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of the week] '인플레이션의 천적'이었던 폴 볼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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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B 테일러 스탠퍼드대 경제학과 교수
경제사 노선 바꾼 거물의 퇴장
"금리를 결정하는 것은 시장"
여전히 변화가 필요한 美 경제
경제사 노선 바꾼 거물의 퇴장
"금리를 결정하는 것은 시장"
여전히 변화가 필요한 美 경제
경제사의 노선을 크게 바꾼 폴 볼커가 최근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에 임명됐고 1983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재임명됐다. 그러나 정책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Fed 의장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70년에 걸친 그의 공직 경력을 보면 닉슨 행정부에서 국제통화 담당 재무부 차관을 지냈고,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던 2008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해결 방안을 조언했다.
큰 시가가 트레이드마크였던 볼커는 20세기 후반 미국 정부에서 가장 화려한 업적을 쌓은 인물 중 한 명이었다. 1949년 프린스턴대 졸업식 후 그는 일을 어떻게 해낼 수 있는지 일찍 배웠다.
볼커는 1971년 8월 캠프 데이비드 회의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임금과 물가를 통제하고, 금본위제를 없애도록 조언했다. 그 회의 직후 조지 슐츠 재무장관은 볼커에게 통화체제를 바로잡자고 했다.
‘융통성 있는 환율’에 대한 밀턴 프리드먼의 믿음이 그 계획의 일부였다. 즉, 무역적자가 있을 때 통화가치가 하락하도록 하고, 흑자가 났을 때는 통화가치가 상승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접근법은 효과가 있었고, 국제통화체제는 회복의 길을 가게 됐다. 경제사의 한 방향이 바뀐 장면이다.
카터 대통령이 1970년대 후반 볼커에게 준 임무는 훨씬 더 중요하고 어려웠다. 1970년대에는 오일 쇼크 등으로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이 치솟고 경제 성장률이 떨어졌다. 1979년 여름 볼커가 Fed를 맡았을 때의 경제 상황이었다.
금융시장은 그의 임명을 환영했다. 볼커의 재무부 경험은 잘 알려져 있었고, 그는 인플레이션을 낮추길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통화정책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 그것을 증명해냈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1979년 9월 18일 그는 비교적 작은 폭으로 금리를 인상해 Fed 동료들로부터 통화정책을 바꾸기로 한 결정에 대한 지지를 가까스로 받아냈다. 이는 그가 과연 Fed의 인플레이션 정책을 바꿀 수 있을지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자신감을 잃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재무부에서의 경험을 되새기며 Fed 동료들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완전히 새로운 통화정책을 고안했다. 할인율을 100bp(1bp=0.01%p) 올리고 은행에 새로운 적립 요건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통화 공급을 강조하는 금리 설정 절차를 새로 마련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그의 새로운 정책은 설득력이 있었다. Fed는 새로운 정책을 만장일치로 승인했고 1979년 10월 6일 발표했다. 통화 공급에 중점을 두면서 볼커는 “금리를 결정하는 것은 시장”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가 바랐던 것처럼 금리가 더 높게 올라가도록 할 수 있었다. 1981년 연방기금 금리는 연 20%에 달했다.
1980년대 초 볼커와 예일대 출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토빈의 공개되지 않은 대화에서 토빈은 볼커에게 금리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볼커는 이렇게 답했다. “Fed는 금리를 정하지 않았다. 시장이 정했다.”
금리가 오르면 경기가 둔화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볼커는 대단한 용기를 낸 것이다. 건설 인부들은 그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고, 농부들의 원성도 커졌다. 하지만 볼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도대체 언제까지 인플레이션과 싸울 것이냐는 질문을 받자 “인플레와의 전쟁을 끝낼 때까지 멈출 수 없다”고 간단히 대답했다.
볼커는 레이건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고 그의 노력은 성과를 거뒀다. 인플레이션이 급격히 하락해 강력한 경제 성장을 위한 여건을 조성했다. 그의 후임자인 앨런 그린스펀 의장도 볼커처럼 인플레이션을 낮게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볼커는 1980년대 초반 인플레이션을 저하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마땅하다. 그는 이후 자주 정부에 불려갔다. 그는 세계은행과 유엔의 이라크 석유식량계획과 같은 일을 도왔다. 특히 그는 세계 금융위기의 원인을 따져보면서 자본 증가와 소유권 거래를 줄이는 ‘볼커 룰’을 주장했다.
그는 또 2009년 스탠퍼드대 학회에서 “현재 제로금리는 필요하겠지만 투기 과열 확산 측면에서 위험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외부 고문이 돼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 경제는 여전히 변화가 필요하다. 세금과 규제개혁에도 불구하고 연방 적자는 여전히 크고 연방 부채는 증가하고 있다. 그 대답은 볼커의 시대 때와 마찬가지로 간단하다. 건전하고 예측 가능한 예산정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볼커가 내놓은 정책들은 올바른 길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좋은 경제학은 좋은 정책으로 이어져 좋은 결과를 낳는다.
원제=Paul Volcker Was Inflation’s Worst Enemy
정리=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
THE WALL STREET JOURNAL 한경 독점제휴
큰 시가가 트레이드마크였던 볼커는 20세기 후반 미국 정부에서 가장 화려한 업적을 쌓은 인물 중 한 명이었다. 1949년 프린스턴대 졸업식 후 그는 일을 어떻게 해낼 수 있는지 일찍 배웠다.
볼커는 1971년 8월 캠프 데이비드 회의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임금과 물가를 통제하고, 금본위제를 없애도록 조언했다. 그 회의 직후 조지 슐츠 재무장관은 볼커에게 통화체제를 바로잡자고 했다.
‘융통성 있는 환율’에 대한 밀턴 프리드먼의 믿음이 그 계획의 일부였다. 즉, 무역적자가 있을 때 통화가치가 하락하도록 하고, 흑자가 났을 때는 통화가치가 상승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접근법은 효과가 있었고, 국제통화체제는 회복의 길을 가게 됐다. 경제사의 한 방향이 바뀐 장면이다.
카터 대통령이 1970년대 후반 볼커에게 준 임무는 훨씬 더 중요하고 어려웠다. 1970년대에는 오일 쇼크 등으로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이 치솟고 경제 성장률이 떨어졌다. 1979년 여름 볼커가 Fed를 맡았을 때의 경제 상황이었다.
금융시장은 그의 임명을 환영했다. 볼커의 재무부 경험은 잘 알려져 있었고, 그는 인플레이션을 낮추길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통화정책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 그것을 증명해냈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1979년 9월 18일 그는 비교적 작은 폭으로 금리를 인상해 Fed 동료들로부터 통화정책을 바꾸기로 한 결정에 대한 지지를 가까스로 받아냈다. 이는 그가 과연 Fed의 인플레이션 정책을 바꿀 수 있을지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자신감을 잃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재무부에서의 경험을 되새기며 Fed 동료들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완전히 새로운 통화정책을 고안했다. 할인율을 100bp(1bp=0.01%p) 올리고 은행에 새로운 적립 요건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통화 공급을 강조하는 금리 설정 절차를 새로 마련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그의 새로운 정책은 설득력이 있었다. Fed는 새로운 정책을 만장일치로 승인했고 1979년 10월 6일 발표했다. 통화 공급에 중점을 두면서 볼커는 “금리를 결정하는 것은 시장”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가 바랐던 것처럼 금리가 더 높게 올라가도록 할 수 있었다. 1981년 연방기금 금리는 연 20%에 달했다.
1980년대 초 볼커와 예일대 출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토빈의 공개되지 않은 대화에서 토빈은 볼커에게 금리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볼커는 이렇게 답했다. “Fed는 금리를 정하지 않았다. 시장이 정했다.”
금리가 오르면 경기가 둔화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볼커는 대단한 용기를 낸 것이다. 건설 인부들은 그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고, 농부들의 원성도 커졌다. 하지만 볼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도대체 언제까지 인플레이션과 싸울 것이냐는 질문을 받자 “인플레와의 전쟁을 끝낼 때까지 멈출 수 없다”고 간단히 대답했다.
볼커는 레이건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고 그의 노력은 성과를 거뒀다. 인플레이션이 급격히 하락해 강력한 경제 성장을 위한 여건을 조성했다. 그의 후임자인 앨런 그린스펀 의장도 볼커처럼 인플레이션을 낮게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볼커는 1980년대 초반 인플레이션을 저하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마땅하다. 그는 이후 자주 정부에 불려갔다. 그는 세계은행과 유엔의 이라크 석유식량계획과 같은 일을 도왔다. 특히 그는 세계 금융위기의 원인을 따져보면서 자본 증가와 소유권 거래를 줄이는 ‘볼커 룰’을 주장했다.
그는 또 2009년 스탠퍼드대 학회에서 “현재 제로금리는 필요하겠지만 투기 과열 확산 측면에서 위험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외부 고문이 돼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 경제는 여전히 변화가 필요하다. 세금과 규제개혁에도 불구하고 연방 적자는 여전히 크고 연방 부채는 증가하고 있다. 그 대답은 볼커의 시대 때와 마찬가지로 간단하다. 건전하고 예측 가능한 예산정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볼커가 내놓은 정책들은 올바른 길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좋은 경제학은 좋은 정책으로 이어져 좋은 결과를 낳는다.
원제=Paul Volcker Was Inflation’s Worst Enemy
정리=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
THE WALL STREET JOURNAL 한경 독점제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