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평가사 최고령 합격 최기성 씨 "65세에 딴 자격증으로 인생 2막 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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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희망을 쏘는 사람들 (2) '퇴직자의 희망 전도사'
"영어에 막히고 패혈증에 쓰러져도
맨땅에 헤딩하듯 6년간 시험공부"
"영어에 막히고 패혈증에 쓰러져도
맨땅에 헤딩하듯 6년간 시험공부"
“100세 시대에는 직장에서의 삶보다 퇴직 후의 삶이 더 길 수도 있어요. 노는 것도 1~2년이더라고요. 30~40년의 긴 세월을 마냥 흘려보낼지, 새롭게 도전해 제2의 삶을 살지 고민을 안 할 수 없죠.” 올해 66세가 된 최기성 씨(사진)는 ‘새내기 직원’이다. 지난해 11월 삼일감정평가법인에 입사해 한 달 보름째 20~30대 동기들과 함께 수습 감정평가사로 일하고 있다. 이전에 거친 25년의 공직생활 덕에 직책은 고문이지만, 매일 현장에 나가 건물의 가치를 평가하며 발로 뛰고 있다. 최씨는 2019년 감정평가사 시험에서 65세의 나이로 합격했다. 한국감정평가사협회에 따르면 역대 최고령 합격자다. 인생이 도전의 연속이었다는 그를, 2019년 마지막 날인 31일 서울 문정동의 삼일감정평가법인 사무실에서 만났다.
폐결핵 앓다 26세 대학 입학
최씨는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했다. 대입 검정고시를 거치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1977년 건국대 법대에 진학했고 졸업한 지 2년 후인 1984년 제28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서울시를 거쳐 국가정보원에서 20년 이상 일했고 1급 관리관인 실장까지 올랐다. 국정원 재직 당시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로 참여했다. 이후 한국중부발전과 국가안보전략원 등에서 이사로 근무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쉽게 이뤄낸 적이 없었다. 그는 경남 통영에서 4남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만 다섯 남매 중 유일하게 부산 동아고로 ‘유학’을 갔다.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을 코앞에 둔 3학년 2학기에 폐결핵에 걸렸다. 병이 낫지 않아 자퇴를 했고 3년을 앓았다. 이후 대입 검정고시를 치르고, 군대를 다녀온 뒤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는 26세였다.
법대를 나왔지만 사법고시가 아니라 행정고시를 본 것도 현실 때문이었다. “법조인이 되고 싶었지만 사시는 수험 준비 기간이 긴데 학비를 겨우 내는 상황에서 빨리 취직하는 게 중요했다”고 그는 말했다. 쉽지 않았지만 매 순간 도전하며 살아온 경험은 최씨에게 뼈와 살이 됐다. 퇴직 후 감정평가사 시험에 뛰어들 용기는 고난을 이기며 공부했던 젊은 시절에서 나왔다는 설명이다.
독서실에서 하루 12시간씩 공부
처음 퇴직했을 때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밤잠을 설치게 했던 업무, 일상이던 주말 근무가 사라졌다. 친구들과 등산을 가고 골프도 쳤다. 하지만 2년을 채 못 갔다. 앞으로 30년을 이렇게 살아야 하나 고민이 됐다. “나이에 상관없이 일할 수 있다더라”는 아내의 말에 감정평가사 시험에 도전한 것도 그래서다.
이후 이어진 6년간의 수험 생활은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토익 점수는 부족했고 보고서에 익숙해진 눈으로 긴 지문을 읽기는 힘들었다. 건강도 다시 발목을 잡았다. 그는 수험 생활 중 패혈증에 걸려 8개월을 앓았다. 의사는 치사율이 50%라고 했다. 가족과 친구들은 “공부를 그만두라”고 말렸다.
그래도 최씨는 “포기할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하루 12시간을 서울 신림동 독서실에서 공부했다. 이후에는 집 근처 시립도서관에 갔다. 똑같은 문제집을 세 번 넘게 풀며 달달 외웠다. 과락 두 번, 근소한 점수 차로 떨어진 세 번의 도전 끝에 그는 2019년 감정평가사 시험 합격자 181명에 이름을 올렸다.
오케스트라 단원에 도전
요즘 최씨는 친구들 사이에서 ‘희망 전도사’가 됐다. 최고령 감정평가사 시험 합격자가 된 비결을 묻는 지인들의 연락이 쇄도하고 있다. 최씨는 “‘65세는 하던 일을 접는 나이’인 줄 알았던 친구들이 나를 보며 생각이 바뀌는 모양”이라며 “국정원 때 동기는 최근 법무사 준비에 들어갔고, 변호사를 하는 대학 동기들도 법정 등 현장에 다시 나간다”고 말했다.
최씨는 최근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지난해부터 배우고 있는 첼로 실력을 키워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는 것이다. 어린이병원 등을 다니며 재능기부를 하는 게 목표다. 꿈을 이루면 다시 새로운 목표를 세워 또 도전할 생각이다.
최씨는 “공부가 아니어도 좋으니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끈기 있게 도전한다면 누구나 퇴직하고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며 “수십 년 일했던 ‘가락’이 있는데 못할 게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
폐결핵 앓다 26세 대학 입학
최씨는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했다. 대입 검정고시를 거치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1977년 건국대 법대에 진학했고 졸업한 지 2년 후인 1984년 제28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서울시를 거쳐 국가정보원에서 20년 이상 일했고 1급 관리관인 실장까지 올랐다. 국정원 재직 당시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로 참여했다. 이후 한국중부발전과 국가안보전략원 등에서 이사로 근무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쉽게 이뤄낸 적이 없었다. 그는 경남 통영에서 4남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만 다섯 남매 중 유일하게 부산 동아고로 ‘유학’을 갔다.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을 코앞에 둔 3학년 2학기에 폐결핵에 걸렸다. 병이 낫지 않아 자퇴를 했고 3년을 앓았다. 이후 대입 검정고시를 치르고, 군대를 다녀온 뒤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는 26세였다.
법대를 나왔지만 사법고시가 아니라 행정고시를 본 것도 현실 때문이었다. “법조인이 되고 싶었지만 사시는 수험 준비 기간이 긴데 학비를 겨우 내는 상황에서 빨리 취직하는 게 중요했다”고 그는 말했다. 쉽지 않았지만 매 순간 도전하며 살아온 경험은 최씨에게 뼈와 살이 됐다. 퇴직 후 감정평가사 시험에 뛰어들 용기는 고난을 이기며 공부했던 젊은 시절에서 나왔다는 설명이다.
독서실에서 하루 12시간씩 공부
처음 퇴직했을 때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밤잠을 설치게 했던 업무, 일상이던 주말 근무가 사라졌다. 친구들과 등산을 가고 골프도 쳤다. 하지만 2년을 채 못 갔다. 앞으로 30년을 이렇게 살아야 하나 고민이 됐다. “나이에 상관없이 일할 수 있다더라”는 아내의 말에 감정평가사 시험에 도전한 것도 그래서다.
이후 이어진 6년간의 수험 생활은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토익 점수는 부족했고 보고서에 익숙해진 눈으로 긴 지문을 읽기는 힘들었다. 건강도 다시 발목을 잡았다. 그는 수험 생활 중 패혈증에 걸려 8개월을 앓았다. 의사는 치사율이 50%라고 했다. 가족과 친구들은 “공부를 그만두라”고 말렸다.
그래도 최씨는 “포기할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하루 12시간을 서울 신림동 독서실에서 공부했다. 이후에는 집 근처 시립도서관에 갔다. 똑같은 문제집을 세 번 넘게 풀며 달달 외웠다. 과락 두 번, 근소한 점수 차로 떨어진 세 번의 도전 끝에 그는 2019년 감정평가사 시험 합격자 181명에 이름을 올렸다.
오케스트라 단원에 도전
요즘 최씨는 친구들 사이에서 ‘희망 전도사’가 됐다. 최고령 감정평가사 시험 합격자가 된 비결을 묻는 지인들의 연락이 쇄도하고 있다. 최씨는 “‘65세는 하던 일을 접는 나이’인 줄 알았던 친구들이 나를 보며 생각이 바뀌는 모양”이라며 “국정원 때 동기는 최근 법무사 준비에 들어갔고, 변호사를 하는 대학 동기들도 법정 등 현장에 다시 나간다”고 말했다.
최씨는 최근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지난해부터 배우고 있는 첼로 실력을 키워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는 것이다. 어린이병원 등을 다니며 재능기부를 하는 게 목표다. 꿈을 이루면 다시 새로운 목표를 세워 또 도전할 생각이다.
최씨는 “공부가 아니어도 좋으니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끈기 있게 도전한다면 누구나 퇴직하고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며 “수십 년 일했던 ‘가락’이 있는데 못할 게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