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법안이 통과해 검찰의 기소독점권 유지가 힘들어진 가운데 31일 윤석열 검찰총장이 점심을 위해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구내식당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회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법안이 통과해 검찰의 기소독점권 유지가 힘들어진 가운데 31일 윤석열 검찰총장이 점심을 위해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구내식당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검찰총장이 2020년 신년사를 발표했다. 당초 법조계에선 윤 총장이 신년사를 통해 지난 30일 통과된 공수처법을 강력 비판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었다.

공수처법에 검경이 수사 중인 사안을 가져다 수사할 수 있는 '수사 우선권'이 부여된데다 범죄 인지 시 통보 조항까지 추가되자 검찰은 강하게 반발했었다. 검찰은 이에 반대하는 의견서도 국회 측에 전달했다.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윤 총장이 검찰 구성원 사기 진작 차원에서라도 신년사를 통해 공수처법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내지 않겠느냐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31일 공개된 윤 총장 신년사에는 공수처법의 '공'자도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윤 총장은 "형사사법 관련 법률의 제·개정으로 앞으로 형사절차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부정부패와 민생범죄에 대한 국가의 대응 역량이 약화되는 일이 없도록 국민의 검찰로서 최선을 다하자"며 에둘러 공수처를 언급했다.

대신 윤 총장은 "국민을 위한 변화의 노력을 멈출 수는 없다"면서 검찰 내부 개혁을 주문했다. 윤 총장은 "제도적인 개혁과 함께 우리에게 부여된 책무를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면서 "형사 절차에서 범죄피해자에 대한 보호와 지원, 사건관계인에 대한 배려에 빈틈이 없도록 업무시스템을 점검하고 정비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이미 공수처법이 통과된 마당에 검찰이 여권에 정면으로 맞선다는 비판만 받을 수 있어 윤 총장이 신년사를 톤다운 시킨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김명일 한경닷컴 기자 mi737@hankyung.com


아래는 윤 총장의 신년사 전문.

검찰가족 여러분! 2020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소망하는 일마다 큰 성취를 이루고, 가정에도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한 해 어려운 여건에서도, 여러분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소임을 다했습니다. 중요사건 수사와 공판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국의 구성원들이 한 마음으로 힘을 보태어 검찰에 맡겨진 무거운 부담을 나누었습니다. 여러분의 헌신과 노고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작년 7월, 여러분 앞에서, 헌법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국민의 말씀을 경청하며, 국민의 사정을 살피고, 국민의 생각에 공감하는 ‘국민과 함께하는’ 자세로 일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간의 검찰권 행사 방식, 수사관행과 문화를 헌법과 국민의 관점에서 되돌아보며, 과감하고 능동적인 개혁을 추진해 왔습니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국민을 위한 변화의 노력을 멈출 수 없습니다. 검찰이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기관이 될 때까지, 우리 스스로 개혁의 주체라는 자세로 중단 없는 개혁을 계속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제도적인 개혁과 함께, 우리에게 부여된 책무를 제대로 수행해야 합니다. 정치, 경제 분야를 비롯하여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불공정에 단호히 대응하는 것은 우리 헌법의 핵심 가치를 지켜내는 일입니다.

지금 진행 중인 사건의 수사나 공판 역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의 본질을 지켜내기 위해 국민이 검찰에 맡긴 책무를 완수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어떤 사사로운 이해관계도, 당장의 유·불리도 따지지 않고 오로지 국민만 바라보며 바른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자는 헌법정신을 실현하는 데 기여하는 검찰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는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는 해입니다. 금품선거, 거짓말선거, 공무원의 선거개입 등 선거범죄에 철저한 대비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선거사건에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단순히 기계적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돈이나 권력으로 국민의 정치적 선택을 왜곡하는 반칙과 불법을 저지른다면, 철저히 수사하여 엄정 대응한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아울러, 사회적·경제적 약자를 범죄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검찰에 맡겨진 가장 기본적인 책무입니다.

여성, 아동, 장애인 등 약자를 노리는 강력범죄, 서민들에게 큰 피해를 주는 신종 경제범죄에 단호히 대처해야 합니다.

형사절차에서 범죄피해자에 대한 보호와 지원, 사건관계인에 대한 배려에 빈틈이 없도록 업무 시스템을 점검하고 정비해 나가야 합니다.

강자의 횡포를 막아내고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검찰 본연의 소임에 모자람이 없도록 합시다.

검찰가족 여러분! 형사 법집행은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아무리 법절차에 따른 검찰권 행사라 하더라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항상 비례와 균형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국민을 위해 꼭 필요한 곳이 어디인지 잘 살펴서 검찰의 역량을 모으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한정된 역량을 올바르게 배분하지 못한다면, ‘과잉수사’ 아니면 ‘부실수사’라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수사와 공소유지 등 검찰 본연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업무환경과 절차 개선을 위해서도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불필요한 일은 덜어내고, 구성원들이 고르게 일하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도록 다함께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 주기 바랍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검찰가족 여러분! 올해도 검찰 안팎의 여건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공직자는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 오로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자세로 최선을 다해 책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형사사법 관련 법률의 제·개정으로 앞으로 형사절차에 큰 변화가 예상됩니다. 그러나, 부정부패와 민생범죄에 대한 국가의 대응 역량이 약화되는 일이 없도록 국민의 검찰로서 최선을 다합시다.

검찰총장으로서 저는, 헌법정신과 국민의 뜻에 따라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여러분을 응원하고, 여러분의 정당한 소신을 끝까지 지켜드리겠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감사합니다.

2020년 1월 2일

검찰총장 윤 석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