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보수주의의 진짜 敵은 극단주의와 권력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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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
제시 노먼 지음 / 홍지수 옮김
살림 / 466쪽 / 2만3000원
제시 노먼 지음 / 홍지수 옮김
살림 / 466쪽 / 2만3000원
아일랜드 출신 영국 정치가인 에드먼드 버크(사진·1730~1797)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영국 국교회가 성립되면서 각종 차별에 시달렸던 아일랜드 가톨릭교도에 대한 보다 동등한 대우를 주장했다. 아메리카에 있는 13개 영국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억압에 반대했고, 행정권력과 왕실의 공직자 임명 권한을 헌법적으로 제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600년 엘리자베스 1세의 칙허장에 따라 설립된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휘두르는 기업권력과 각종 부패, 탈법에도 반대했다.
이렇게 보면 그는 개혁적·진보적 성향일 듯하다. 그러나 버크는 프랑스대혁명에는 강력히 반대하고 그 영향과 도그마를 극도로 경계했다. 이 때문에 버크는 모순적인 인물,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묘사됐고, 일관성이 없고 위선적이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아메리카 혁명은 지지하면서 왜 프랑스혁명은 강력히 비판했는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면서 가톨릭에 반기를 든 이들을 왜 옹호하고 왕실과 반목했는지 의문투성이라는 것이다.
영국 보수당 의원이자 중도우파 싱크탱크인 폴리시 익스체인지(Policy Exchange)의 선임연구원인 제시 노먼은 《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에서 “버크의 사상 저변에는 일관성이 있다”고 이런 비판을 일축한다. 버크는 평생 불의와 권력 남용을 혐오했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싸우고 헌신했다.
책은 크게 버크의 생애와 사상이란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버크가 태어났을 무렵 아일랜드는 명목상으로는 나라였지만 실제로는 영국령이었다. 교육과 신분 상승의 기회는 제약됐다. 특히 가톨릭교도는 전문직에 종사할 수 없었고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것도 금지됐다. 투표권도 행사하지 못하는 등 수많은 법적 제약을 받았다. 버크의 아버지는 아들들은 개신교도로, 딸은 가톨릭교도로 키웠다. 11세 때 들어간 기숙학교의 운영자는 퀘이커교도였다.
이런 성장 배경 때문이었을까. 버크는 일찍부터 평등주의의 정서와 관용적 태도를 지녔다. 자의적 권력 행사를 혐오하고 사회질서는 모두에게 이익이 돼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법률가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원에 들어갔지만 법률 공부보다는 다양한 독서에 심취했고, 작가로 등단했다.
사상가이자 현실에 기반한 문제인식과 해법을 제시하는 정치가로서의 싹이 초기부터 보였다. 1757년에 친구인 윌 버크와 함께 쓴 ‘아메리카에 있는 유럽 식민지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는 네덜란드 제국과 스페인 제국이 맞게 된 운명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식민지 관리의 방향을 제시했다. 남미의 방대한 영토를 장악한 두 제국은 지속가능한 식민지를 구축하는 대신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광물을 캐고 착취했다. 그 결과 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증오의 대상이 돼 식민지 경영은 참담하게 실패했다.
따라서 식민지 인도와 아메리카에서는 일방적 착취 관계 대신 현지의 실정과 문화, 정서를 고려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버크는 주장했다. 식민지는 원자재를 생산하고 최종 상품을 수입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던 때였다. 버크는 고압적으로 장악하고 통제하고 응징하는 대신 공동의 이익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제국의 개념이 필요하다고 주창했다. 그는 1775년 의회에서 ‘식민지와의 화해를 위한 결의안을 제안하는 연설’을 통해 아메리카와의 화해를 위한 15개의 조치를 제안했다. 화해하지 않고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식민지 인도에서 착복과 공금횡령, 착취를 일삼은 초대 총독 워런 헤이스팅스를 탄핵 재판에 세운 것도 버크였다.
버크는 1790년 출간한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을 통해 폭력적이고 급진적인 사회변화의 부작용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예견했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는 순간 실제로 군을 지휘하는 사람이 당신의 주인이다. 당신이 섬기는 왕의 주인이요, 당신을 대표하는 의회의 주인이요, 당신이 속한 공화국 전체의 주인이다.’ 나폴레옹과 같은 군부 독재자의 등장을 섬뜩할 정도로 정확히 내다본 것이다.
이처럼 버크는 항상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다. 아메리카, 아일랜드, 인도, 프랑스와 관련한 그의 주장은 세월이 지난 뒤에 옳았던 것으로 판명됐다.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고, 노예제도와 사형제도에 반대하고 자유시장을 지지했던 점도 그랬다.
저자는 “버크의 이 모든 입장을 한데 묶는 것은 질서 속에서 누리는 자유, 바람직한 삶을 영위하고 인간사회가 부여하는 혜택을 누릴 인간의 권리에 대한 불굴의 신념”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라면 변화와 개혁은 필연적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권력 남용은 절대적으로 경계해야 할 요소다. 버크가 프랑스혁명에 반대한 것도 기요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권력 남용으로 무고하게 희생됐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의 원조로 꼽히는 버크가 세월의 간극을 넘어 시사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보수주의는 진보주의의 반대가 아니라 편견, 몰이해, 이기주의 등에 이끌려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극단주의의 반대다. 우리는 그런 보수주의자를 갖고 있는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이렇게 보면 그는 개혁적·진보적 성향일 듯하다. 그러나 버크는 프랑스대혁명에는 강력히 반대하고 그 영향과 도그마를 극도로 경계했다. 이 때문에 버크는 모순적인 인물,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묘사됐고, 일관성이 없고 위선적이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아메리카 혁명은 지지하면서 왜 프랑스혁명은 강력히 비판했는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면서 가톨릭에 반기를 든 이들을 왜 옹호하고 왕실과 반목했는지 의문투성이라는 것이다.
영국 보수당 의원이자 중도우파 싱크탱크인 폴리시 익스체인지(Policy Exchange)의 선임연구원인 제시 노먼은 《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에서 “버크의 사상 저변에는 일관성이 있다”고 이런 비판을 일축한다. 버크는 평생 불의와 권력 남용을 혐오했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싸우고 헌신했다.
책은 크게 버크의 생애와 사상이란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버크가 태어났을 무렵 아일랜드는 명목상으로는 나라였지만 실제로는 영국령이었다. 교육과 신분 상승의 기회는 제약됐다. 특히 가톨릭교도는 전문직에 종사할 수 없었고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것도 금지됐다. 투표권도 행사하지 못하는 등 수많은 법적 제약을 받았다. 버크의 아버지는 아들들은 개신교도로, 딸은 가톨릭교도로 키웠다. 11세 때 들어간 기숙학교의 운영자는 퀘이커교도였다.
이런 성장 배경 때문이었을까. 버크는 일찍부터 평등주의의 정서와 관용적 태도를 지녔다. 자의적 권력 행사를 혐오하고 사회질서는 모두에게 이익이 돼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법률가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원에 들어갔지만 법률 공부보다는 다양한 독서에 심취했고, 작가로 등단했다.
사상가이자 현실에 기반한 문제인식과 해법을 제시하는 정치가로서의 싹이 초기부터 보였다. 1757년에 친구인 윌 버크와 함께 쓴 ‘아메리카에 있는 유럽 식민지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는 네덜란드 제국과 스페인 제국이 맞게 된 운명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식민지 관리의 방향을 제시했다. 남미의 방대한 영토를 장악한 두 제국은 지속가능한 식민지를 구축하는 대신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광물을 캐고 착취했다. 그 결과 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증오의 대상이 돼 식민지 경영은 참담하게 실패했다.
따라서 식민지 인도와 아메리카에서는 일방적 착취 관계 대신 현지의 실정과 문화, 정서를 고려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버크는 주장했다. 식민지는 원자재를 생산하고 최종 상품을 수입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던 때였다. 버크는 고압적으로 장악하고 통제하고 응징하는 대신 공동의 이익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제국의 개념이 필요하다고 주창했다. 그는 1775년 의회에서 ‘식민지와의 화해를 위한 결의안을 제안하는 연설’을 통해 아메리카와의 화해를 위한 15개의 조치를 제안했다. 화해하지 않고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식민지 인도에서 착복과 공금횡령, 착취를 일삼은 초대 총독 워런 헤이스팅스를 탄핵 재판에 세운 것도 버크였다.
버크는 1790년 출간한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을 통해 폭력적이고 급진적인 사회변화의 부작용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예견했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는 순간 실제로 군을 지휘하는 사람이 당신의 주인이다. 당신이 섬기는 왕의 주인이요, 당신을 대표하는 의회의 주인이요, 당신이 속한 공화국 전체의 주인이다.’ 나폴레옹과 같은 군부 독재자의 등장을 섬뜩할 정도로 정확히 내다본 것이다.
이처럼 버크는 항상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다. 아메리카, 아일랜드, 인도, 프랑스와 관련한 그의 주장은 세월이 지난 뒤에 옳았던 것으로 판명됐다.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고, 노예제도와 사형제도에 반대하고 자유시장을 지지했던 점도 그랬다.
저자는 “버크의 이 모든 입장을 한데 묶는 것은 질서 속에서 누리는 자유, 바람직한 삶을 영위하고 인간사회가 부여하는 혜택을 누릴 인간의 권리에 대한 불굴의 신념”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라면 변화와 개혁은 필연적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권력 남용은 절대적으로 경계해야 할 요소다. 버크가 프랑스혁명에 반대한 것도 기요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권력 남용으로 무고하게 희생됐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의 원조로 꼽히는 버크가 세월의 간극을 넘어 시사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보수주의는 진보주의의 반대가 아니라 편견, 몰이해, 이기주의 등에 이끌려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극단주의의 반대다. 우리는 그런 보수주의자를 갖고 있는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