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삼성에버랜드와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사건 재판에서 전현직 임직원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에 대해 18일 공식 사과했다. 국민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점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경제계에서는 삼성이 1938년 창립 이후 80년 넘게 유지해온 ‘무(無)노조 원칙’을 폐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노조와해' 사과한 삼성…80여년 만에 무노조 원칙 사실상 폐기
“건강한 노사문화 정립”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노사 문제로 많은 분께 걱정과 실망을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하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8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농단 관련 대법원 선고 직후 사과한 지 4개월 만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두 회사는 “과거 회사 내에서 노조를 바라보는 시각과 인식이 국민의 눈높이와 사회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음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인정했다. 이어 “앞으로는 임직원 존중의 정신을 바탕으로 미래 지향적이고 건강한 노사문화를 정립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전날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과 강경훈 삼성전자 인사팀 부사장이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의혹 1심 재판에서 각각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목장균 삼성전자 전무(징역 1년)와 최평석 삼성전자서비스 전무(1년2개월)도 구속을 피하지 못했다.

함께 기소된 원기찬 삼성카드 사장과 정금용 삼성물산 리조트부문 대표(부사장), 박용기 삼성전자 부사장 등 전현직 삼성전자 인사팀장은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았다. 지난 13일 삼성에버랜드 노조와해 의혹 사건까지 합하면 전현직 삼성 임직원 29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사실상 비노조 방침 폐기

삼성이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 구속으로 인한 경영 공백을 수습하기보다 먼저 사과부터 한 것은 이례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지 않은 데다 일부 임직원이 무죄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잘못을 인정한 것은 법리적 차원을 떠나 변화하는 사회적 가치를 따르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는 평가다.

삼성의 노조관이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임직원의 권익과 복리를 선제적이고 적극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무노조 방침을 유지해왔으며 직원들도 받아들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2015년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서 ‘노조를 조직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무노조 원칙’ 표현을 ‘근로자 대표를 경영 파트너로 인식한다’는 내용으로 바꿨다. 그럼에도 노동계 등은 “삼성이 여전히 무노조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고 비판 강도를 높였다.

이번 사과문 발표를 계기로 기존 삼성 노사문화가 바뀔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는 “삼성이 법원 판결을 존중하고 노조탄압 논란이 재연되지 않도록 약속함으로써 노사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준법경영 체제 확립에 주력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에 이어 다른 삼성 계열사로도 ‘무노조 폐기’ 방침은 확산될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삼성 계열사 내 노조 설립이 잇따를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현재 10여 개의 삼성 계열사에 노조가 설립돼 있다. 3개의 소규모 노조가 있던 삼성전자엔 지난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산하 노조(제4노조)가 설립됐다. 지난해엔 삼성화재에 한국노총 산하 노조가 생겼다. 삼성생명과 삼성증권, 삼성전자서비스, 삼성SDI, 삼성엔지니어링 등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산하 노조가 있다. 삼성물산에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산하 노조가 모두 활동 중이다.

삼성이 무노조 원칙을 포기한 뒤 준법경영 시스템 확립에 주력할 것으로 경제계에서는 전망했다. 이 부회장의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을 맡은 재판부가 삼성에 준법감시 제도 마련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담당 재판부는 이 부회장에게 미국 연방양형기준 제8장을 언급하면서 실효적 준법감시 체제를 확립할 것을 주문했다. 1991년 시행된 미국 연방양형기준 8장에 따르면 기업 범죄 재판에서 준법감시제도 도입 여부가 양형 고려 요소로 작용한다. 경제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이사회 의장이 구속된 초유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이사회를 정비하고 준법경영을 강화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내놓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