이 빚을 지도록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유로존 여러 국가가 적자 예산을 집행하지 않는 이유다.

유로존 재정 확대를 놓고 교착상태가 계속되면서 일각에선 ECB가 우회적 재정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ECB가 이중금리 정책을 펼치는 게 그런 예다. ECB가 시중은행으로부터 플러스 금리로 예금을 받고, 시중은행에 돈을 빌려줄 땐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는 식이다. 이 경우 시중은행은 수익성이 보장되므로 민간에 대출을 적극 내주려 할 것이다. ECB는 장기대출프로그램인 ‘TLTRO-II’를 통해 이 같은 정책을 소규모로 실험해본 적이 있다.

이 같은 방법에 대한 반론도 있다. ECB가 자산보다 부채에 이자를 더 쳐주는 정책을 확대할 경우 재정에 손실을 입고 자본이 잠식당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물론 중앙은행은 이런 상태에서도 작동할 수 있다. 직접 돈을 찍어내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이 빚 감당을 하자고 계속 화폐를 발행하면 통화정책의 신뢰성이 확 떨어진다. 이 경우 ECB의 주주 격인 유럽 각국 정부는 ECB 자본 구성을 재편하자고 요구할 것이다. 유로존과 각국에 상당한 부담이다.

독일 등이 ECB의 이중금리 정책 도입을 놓고 규정 위반 가능성이 있다며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사실은 이 같은 위험을 걱정해서다. 이들은 유럽연합(EU) 조약이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엄격히 분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그리 높지 않다. EU 조약과 조항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충분히 재해석될 수 있다. 유로존 20년 역사에서 조항을 재해석한 전례도 여러 번 있다.

ECB가 유럽투자은행(EIB)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한 방안이다. EIB는 납입자본과 적립금을 총 700억유로가량 보유하고 있다. 필요 시 납입을 요청할 수 있는 요구불자본금 규모는 2200억유로 수준이다. EIB는 지속 가능한 투자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는 게 일이다. 유로존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 지출을 늘리는 데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다만 EIB 대출 규모는 주주들이 청약한 자본의 250% 수준으로 제한이 걸려 있는 게 문제다. 현 경제 상황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주려면 이 기준을 대폭 완화해야 한다.

물론 이 같은 조치는 상당한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ECB가 준(準)재정 조치를 내놓으면 독일 등에선 매우 부정적인 반응이 나올 것이다. 독일 정부는 자국 여론을 반영해 유로존에서 각종 방법으로 불만을 표시할 수 있다. 이는 유로존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유럽은 이런 논쟁에 돌입해야 할 때다. 유로존 경제가 본격 침체하기 시작하면 ECB는 지금보다도 손이 묶일 것이다. 금리는 이미 낮은 상태라 ECB가 기존 방식대로 경기 침체 상쇄 조치를 할 여력이 별로 없다. 앞으로 큰 손실을 막기 위해서라도 불편한 논쟁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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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