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한강 위를 달리는 지하철/사진=게티이미지뱅크
늦은 오후 한강 위를 달리는 지하철/사진=게티이미지뱅크
여느 날처럼 퇴근 후 지하철에 지친 몸을 맡긴 하루였습니다. 평상시처럼 이어폰을 양 귀에 꽂고 스마트폰을 꺼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지하철을 탄 거의 모든 시민들이 핸드폰과 눈을 맞추고 이어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앉을 자리도 없이 사람이 가득 차 북적이는데도 차 안에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핸드폰과의 대화에 모두가 푹 빠져있는 사이 "오늘 하루도 많이 피곤하셨죠?"라는 지하철 방송 안내 멘트가 들려왔습니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습니다. 통상 안내 방송은 "이번에 내리실 역은…"이니깐요.
사람들로 북적이는 서울 지하철/사진=최혁 한경닷컴 기자
사람들로 북적이는 서울 지하철/사진=최혁 한경닷컴 기자
귀를 막고 있던 이어폰을 뺐습니다. 이어 따뜻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지하철에 "내일은 분명히 잘 해결될 것입니다. 오늘 이만큼 한 것도 충분히 잘하셨으니까요. 근심과 걱정 툭툭 던져버리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멘트가 울려 퍼졌습니다.

안내 방송 도중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이어폰으로 귀를 막던 시민들이 방송 멘트 중 하나둘씩 이어폰을 뺐습니다. 뜻하지 못한 장소에서 훈훈한 얘기가 들려오자 시민들의 얼굴에서 따뜻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같은 열차를 탄 대학생 이민준(24)씨는 "오늘 새벽부터 일어나서 학교 시험에 알바까지 하느라 힘들었는데 힘이 납니다"고 전했습니다.
김봉철 기관사/사진=배성수 기자
김봉철 기관사/사진=배성수 기자
지하철 '행복' 안내 방송을 하는 주인공을 만났습니다. 김봉철(50) 기관사는 서울지하철 8호선의 안전을 책임집니다. 서울교통공사 공채 1기로 1995년에 입사한 김 기관사는 25년째 현장에 몸담은 베테랑입니다.

감성방송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물었습니다. 김 기관사는 "8호선 이전 7호선에서 20년 동안 근무했습니다"며 "지하철 노선에는 한강을 건너가는 대교 등 풍경이 좋은 곳이 많습니다. 이런 곳을 지날 때 사람들에게 재충전 즉 리프레쉬(refresh)를 해주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습니다"고 답했습니다.

이어 "25년간 현장에 있으면서 저녁에 지친 삶에 힘들어하시는 시민분들을 많이 봤습니다"며 "'출근, 퇴근하실 때 무슨 얘기를 해주면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다가 감성방송을 시작해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고 전했습니다.

김 기관사는 수첩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좋은 멘트가 생각나면 바로 수첩에다 적어 그날 시민들에게 행복 방송을 전해줍니다. 그의 수첩에는 다양한 '감성' 멘트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수첩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에 맞는 멘트들이 담겨 있습니다. 명절이나 수능 등 행사 역시 마찬가집니다.

실제로 '행복' 안내 방송이 진행될 때면 많은 시민들이 실시간으로 호평을 전합니다. 서울교통공사 홈페이지에 승객 김모씨는 "합정~당산 구간에서 승무원의 방송 내용 중 오늘 불안한 것은 내일을 더 밝게 하고, 불안한 것이 있으면 2호선 차 안에 두고 내리라는 감명 깊은 방송을 듣게 돼 너무 좋았습니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서울 한강 전경과 지하철 도로/사진=변성현 기자
서울 한강 전경과 지하철 도로/사진=변성현 기자
지하철 '감성' 안내 멘트는 한강 둔치를 지나는 2, 4, 7, 8호선 등의 호선에서 출, 퇴근 시간에만 아주 간간히 들려옵니다. 김 기관사는 "출근하고 퇴근하실 때 긴장이 풀어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고 덧붙였습니다.

다사다난했던 2010년대가 어느덧 저물어가고 새로운 2020년이 어느새 열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뜨거운 여름날에도 기관사들은 묵묵히 수많은 승객들을 태우고 지하철을 달립니다. 무심코 탔던 열차에서 감성 방송이 들리신다면 한 번쯤은 귀를 기울여보시는 건 어떠실까요?

다음은 김 기관사가 실제로 했던 다른 멘트들입니다.

#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고단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오늘 하루 볼일이 있어 늦으신 분도 있겠지만 회사 일이 늦게 끝나 지금 퇴근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정말로 늦은 시간까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회사업무로 인해 많이 지치고 피곤하시겠지만, 마지막까지 힘내시고요. 밤이 아주 깊어가고 있습니다. 집에 도착하실 때까지 조심하셔서 안전하게 귀가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승객 여러분, 오늘 하루도 많이 피곤하셨죠?
열심히 일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한 나에게 토닥토닥 잘했다고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따뜻한 저녁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배성수 한경닷컴 기자 baeba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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