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공유경제 길목에서 길 잃은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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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에 부정적인 정부
공유경제 조성은 더디기만
디지털혁명서 밀려날 위기
'정보화는 앞서자'던 시대정신
찾아볼 길 없어
최병일 < 이화여대 교수·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 >
공유경제 조성은 더디기만
디지털혁명서 밀려날 위기
'정보화는 앞서자'던 시대정신
찾아볼 길 없어
최병일 < 이화여대 교수·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 >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2019년과 함께 21세기의 두 번째 10년이 역사 속으로 퇴장한다. 이 역사적인 세모에 벌어지고 있는 두 개의 사건은 한국의 자화상이다. ‘타다’와 ‘배달의민족’ 이야기다.
“배스킨라빈스도 우리 민족이었어”라는 닭살 돋는 민족 마케팅으로 배달 앱(응용프로그램) 시장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배민은 이달 초 글로벌 배달 앱 기업인 독일의 딜리버리히어로(DH)에 팔렸다. 55%의 국내 시장 점유율을 자랑하는 배민의 성장 가능성을 눈여겨본 DH는 배민의 가치를 40억달러(약 4조8000억원)로 평가했다. 국내 인터넷 업체를 대상으로 한 최대 규모 인수합병(M&A)이다. 배민은 민족 마케팅으로 일궈낸 네트워크와 자산을 게르만 민족에게 넘겨준다는 시비에 휘말리고 있지만, 40억달러나 배민에 던질 국내 자본이 과연 있기나 할까. 한국에서 공유경제의 가능성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미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기업 3개를 합친 가치보다 높다고 평가받았던 우버, 동남아시아에 널려 있는 그랩, 중국판 우버인 디디추싱은 왜 한국에선 불가능할까.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 기반을 자랑하고, ‘빨리빨리’의 역동성으로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서야 건너려는’ 일본의 완전성 집착을 뛰어넘었던 한국은 왜 디지털 경제에선 지지부진할까.
타다는 개인 차량 운전사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우버’가 아닌, 렌터카와 대리기사를 결합해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극히 초보 행태의 모빌리티, 공유경제다. 그럼에도 타다는 택시업계의 밥그릇을 뺏어간다는 공격의 대상이었다. 늦은밤 승차거부에 발을 동동 구르던 승객들에게 타다는 택시와 다른 서비스라는 점을 정책당국은 애써 외면했고, 정치권은 알 리 없다. 이달 초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의 관문을 넘어선 ‘여객 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이 이대로 통과되면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다. 1년 된 1500대의 타다, 1만 명의 드라이버는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며 이재웅 대표는 절망한다.
배민과 타다. 서로 다른 영역인 듯하지만 실상은 같은 세계 속에서 서로 연결돼 있다. 배민의 M&A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 타다를 향한 집권 세력의 부정적 시각은 한국이 디지털 경제를 향한 문명사적 전환점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보여준다. 문재인 정부는 군사작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듯한 ‘4차산업혁명위원회’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었지만, 공유경제의 기반을 놓는 일에는 한 걸음도 못 나갔다.
디지털 경제가 구현되는 방식의 하나인 공유경제는 사람의 능력 자체가 자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예고한다. 그 상상력은 시장에 새로운 혁신을 가져오지만, 정치는 그 혁신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혁신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모든 혁신은 기득권과 싸워 이겨야만 실험실의 가능성이 상업적인 성취로 이어진다. 소비자 만족도를 높여주는 기발한 서비스라도 기존 생산자들의 반발이 거세면 정치는 본능적으로 기득권의 손을 들어주곤 했다. 그래서 세상은 새로운 혁신이 등장할 때마다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 기득권 세력이 포진하지 않은 후발국가가 새로운 혁신의 물결을 타고 세계사에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는 이유다. 한국이 1990년대 IT 강국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랬던 한국이 이젠 디지털 혁명의 새로운 물결에서 밀려날 위기에 몰려 있다. ‘국가의 흥망’을 연구했던 경제학자 맨슈어 올슨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형성하고 패권을 구가했던 영국의 쇠락이 기득권을 쥔 이해당사자 간 담합구조 때문이라고 1980년대 초 진단했었다. 미국 유학 시절, 한국엔 아득한 일인 것 같던 남의 나라 이야기가 이젠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됐다.
한국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취다. 그러나 과거의 성공이 만들어낸 담합구조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국의 신화는 여기까지다. 약자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기득권의 담합구조는 양극화된 정치구조 속에서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다. 국가의 미래는 파당적, 단기적 표 계산에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던 1990년대 시대정신은 한국을 IT 선진국으로 이끌었다. 그 추월의 기억은 이제 아련하다. 지금 우리에겐 그런 시대정신이 있는가.
“배스킨라빈스도 우리 민족이었어”라는 닭살 돋는 민족 마케팅으로 배달 앱(응용프로그램) 시장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배민은 이달 초 글로벌 배달 앱 기업인 독일의 딜리버리히어로(DH)에 팔렸다. 55%의 국내 시장 점유율을 자랑하는 배민의 성장 가능성을 눈여겨본 DH는 배민의 가치를 40억달러(약 4조8000억원)로 평가했다. 국내 인터넷 업체를 대상으로 한 최대 규모 인수합병(M&A)이다. 배민은 민족 마케팅으로 일궈낸 네트워크와 자산을 게르만 민족에게 넘겨준다는 시비에 휘말리고 있지만, 40억달러나 배민에 던질 국내 자본이 과연 있기나 할까. 한국에서 공유경제의 가능성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미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기업 3개를 합친 가치보다 높다고 평가받았던 우버, 동남아시아에 널려 있는 그랩, 중국판 우버인 디디추싱은 왜 한국에선 불가능할까.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 기반을 자랑하고, ‘빨리빨리’의 역동성으로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서야 건너려는’ 일본의 완전성 집착을 뛰어넘었던 한국은 왜 디지털 경제에선 지지부진할까.
타다는 개인 차량 운전사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우버’가 아닌, 렌터카와 대리기사를 결합해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극히 초보 행태의 모빌리티, 공유경제다. 그럼에도 타다는 택시업계의 밥그릇을 뺏어간다는 공격의 대상이었다. 늦은밤 승차거부에 발을 동동 구르던 승객들에게 타다는 택시와 다른 서비스라는 점을 정책당국은 애써 외면했고, 정치권은 알 리 없다. 이달 초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의 관문을 넘어선 ‘여객 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이 이대로 통과되면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다. 1년 된 1500대의 타다, 1만 명의 드라이버는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며 이재웅 대표는 절망한다.
배민과 타다. 서로 다른 영역인 듯하지만 실상은 같은 세계 속에서 서로 연결돼 있다. 배민의 M&A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 타다를 향한 집권 세력의 부정적 시각은 한국이 디지털 경제를 향한 문명사적 전환점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보여준다. 문재인 정부는 군사작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듯한 ‘4차산업혁명위원회’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었지만, 공유경제의 기반을 놓는 일에는 한 걸음도 못 나갔다.
디지털 경제가 구현되는 방식의 하나인 공유경제는 사람의 능력 자체가 자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예고한다. 그 상상력은 시장에 새로운 혁신을 가져오지만, 정치는 그 혁신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혁신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모든 혁신은 기득권과 싸워 이겨야만 실험실의 가능성이 상업적인 성취로 이어진다. 소비자 만족도를 높여주는 기발한 서비스라도 기존 생산자들의 반발이 거세면 정치는 본능적으로 기득권의 손을 들어주곤 했다. 그래서 세상은 새로운 혁신이 등장할 때마다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 기득권 세력이 포진하지 않은 후발국가가 새로운 혁신의 물결을 타고 세계사에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는 이유다. 한국이 1990년대 IT 강국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랬던 한국이 이젠 디지털 혁명의 새로운 물결에서 밀려날 위기에 몰려 있다. ‘국가의 흥망’을 연구했던 경제학자 맨슈어 올슨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형성하고 패권을 구가했던 영국의 쇠락이 기득권을 쥔 이해당사자 간 담합구조 때문이라고 1980년대 초 진단했었다. 미국 유학 시절, 한국엔 아득한 일인 것 같던 남의 나라 이야기가 이젠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됐다.
한국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취다. 그러나 과거의 성공이 만들어낸 담합구조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국의 신화는 여기까지다. 약자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기득권의 담합구조는 양극화된 정치구조 속에서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다. 국가의 미래는 파당적, 단기적 표 계산에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던 1990년대 시대정신은 한국을 IT 선진국으로 이끌었다. 그 추월의 기억은 이제 아련하다. 지금 우리에겐 그런 시대정신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