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만찬] 조태권 광주요 그룹 회장 "세계에 1000여개 프랜차이즈 한식당 오픈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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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음식은 맛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아니다. 조태권 광주요 그룹 회장이 오천년 역사 공부에 몰두하며 깨달은 진리다. 훌륭한 맛을 가진 음식과 그 음식을 담아 예술이 되는 그릇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황홀한 경험으로 만들어 줄 향긋한 술까지 삼위일체가 되어야 비로소 문화가 된다. 세계 어느 역사를 보아도 음식과 술 그리고 도자 문화는 함께 성장해왔다는 걸 강조하는 조태권 회장의 말은 미쉐린 가이드 3스타와 1스타를 각각 획득한 한식당 가온과 비채나, 증류주 화요, 광주요 도자기가 증명하고 있다.
▶도자기, 한식 그리고 우리 술까지 광주요 그룹은 우리 것을 세계화 시키고 알리고자 하는 시도를 계속해서 해나가고 있다. 우리 것을 세계에도 통하게 만들 수 있었던 광주요 그룹의 원천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한식당 ‘가온’과 ‘비채나’는 3년 연속 미쉐린 가이드 3 스타와 1 스타를 획득하는 등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식당이다. 그리고 그 두 곳에서 사용하는 식기 물론 광주요에서 나오는 제품이다. 이와 함께 즐기는 술은 화요다. 도자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식문화와 함께 성장해왔다. 광주요 그룹은 음식과 주류 그리고 도자기의 삼위일체를 가지고 운영하고 있고, 이것이 세계인의 일상에 우리의 문화가 보편적으로 스며들 수 있었던 원천이다.”
▶창업자이자 부친이신 故 조소수 선대 회장도 도자기에 대한 사랑이 엄청났다고 들었다. 가업을 물려받은 계기는 무엇인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지극한 당부 말씀이 있었다. 훌륭하게 키워내지는 못해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열심히 키워온 광주요의 명맥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어머니는 광주요가 당장 큰 돈이 되지 않아도 빛을 볼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셨다.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어머니 속을 가장 많이 끓였던 자식이 바로 나라서, 그 말씀을 받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본과 미국에서 청년시절을 보냈다. 그곳에서 어떤 것들을 보고 배웠나.
“경기중학교를 다니다가 집안이 기울면서 방황을 했다. 집에서는 주변 환경을 바꿔야 내가 철이 든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던 일본으로 나를 보냈다. 일본에서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했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싸움에 휘말렸다. 내가 아시아 지역 수학상을 받은 날의 일이다. 내가 상을 탄다고 학교에서 집으로 연락이 와서 부모님이 정말 너무도 좋아하셨다. 축하의 의미로 용돈을 챙겨주셨는데 그걸 가지고 친구들과 놀러갔다가 친구 중 한명과 불량배가 시비가 붙었다. 이제 내가 사람 됐다고 생각하셨던 부모님의 낙심이 정말 엄청 났다. 그 일로 한국에 돌아오니 친구들은 다 대학생이라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국에 공부하러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집이 어려울 때라 더 이상 폐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토플 공부를 해서 미주리 주립대 입학허가서를 받게 됐다. 처음 미국으로 갈 때 어머니가 주신 5000달러를 제외하고는 학비며 생활비며 전부 내가 벌어서 생활했다.”
▶미국에선 어떤 일을 해서 돈을 벌었나.
“홀리데이 인의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버스보이를 했다. 버스보이라고 하면 다들 버스 타고 다니는 걸 생각하는데, 쉽게 말해 웨이터의 조수다. 수입이 괜찮았던 아르바이트 자리라 여기도 어렵게 들어갔다. 냅킨 접기, 식기 닦기 등을 했지만 돈을 벌어야 공부를 할 수 있으니 정말 열심히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수십개의 접시를 들고가다가 식당 바닥에서 미끄러졌다. 바닥에 물기가 있어서였다. 잠깐 정신을 잃었는데 일어나보니 노조원들이 와서 호텔을 고발하자고 하더라. 호텔 식당 바닥에 물기가 절대 있으면 안 되는데 이를 지키지 못한 호텔의 잘못이 크니 큰 보상을 받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내 몸이 멀쩡한데 어디가 아프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 모습을 좋게 본 총괄 웨이터가 그 다음 해부터 나를 웨이터로 승격시켰다. 버스보이를 10년을 해야 웨이터가 겨우 될 수 있는데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웨이터 생활은 어땠나. 버스보이와는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버스보이 보다는 수입이 엄청나게 컸다. 방학에 석달 일하면 학비 정도는 벌 수 있었다. 대신 익혀야 할 게 너무 많았다. 단순히 메뉴를 외우는 게 아니라 와인, 스테이크 만드는 법 등 요리를 비롯한 식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런 생활이 삶에 자극을 주다보니까 공부도 자연스레 더 집중 했고, 3년 반이라는 시간 만에 조기 졸업을 할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대우에 취직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일단 한국에 돌아와보니 친구들은 전부 대기업에 취직을 했더라. 당시 경기중학교 선후배들이 대우에 많이 다니고 있어 주변에서 너도 대우에 취직해보는 것은 어떠냐고 권했다. 그 말을 듣고 무작정 김우중 대우 회장을 찾아갔지만 당연히 사전 약속이 없으니 만나주지 않더라.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김우중 회장을 만나 뵐 수 있었다. 고생할 각오가 되어 있냐고 한 마디 딱 묻더니 바로 특채로 출근하게 하시더라.”
▶대우에서는 승승장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생할 각오가 되어있다는 말을 허투루 듣지 않으셨는지 정말 쉽지 않은 곳으로 출근토록 했다. 부산에 있던 섬유공장이었는데, 어느날 사우디 차관 앞에서 브리핑할 일이 생겼다. 누구 앞에서 브리핑을 해 본 일이 전무해서 당시 외무부에 다니던 매형의 도움을 얻어서 브리핑 자료를 만들고 그걸 계속해서 외웠다. 결과가 좋아서 서울로 발령이 나서 올라오게 됐고, 이후부터는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일들을 주로 맡았다. 나중에는 그리스 지사장까지 올라가게 됐는데 만삭의 아내를 도와주러 해외까지 찾아온 처제가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면서 무력감에 회사도 그만뒀다. 돈이, 일이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이후 광주요 그룹을 맡았는데, 가업을 이끌어 나가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세계를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고 부모님께 물려받은 지식도 많았지만, 이걸 대중에게 그리고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는 여러가지를 공부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음식, 도자기, 술의 연관관계가 눈에 분명하게 보였다. 오천년 역사 공부에 몰입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도자기는 우리 문화의 대표적 상품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문화의 재정립은 도자 산업의 부활이라고 줄곧 주장했다. 한국 도자기의 미래는 오직 한식문화의 세계진출에 달려있다. 도자기의 발전은 역사적으로 볼 때 식당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확산돼 왔다. 이미 식생활의 선진국들인 일본, 중국, 유럽, 미국 도자기 제품들은 인지도 면에서 세계 시장을 압도할 수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처럼 후발 주자들에게는 점점 그런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가온 5년 연속 3스타 획득’이란 목표 달성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 식당의 미래는 밝다. 그렇기에 지금이야 말로 한국도자기 혁명의 절체절명의 기회다.”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도자기 제조업이 아닌 유통으로의 탈바꿈이다. 이미 도자기 제조업으로는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도자 개혁의 혁명을 시작하지 않으면 그 기회는 또 10여년 늦어지고 만다. 이 혁명을 할 수 있는 기업으로는 눈을 씻고 봐도 광주요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음식과 주류 그리고 도자기의 삼위일체를 가지고 운영하는 세계적인 명성의 미쉐린 3스타 식당을 가진 회사가 바로 광주요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들은 광주요 그룹에 어떻게 접목시켰나.
“문화의 시작은 태초에 음식으로부터 시작해 의(衣)와 주(住)가 중심이 되어 문명화, 기계화, 공업화, 과학화, 전자화, 지능화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이 분야만은 천재지변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발전하고 지속해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래서 집중한 사업이 주류다. 세계의 70억 인구 중 10%인 7억명이 고객인데 그 중 30%인 2억 명 정도가 취하기 보다는 좋은 술을 음식과 즐기기 위해 일상의 예술로 술을 즐긴다. 앞으로 세계가 한 지붕아래 다문화 생활을 하는 시대가 온다. 한국 식생활 문화가 세계의 보편적 문화로 자리 잡는 것도 이제 시간 문제인데 이를 확산시킬 수 있는 확실한 매개체는 술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계속해서 해오는 일들이 이제는 많이 알려지고, 성과도 이뤄서 흐뭇한 부분도 있겠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
”세계 10대 도시에 운영되는 가온 식당과 세계 10여 개국에 진출할 중상층 대상의 한식 프랜차이즈 식당 1000여 개를 통해 한국 식문화의 입지를 정착시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이로써 화요의 술 제품과 광주요의 도자유통은 확실히 자리를 잡을 것이다. 우리의 식당이 세계각지에서 확고한 뿌리를 내리면 그때야 나는 평온한 마음으로 물러날 수 있을 것 같다.”
잡앤조이 남민영 기자 moonblue@hankyung.com
▶도자기, 한식 그리고 우리 술까지 광주요 그룹은 우리 것을 세계화 시키고 알리고자 하는 시도를 계속해서 해나가고 있다. 우리 것을 세계에도 통하게 만들 수 있었던 광주요 그룹의 원천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한식당 ‘가온’과 ‘비채나’는 3년 연속 미쉐린 가이드 3 스타와 1 스타를 획득하는 등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식당이다. 그리고 그 두 곳에서 사용하는 식기 물론 광주요에서 나오는 제품이다. 이와 함께 즐기는 술은 화요다. 도자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식문화와 함께 성장해왔다. 광주요 그룹은 음식과 주류 그리고 도자기의 삼위일체를 가지고 운영하고 있고, 이것이 세계인의 일상에 우리의 문화가 보편적으로 스며들 수 있었던 원천이다.”
▶창업자이자 부친이신 故 조소수 선대 회장도 도자기에 대한 사랑이 엄청났다고 들었다. 가업을 물려받은 계기는 무엇인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지극한 당부 말씀이 있었다. 훌륭하게 키워내지는 못해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열심히 키워온 광주요의 명맥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어머니는 광주요가 당장 큰 돈이 되지 않아도 빛을 볼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셨다.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어머니 속을 가장 많이 끓였던 자식이 바로 나라서, 그 말씀을 받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본과 미국에서 청년시절을 보냈다. 그곳에서 어떤 것들을 보고 배웠나.
“경기중학교를 다니다가 집안이 기울면서 방황을 했다. 집에서는 주변 환경을 바꿔야 내가 철이 든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던 일본으로 나를 보냈다. 일본에서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했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싸움에 휘말렸다. 내가 아시아 지역 수학상을 받은 날의 일이다. 내가 상을 탄다고 학교에서 집으로 연락이 와서 부모님이 정말 너무도 좋아하셨다. 축하의 의미로 용돈을 챙겨주셨는데 그걸 가지고 친구들과 놀러갔다가 친구 중 한명과 불량배가 시비가 붙었다. 이제 내가 사람 됐다고 생각하셨던 부모님의 낙심이 정말 엄청 났다. 그 일로 한국에 돌아오니 친구들은 다 대학생이라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국에 공부하러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집이 어려울 때라 더 이상 폐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토플 공부를 해서 미주리 주립대 입학허가서를 받게 됐다. 처음 미국으로 갈 때 어머니가 주신 5000달러를 제외하고는 학비며 생활비며 전부 내가 벌어서 생활했다.”
▶미국에선 어떤 일을 해서 돈을 벌었나.
“홀리데이 인의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버스보이를 했다. 버스보이라고 하면 다들 버스 타고 다니는 걸 생각하는데, 쉽게 말해 웨이터의 조수다. 수입이 괜찮았던 아르바이트 자리라 여기도 어렵게 들어갔다. 냅킨 접기, 식기 닦기 등을 했지만 돈을 벌어야 공부를 할 수 있으니 정말 열심히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수십개의 접시를 들고가다가 식당 바닥에서 미끄러졌다. 바닥에 물기가 있어서였다. 잠깐 정신을 잃었는데 일어나보니 노조원들이 와서 호텔을 고발하자고 하더라. 호텔 식당 바닥에 물기가 절대 있으면 안 되는데 이를 지키지 못한 호텔의 잘못이 크니 큰 보상을 받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내 몸이 멀쩡한데 어디가 아프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 모습을 좋게 본 총괄 웨이터가 그 다음 해부터 나를 웨이터로 승격시켰다. 버스보이를 10년을 해야 웨이터가 겨우 될 수 있는데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웨이터 생활은 어땠나. 버스보이와는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버스보이 보다는 수입이 엄청나게 컸다. 방학에 석달 일하면 학비 정도는 벌 수 있었다. 대신 익혀야 할 게 너무 많았다. 단순히 메뉴를 외우는 게 아니라 와인, 스테이크 만드는 법 등 요리를 비롯한 식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런 생활이 삶에 자극을 주다보니까 공부도 자연스레 더 집중 했고, 3년 반이라는 시간 만에 조기 졸업을 할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대우에 취직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일단 한국에 돌아와보니 친구들은 전부 대기업에 취직을 했더라. 당시 경기중학교 선후배들이 대우에 많이 다니고 있어 주변에서 너도 대우에 취직해보는 것은 어떠냐고 권했다. 그 말을 듣고 무작정 김우중 대우 회장을 찾아갔지만 당연히 사전 약속이 없으니 만나주지 않더라.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김우중 회장을 만나 뵐 수 있었다. 고생할 각오가 되어 있냐고 한 마디 딱 묻더니 바로 특채로 출근하게 하시더라.”
▶대우에서는 승승장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생할 각오가 되어있다는 말을 허투루 듣지 않으셨는지 정말 쉽지 않은 곳으로 출근토록 했다. 부산에 있던 섬유공장이었는데, 어느날 사우디 차관 앞에서 브리핑할 일이 생겼다. 누구 앞에서 브리핑을 해 본 일이 전무해서 당시 외무부에 다니던 매형의 도움을 얻어서 브리핑 자료를 만들고 그걸 계속해서 외웠다. 결과가 좋아서 서울로 발령이 나서 올라오게 됐고, 이후부터는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일들을 주로 맡았다. 나중에는 그리스 지사장까지 올라가게 됐는데 만삭의 아내를 도와주러 해외까지 찾아온 처제가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면서 무력감에 회사도 그만뒀다. 돈이, 일이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이후 광주요 그룹을 맡았는데, 가업을 이끌어 나가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세계를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고 부모님께 물려받은 지식도 많았지만, 이걸 대중에게 그리고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는 여러가지를 공부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음식, 도자기, 술의 연관관계가 눈에 분명하게 보였다. 오천년 역사 공부에 몰입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도자기는 우리 문화의 대표적 상품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문화의 재정립은 도자 산업의 부활이라고 줄곧 주장했다. 한국 도자기의 미래는 오직 한식문화의 세계진출에 달려있다. 도자기의 발전은 역사적으로 볼 때 식당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확산돼 왔다. 이미 식생활의 선진국들인 일본, 중국, 유럽, 미국 도자기 제품들은 인지도 면에서 세계 시장을 압도할 수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처럼 후발 주자들에게는 점점 그런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가온 5년 연속 3스타 획득’이란 목표 달성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 식당의 미래는 밝다. 그렇기에 지금이야 말로 한국도자기 혁명의 절체절명의 기회다.”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도자기 제조업이 아닌 유통으로의 탈바꿈이다. 이미 도자기 제조업으로는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도자 개혁의 혁명을 시작하지 않으면 그 기회는 또 10여년 늦어지고 만다. 이 혁명을 할 수 있는 기업으로는 눈을 씻고 봐도 광주요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음식과 주류 그리고 도자기의 삼위일체를 가지고 운영하는 세계적인 명성의 미쉐린 3스타 식당을 가진 회사가 바로 광주요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들은 광주요 그룹에 어떻게 접목시켰나.
“문화의 시작은 태초에 음식으로부터 시작해 의(衣)와 주(住)가 중심이 되어 문명화, 기계화, 공업화, 과학화, 전자화, 지능화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이 분야만은 천재지변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발전하고 지속해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래서 집중한 사업이 주류다. 세계의 70억 인구 중 10%인 7억명이 고객인데 그 중 30%인 2억 명 정도가 취하기 보다는 좋은 술을 음식과 즐기기 위해 일상의 예술로 술을 즐긴다. 앞으로 세계가 한 지붕아래 다문화 생활을 하는 시대가 온다. 한국 식생활 문화가 세계의 보편적 문화로 자리 잡는 것도 이제 시간 문제인데 이를 확산시킬 수 있는 확실한 매개체는 술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계속해서 해오는 일들이 이제는 많이 알려지고, 성과도 이뤄서 흐뭇한 부분도 있겠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
”세계 10대 도시에 운영되는 가온 식당과 세계 10여 개국에 진출할 중상층 대상의 한식 프랜차이즈 식당 1000여 개를 통해 한국 식문화의 입지를 정착시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이로써 화요의 술 제품과 광주요의 도자유통은 확실히 자리를 잡을 것이다. 우리의 식당이 세계각지에서 확고한 뿌리를 내리면 그때야 나는 평온한 마음으로 물러날 수 있을 것 같다.”
잡앤조이 남민영 기자 moonblu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