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 수당보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게 더 소중하다.” “일률적인 근무시간 제한은 또 하나의 규제다.” 주 52시간 근로제를 놓고 두 직장인이 대통령 앞에서 찬반토론을 벌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엊그제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에서 가진 ‘국민과의 점심’에서다. 자신을 ‘워킹맘’이라고 밝힌 여성 직장인은 “맞벌이하는 남편이 야근하면 오로지 내가 독박육아를 해야 한다”며 찬성론을 펼쳤다. 중소기업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남성 참석자는 “연구개발을 하는 사람들은 집중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초과근무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외 수당을 주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대적 격차를 해소하는 방안도 될 수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두 사람의 얘기에 직접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배석한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줄어든 근무시간에 맞춰 납품 기한을 늦출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는 구상을 밝혔다. 일률적인 주 52시간제의 골격을 바꾸지는 않을 것임을 재확인한 것이다.

이 소식은 ‘선택의 자유’라는 화두(話頭)를 새삼 떠올리게 했다. 모든 직장인의 근무시간을 일률적으로 주 52시간 이내로 제한할 게 아니라 당사자들의 선택에 맡기면 될 텐데, 그게 왜 안 된다는 것인가. 지난해 대기업부터 적용되기 시작한 주 52시간제를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감이 몰리거나 중요한 연구개발 작업에 매달려야 하는 사업장에까지 획일적으로 ‘주 52시간’이 적용되면서 심각한 업무 차질이 빚어지게 됐다는 하소연이 이어지고 있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수당이 줄어들게 된 직장인 사이에서도 “돈을 더 벌고 싶은데 추가 근무를 왜 정부가 막느냐”는 반발이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장시간 노동’의 불명예를 떼어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일률적인 방식을 통해서라도 근무시간을 제한하는 게 불가피하다는 게 정부 논리다. 명분 자체는 흠잡기가 쉽지 않다. 직장인들이 ‘삶의 질’을 높여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제도 취지도 마찬가지다. 근무시간 제한만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최저임금 대폭 인상과 비정규직 해소 등의 정책도 그렇다. 명분과 취지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다.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명분·취지가 좋으니까 군말 없이 따르라는 건 ‘정의(正義)의 독점행위’이고 독선일 뿐이다.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문재인 정부가 밀어붙인 강제적인 근무시간 제한과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 급속하고 무리한 방법을 동원한 비정규직 해소가 드러내고 있는 부작용은 ‘획일’과 ‘졸속’의 해악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정부가 장담한 성과를 내기는커녕 기업 활력 저하와 정규 일자리의 급격한 감소가 ‘뉴노멀’로 자리 잡았다는 자조까지 나오는 지경이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을 풀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경제활동 참가자들에게 제대로 된 ‘선택권’을 주는 게 좋은 해법이 될 수 있다. 제도의 취지가 좋다고 해서 획일적인 방식의 이행을 강제할 게 아니라 다양한 선택 대안을 제공해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게 훨씬 효과적임은 숱한 사례를 통해 이미 입증됐다.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저서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를 통해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정부에 규제개혁 근거를 제시했고, 미국 사회가 누린 경제 호황의 밑바탕을 제공했다.

무엇보다도 ‘선택권’은 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이다. 각 개인이 무엇을 할지 선택할 자유와 권리가 얼마나 보장돼 있느냐는 그 나라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인지를 설명해주는 척도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은 심각하다. 고등학생들에게 차별화된 교육을 제공하는 자사고와 특목고를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진지한 논의 없이 문 닫게 하고, 돈을 더 내고라도 쾌적한 교통 서비스를 받겠다는 소비자들을 무시한 채 ‘택시업계 생존을 위해’ 신종 교통수단을 막아버리는 나라를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주 52시간 근무 규제는 말할 것도 없다. 시민적 기본권인 ‘선택할 자유’가 이렇게 틀어 막히고 있는데도 이 문제를 제대로 짚어내는 정치 세력이 없다는 건 더 암담하다.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