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만찬] 9급 서기보에서 교육부 차관까지…"늑막염으로 고등학교 4년 다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이기우 전 전문대교협 회장
‘한 길을 걸어왔다’라는 표현은 이기우 전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회장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그은 고졸 9급(거제교육청)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부) 차관 그리고 인천재능대 총장까지 오직 교육 분야에서 한 길을 걸어왔다. 2006년부터는 인천재능대 총장을 맡아 4번 연임했고, 전문대교협 회장도 네 차례나 맡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 학령인구 감소 등 변화의 시기에 전문대학의 역할을 다시금 강조한 이 전 회장을 만났다.
▶회장님의 학창 시절이 궁금합니다. 어떤 학생이셨는지요.
“저의 학창시절은 희망보다는 좌절이 많았습니다. 거제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그나마 공부는 잘한 덕분에 부산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심각한 병인 결핵성 늑막염에 걸려 1년을 휴학했습니다. 고향에 내려가서 병치료하는 동안 동네에 있는 책이란 책은 다 빌려다 읽었죠. 이 때 무작정 읽은 책들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자양분이 됐어요. 다시 2학년으로 복학했지만 공부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친구네 집 다락방에 기거하며 혼자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상의할 어른도 없었고요. 또 막상 공부를 하려 해도 신경을 써줄 만한 가족이 멀리 떨어져 있어, 늑막염이 언제 재발할지 몰라 공부 자체가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대학 준비는커녕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졸업을 맞아 남들이 다 대학을 간다니까 엉겁결에 원서나 써보자는 마음으로 꼭 어느 대학 가겠다는 목표도 없이 시험을 치렀습니다. 물론 대입에 실패했습니다.”
▶대입 실패 후 어떤 길을 택하신 건가요.
“대학 시험에서 떨어진 후 부산 남구 대연동 우체국 서기보로 들어갔습니다. 돈을 모아서 입시 준비를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공무원을 준비하는 친구를 우연히 만나 시험을 봤다가 덜컥 합격해 버렸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우연히 공직에 입문하게 된 것이지요. 당시 저는 이것이 제 일이 아닌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첫 공직은 교육 분야가 아니셨네요. 교육 분야에 첫발을 내디딘 계기는 무엇인가요.
“고향에서 일하며 재수하려고 다시 시험을 쳐 거제교육청 서기보로 옮겼습니다. 이때가 처음으로 교육 분야 일을 하게 된 시점입니다. 처음 거제교육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도 ‘빨리 돈 벌어서 대학 가야지’하는 생각으로 일은 뒷전이었습니다. 그러니 일을 제대로 배우고 또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출근을 했더니 제 자리가 없는 겁니다. 그때 제 상사가 제 책상을 밖으로 치우고 시설계로 보냈습니다. 3개월 동안 먹지로 글을 베끼는 작업만 시키는데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기왕에 할 일이라면 제대로 해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자’라는 결심으로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서무계로 원위치 되었지요.”
▶상당히 일을 열심히 하셨나 봅니다.
“대학입시에 대한 생각을 접고 나서부터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아니, 생각이 안 났다는 것이 정답이겠네요. 왜냐하면, 일하는 재미에 푹 빠졌기 때문입니다. 공직생활에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마음먹으니 대입 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승진점수도 좋았고, 사무관 승진시험도 단번에 붙었습니다. 거제교육청, 경상남도 교육청을 거쳐 문교부 서무계장으로까지 승진, 발탁되었습니다. 참 열심히 일했습니다. 일하는 재미에 빠져 대학에 진학해야겠다는 생각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때, 문교부 정희재 차관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격려로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에 공부하면서 현재의 안양대학교(당시 대한신학대학교), 부산대학교 석사, 경성대학교 박사과정까지 마치게 되었습니다. 잊었던 꿈, 학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신 참 고마우신 분입니다.”
▶일과 학습을 병행하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재직하면서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에 공부하면서 대학을 다닌 것이지요. 그래서 일반적인 대학생활의 낭만은 다른 세계의 일이었습니다. 다만, 공부에 대한 미련이 매우 커서 이것저것 많이 듣고 보며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참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이 공부를 통해서 특별히 무엇이 되어야지 하는 것보다 그냥 책을 보고 공부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해서, 일과 학습을 병행했기 때문에 저 개인적인 시간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보람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때의 노력과 열정, 습관이 현재 저를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학창시절 꿈은 무엇이셨는지요.
“실제로 저는 많은 강연을 다니면서 ‘꿈’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꿈을 가져야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 꿈이 현실이 될 터이니 말이죠. 그런데 정작 저는 꿈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해서야 되겠느냐는 말도 있던데, 너무 가난하면 꿈조차 사치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저는 거제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공부밖에 모르고 살았던 학생이었습니다. 나중에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것보다는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적인 문제가 늘 우선이었지요.”
▶힘든 시절, 좋은 영향을 준 멘토가 있으신지요.
“사람마다 기억나는 은사님이 있겠지만, 저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사님이 두 분 계십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꿈을 꾸고 실현하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셨던 중학교 1학년 때 이명걸 선생님과 중학교 3학년 때 김영진 선생님입니다. 이명걸 선생님은 저에게 ‘기우야! 너, 부산고 가라’고 처음으로 말해주신 분입니다. 저는 중 1 첫 반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학년 일등을 놓친 적이 없었고, 졸업할 때까지 3년 내내 수업료와 기성회비 모두를 면제받았습니다. 졸업 때까지 돈 한 푼 안 내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거제도에서 나고 자란 저에게는 이명걸 선생님의 그 말씀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일깨워 주었고, 부산이라는 큰 도시로 나가서 꿈을 펼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다른 한 분은 어떤 영향을 주셨나요.
“중학교 3학년 김영진 선생님은 제게 지속해서 용기를 주신 분입니다. 고등학교 원서를 써야 할 때가 되었을 때, 담임이셨던 김영진 선생님은 흔쾌히 부산고 원서를 써 주셨고 제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넌 반드시 합격한다. 걱정하지 말고 마무리 잘해라. 그리고 앞으로 좋은 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 넌 충분히 가능해.’ 그해 거제도 11개 중학교에서 32명이 부산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쳤는데, 저 혼자만 붙었습니다.
지금 제가 대학의 총장으로 학생들을 대하는 자세는 바로 이 두 분 선생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러나 따라가려 해도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자들을 대할 때 선생님들이 보여주셨던 조건 없는 사랑과 헌신,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선한 믿음은 지금도 제가 귀하게 생각하는 덕목이 되었습니다.”
▶학창 시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그 시절을 떠올리면 늘 배가 고팠던 기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시절 어렵지 않은 집이 얼마나 있었을까 싶지만, 우리 집은 유독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쌀밥을 원 없이 먹어 보는 게 소원이던 시절.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 제삿날이었습니다. 제삿날에는 그래도 쌀밥과 기름진 음식이 제사상에 올라가고 생선에 전이라도 이웃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늘 어느 집에 제사가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웠고, ‘느그 집 기제가 언제드노?’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 부모님이 해주셨던 음식들이 무척 그립습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어머니는 아들 영양보충을 위해 가끔 대접에 달걀을 하나 깨서 풀고 거기다 참기름을 넣어 휘휘 저어 주셨는데 정말 별미 중의 별미였습니다. 달걀과 참기름이 뒤섞인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부모님에 대한 애정이 컸나 봅니다.
“아버지는 체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힘이 장사셨고, 애주가로 술 좋아하는 친구분들과 흥겹게 자주 어울리셨지만, 자식들에게는 애정 어린 표현을 하시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유일하게 제게 해주신 음식이 하나 있는데, 결핵성 늑막염으로 거제도 집에 내려와 쉬고 있을 때 결핵에는 개가 좋다고 황구 한 마리를 사 오셔서 한약재를 넣어 푹 고아 주셨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개소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얼핏 잠을 깨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버지께서 ‘저놈의 자식이 내 반만 닮아도 몸이 좋을 건데’하고 저를 두고 넋두리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버지의 정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바람이 전해졌는지 어렸을 때는 병약했던 제가 지금은 어디 가도 체력만큼은 자신 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이 나이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으니 아버지에게 아주 큰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지요.”
▶전문대교협 회장을 오랫동안 맡고 계십니다.
“학령인구 감소의 위기와 미래사회를 대비한 대학혁신 과제 도출 등 난제들이 쌓여가는 시기여서 회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더욱 막중해졌습니다. 무엇보다 현재 상황을 전체 전문대학의 긴밀한 협력과 소통을 통한 공고한 연대를 기반으로 전화위복의 초석을 만들어가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봅니다. 지금까지 4차례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전체 전문대학의 의견을 수렴하여 생산적인 대안을 만들었고, 또 이것이 우리 대학 고등직업교육 발전에도 상당히 기여했다고 자부합니다.”
▶인천재능대 총장을 맡으신 시점이 2006년입니다. 어떤 계기로 대학으로 가시게 됐나요.
“교육부 차관을 마무리할 때까지 40여 년을 공직에 있었습니다. 인생 제2막도 교육부에서 오랜 시간 일을 한 덕분에 교육계를 떠나 찾을 수는 없었고, 제 깜냥도 교육계 안에 있었습니다. 당시 적지 않은 4년제 일반 대학에서 총장으로 일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에헴 총장’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리의 크고 적음에 연연해 하지는 않고 다만 일을 제대로 하는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제 능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고, 또 제 손길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는 말이지요. 한국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전문대학과 직업교육이 정당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평소 지론과도 부합했습니다.”
▶4번 총장을 연임하셨습니다. 총장을 맡으신 이후, 인천재능대의 위상도 한층 높아졌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오래 하리라 생각지 못했습니다. 지난 2006년부터 2022년까지 총장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건 큰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배경에는 저의 의지를 옆에서 잘 이해해주고,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히 해 준 인천재능대 구성원들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또 총장을 믿고 대학경영 일체를 나에게 일임해 준 재능학원 이사장의 지지도 중요했고요.
지금은 인천재능대가 정부재정지원사업 9관왕 대학, 수도권 5년 연속 취업률 1위, 송도국제화도시에 최초로 뿌리내린 전문대학 등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오지만, 12년 전 취임할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꼴찌대학’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고 교수와 학생, 학부모들도 자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나 자녀가 인천재능대에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할 정도인 가슴 아픈 모습이었다. 이러한 패배의식을 바꾸고자 끊임없이 고민하며 영업부 대리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습니다. 이런 패배의식을 자긍심으로 바꾸는데 3년여가 걸렸습니다.
어느 날 졸업한 자식을 둔 인천의 한 오피니언 리더가 직접 전화해 자기 아들이 재능대 출신이라고 말하는 걸 보고 그때야 ‘이제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웃음) 저는 학생들에게 죄짓지 말자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를 내기 위한 원동력으로 진실, 성실, 절실의 삼실(三實)의 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일에 진실하고 성실하게 임하며 절실함을 보인다면 이뤄내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좌우명은 무엇인가요.
“제가 등불로 삼는 좌우명이 몇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하루가 인생 전부다’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나’를 방해하는 ‘과거의 나’는 철저히 죽이고,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서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세포도 주인인 내가 최상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더욱 분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삶, 내게 주어진 기회에 정성을 다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니 저에겐 언제나 오늘 하루가 가장 소중합니다. ‘하루살이’라고 할까요. 오늘 이 하루를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으로 생각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제가 조직생활을 하면서 지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하루를 열심히 산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했는데도 성과가 예상처럼 나오지 않았을 경우, 예전의 나를 빨리 정리하는 방법에도 있었습니다. 필요하다면 예전의 나를 철저히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청년들에게 한마디 부탁합니다.
“대한민국의 희망찬 내일을 책임지고 이끌어나갈 청춘들에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됐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일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를 훨씬 더 가치 있게 평가하는 사회가 도래할 것입니다.
워렌 버핏은 ‘이 세상에 성공적인 직업과 그렇지 않은 직업은 없다. 성공적인 직업인과 그렇지 못한 직업인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미래사회를 주도할 키워드는 학벌이나 학력이 아닌 능력입니다. 아울러 인생 이모작 시대에는 자신이 신명을 다해 지속해서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하여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꾸준히 축적하여 자신만의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 즉, ‘극적으로 변화되는 순간’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의 적성과 흥미, 꿈과 끼입니다. 이것을 무시한 선택은 후회와 퇴보를 남깁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무엇을 가장 즐겁게 잘할 수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고, 이를 평생의 밑천으로 삼길 바랍니다.”
잡앤조이=이진호 기자 jinho2323@hankyung.com
▶회장님의 학창 시절이 궁금합니다. 어떤 학생이셨는지요.
“저의 학창시절은 희망보다는 좌절이 많았습니다. 거제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그나마 공부는 잘한 덕분에 부산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심각한 병인 결핵성 늑막염에 걸려 1년을 휴학했습니다. 고향에 내려가서 병치료하는 동안 동네에 있는 책이란 책은 다 빌려다 읽었죠. 이 때 무작정 읽은 책들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자양분이 됐어요. 다시 2학년으로 복학했지만 공부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친구네 집 다락방에 기거하며 혼자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상의할 어른도 없었고요. 또 막상 공부를 하려 해도 신경을 써줄 만한 가족이 멀리 떨어져 있어, 늑막염이 언제 재발할지 몰라 공부 자체가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대학 준비는커녕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졸업을 맞아 남들이 다 대학을 간다니까 엉겁결에 원서나 써보자는 마음으로 꼭 어느 대학 가겠다는 목표도 없이 시험을 치렀습니다. 물론 대입에 실패했습니다.”
▶대입 실패 후 어떤 길을 택하신 건가요.
“대학 시험에서 떨어진 후 부산 남구 대연동 우체국 서기보로 들어갔습니다. 돈을 모아서 입시 준비를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공무원을 준비하는 친구를 우연히 만나 시험을 봤다가 덜컥 합격해 버렸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우연히 공직에 입문하게 된 것이지요. 당시 저는 이것이 제 일이 아닌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첫 공직은 교육 분야가 아니셨네요. 교육 분야에 첫발을 내디딘 계기는 무엇인가요.
“고향에서 일하며 재수하려고 다시 시험을 쳐 거제교육청 서기보로 옮겼습니다. 이때가 처음으로 교육 분야 일을 하게 된 시점입니다. 처음 거제교육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도 ‘빨리 돈 벌어서 대학 가야지’하는 생각으로 일은 뒷전이었습니다. 그러니 일을 제대로 배우고 또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출근을 했더니 제 자리가 없는 겁니다. 그때 제 상사가 제 책상을 밖으로 치우고 시설계로 보냈습니다. 3개월 동안 먹지로 글을 베끼는 작업만 시키는데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기왕에 할 일이라면 제대로 해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자’라는 결심으로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서무계로 원위치 되었지요.”
▶상당히 일을 열심히 하셨나 봅니다.
“대학입시에 대한 생각을 접고 나서부터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아니, 생각이 안 났다는 것이 정답이겠네요. 왜냐하면, 일하는 재미에 푹 빠졌기 때문입니다. 공직생활에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마음먹으니 대입 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승진점수도 좋았고, 사무관 승진시험도 단번에 붙었습니다. 거제교육청, 경상남도 교육청을 거쳐 문교부 서무계장으로까지 승진, 발탁되었습니다. 참 열심히 일했습니다. 일하는 재미에 빠져 대학에 진학해야겠다는 생각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때, 문교부 정희재 차관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격려로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에 공부하면서 현재의 안양대학교(당시 대한신학대학교), 부산대학교 석사, 경성대학교 박사과정까지 마치게 되었습니다. 잊었던 꿈, 학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신 참 고마우신 분입니다.”
▶일과 학습을 병행하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재직하면서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에 공부하면서 대학을 다닌 것이지요. 그래서 일반적인 대학생활의 낭만은 다른 세계의 일이었습니다. 다만, 공부에 대한 미련이 매우 커서 이것저것 많이 듣고 보며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참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이 공부를 통해서 특별히 무엇이 되어야지 하는 것보다 그냥 책을 보고 공부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해서, 일과 학습을 병행했기 때문에 저 개인적인 시간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보람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때의 노력과 열정, 습관이 현재 저를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학창시절 꿈은 무엇이셨는지요.
“실제로 저는 많은 강연을 다니면서 ‘꿈’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꿈을 가져야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 꿈이 현실이 될 터이니 말이죠. 그런데 정작 저는 꿈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해서야 되겠느냐는 말도 있던데, 너무 가난하면 꿈조차 사치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저는 거제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공부밖에 모르고 살았던 학생이었습니다. 나중에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것보다는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적인 문제가 늘 우선이었지요.”
▶힘든 시절, 좋은 영향을 준 멘토가 있으신지요.
“사람마다 기억나는 은사님이 있겠지만, 저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사님이 두 분 계십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꿈을 꾸고 실현하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셨던 중학교 1학년 때 이명걸 선생님과 중학교 3학년 때 김영진 선생님입니다. 이명걸 선생님은 저에게 ‘기우야! 너, 부산고 가라’고 처음으로 말해주신 분입니다. 저는 중 1 첫 반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학년 일등을 놓친 적이 없었고, 졸업할 때까지 3년 내내 수업료와 기성회비 모두를 면제받았습니다. 졸업 때까지 돈 한 푼 안 내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거제도에서 나고 자란 저에게는 이명걸 선생님의 그 말씀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일깨워 주었고, 부산이라는 큰 도시로 나가서 꿈을 펼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다른 한 분은 어떤 영향을 주셨나요.
“중학교 3학년 김영진 선생님은 제게 지속해서 용기를 주신 분입니다. 고등학교 원서를 써야 할 때가 되었을 때, 담임이셨던 김영진 선생님은 흔쾌히 부산고 원서를 써 주셨고 제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넌 반드시 합격한다. 걱정하지 말고 마무리 잘해라. 그리고 앞으로 좋은 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 넌 충분히 가능해.’ 그해 거제도 11개 중학교에서 32명이 부산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쳤는데, 저 혼자만 붙었습니다.
지금 제가 대학의 총장으로 학생들을 대하는 자세는 바로 이 두 분 선생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러나 따라가려 해도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자들을 대할 때 선생님들이 보여주셨던 조건 없는 사랑과 헌신,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선한 믿음은 지금도 제가 귀하게 생각하는 덕목이 되었습니다.”
▶학창 시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그 시절을 떠올리면 늘 배가 고팠던 기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시절 어렵지 않은 집이 얼마나 있었을까 싶지만, 우리 집은 유독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쌀밥을 원 없이 먹어 보는 게 소원이던 시절.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 제삿날이었습니다. 제삿날에는 그래도 쌀밥과 기름진 음식이 제사상에 올라가고 생선에 전이라도 이웃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늘 어느 집에 제사가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웠고, ‘느그 집 기제가 언제드노?’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 부모님이 해주셨던 음식들이 무척 그립습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어머니는 아들 영양보충을 위해 가끔 대접에 달걀을 하나 깨서 풀고 거기다 참기름을 넣어 휘휘 저어 주셨는데 정말 별미 중의 별미였습니다. 달걀과 참기름이 뒤섞인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부모님에 대한 애정이 컸나 봅니다.
“아버지는 체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힘이 장사셨고, 애주가로 술 좋아하는 친구분들과 흥겹게 자주 어울리셨지만, 자식들에게는 애정 어린 표현을 하시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유일하게 제게 해주신 음식이 하나 있는데, 결핵성 늑막염으로 거제도 집에 내려와 쉬고 있을 때 결핵에는 개가 좋다고 황구 한 마리를 사 오셔서 한약재를 넣어 푹 고아 주셨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개소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얼핏 잠을 깨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버지께서 ‘저놈의 자식이 내 반만 닮아도 몸이 좋을 건데’하고 저를 두고 넋두리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버지의 정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바람이 전해졌는지 어렸을 때는 병약했던 제가 지금은 어디 가도 체력만큼은 자신 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이 나이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으니 아버지에게 아주 큰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지요.”
▶전문대교협 회장을 오랫동안 맡고 계십니다.
“학령인구 감소의 위기와 미래사회를 대비한 대학혁신 과제 도출 등 난제들이 쌓여가는 시기여서 회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더욱 막중해졌습니다. 무엇보다 현재 상황을 전체 전문대학의 긴밀한 협력과 소통을 통한 공고한 연대를 기반으로 전화위복의 초석을 만들어가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봅니다. 지금까지 4차례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전체 전문대학의 의견을 수렴하여 생산적인 대안을 만들었고, 또 이것이 우리 대학 고등직업교육 발전에도 상당히 기여했다고 자부합니다.”
▶인천재능대 총장을 맡으신 시점이 2006년입니다. 어떤 계기로 대학으로 가시게 됐나요.
“교육부 차관을 마무리할 때까지 40여 년을 공직에 있었습니다. 인생 제2막도 교육부에서 오랜 시간 일을 한 덕분에 교육계를 떠나 찾을 수는 없었고, 제 깜냥도 교육계 안에 있었습니다. 당시 적지 않은 4년제 일반 대학에서 총장으로 일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에헴 총장’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리의 크고 적음에 연연해 하지는 않고 다만 일을 제대로 하는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제 능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고, 또 제 손길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는 말이지요. 한국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전문대학과 직업교육이 정당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평소 지론과도 부합했습니다.”
▶4번 총장을 연임하셨습니다. 총장을 맡으신 이후, 인천재능대의 위상도 한층 높아졌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오래 하리라 생각지 못했습니다. 지난 2006년부터 2022년까지 총장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건 큰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배경에는 저의 의지를 옆에서 잘 이해해주고,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히 해 준 인천재능대 구성원들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또 총장을 믿고 대학경영 일체를 나에게 일임해 준 재능학원 이사장의 지지도 중요했고요.
지금은 인천재능대가 정부재정지원사업 9관왕 대학, 수도권 5년 연속 취업률 1위, 송도국제화도시에 최초로 뿌리내린 전문대학 등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오지만, 12년 전 취임할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꼴찌대학’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고 교수와 학생, 학부모들도 자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나 자녀가 인천재능대에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할 정도인 가슴 아픈 모습이었다. 이러한 패배의식을 바꾸고자 끊임없이 고민하며 영업부 대리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습니다. 이런 패배의식을 자긍심으로 바꾸는데 3년여가 걸렸습니다.
어느 날 졸업한 자식을 둔 인천의 한 오피니언 리더가 직접 전화해 자기 아들이 재능대 출신이라고 말하는 걸 보고 그때야 ‘이제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웃음) 저는 학생들에게 죄짓지 말자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를 내기 위한 원동력으로 진실, 성실, 절실의 삼실(三實)의 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일에 진실하고 성실하게 임하며 절실함을 보인다면 이뤄내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좌우명은 무엇인가요.
“제가 등불로 삼는 좌우명이 몇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하루가 인생 전부다’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나’를 방해하는 ‘과거의 나’는 철저히 죽이고,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서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세포도 주인인 내가 최상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더욱 분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삶, 내게 주어진 기회에 정성을 다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니 저에겐 언제나 오늘 하루가 가장 소중합니다. ‘하루살이’라고 할까요. 오늘 이 하루를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으로 생각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제가 조직생활을 하면서 지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하루를 열심히 산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했는데도 성과가 예상처럼 나오지 않았을 경우, 예전의 나를 빨리 정리하는 방법에도 있었습니다. 필요하다면 예전의 나를 철저히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청년들에게 한마디 부탁합니다.
“대한민국의 희망찬 내일을 책임지고 이끌어나갈 청춘들에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됐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일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를 훨씬 더 가치 있게 평가하는 사회가 도래할 것입니다.
워렌 버핏은 ‘이 세상에 성공적인 직업과 그렇지 않은 직업은 없다. 성공적인 직업인과 그렇지 못한 직업인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미래사회를 주도할 키워드는 학벌이나 학력이 아닌 능력입니다. 아울러 인생 이모작 시대에는 자신이 신명을 다해 지속해서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하여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꾸준히 축적하여 자신만의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 즉, ‘극적으로 변화되는 순간’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의 적성과 흥미, 꿈과 끼입니다. 이것을 무시한 선택은 후회와 퇴보를 남깁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무엇을 가장 즐겁게 잘할 수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고, 이를 평생의 밑천으로 삼길 바랍니다.”
잡앤조이=이진호 기자 jinho23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