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만찬] "사업 망하고 한강 3번 찾아갔지만 포기하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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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짱으로 망한 사업 밸롭으로 키운
3전 4기의 손대원 지티에스글로벌 대표
3전 4기의 손대원 지티에스글로벌 대표
“학창시절에 어땠냐고요? 음…장난을 좋아하는 모범생이었어요.(웃음) 공부도 곧잘 했고요. 그때가 30년도 더 지난 일이라 기억이…. 아, 고 3때 학도호국단장도 했어요. 그땐 지금 같지 않게 목소리도 크고 호탕했거든요. 그날이 그립네요.(웃음)”
아쿠아 슈즈 브랜드 ‘밸롭’을 전개하고 있는 손대원 지티에스글로벌 대표는 인터뷰 내내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연신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에게나 학창시절의 추억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치열한 세상 속에서 생존을 놓고 순간순간의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하는 CEO들에게도 순수했던 학창시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아직도 기억에 남는 사건 하나
성남서고(現 성남고) 12회 졸업생인 손 대표는 학창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 있는 친구로 통했다. 공부도 운동도 곧잘 했던 손 대표는 고 3때 학도호국단장을 맡을 정도로 리더십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친구들이나 선생님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어요. 고 2땐가 성적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는데, 그때 부모님께서 이혼을 하셨어요. 당시엔 어리기도 했고, 힘들어서 마음을 못 잡다가 가출을 해 버렸지요.”
이렇다 할 고비 없이 보낸 손 대표의 학창시절 가운데 가출은 큰 사건이었다. 일주일 동안 친구 집을 전전하다 다시 집으로 들어간 그를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받아준 건 아버지였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안함에 그는 고 3이 되면서 머리를 삭발하고 공부에 전념해 경기대 무역학과에 진학했다. “그때만 해도 교복이 없어지고 두발과 복장이 자율이었거든요. 다들 머리 기르는데, 저만 머리를 빡빡 깎고 학교에 가니 선생님께서 ‘반항하냐’며 혼내기도 하셨죠.(웃음)”
◆원단 가공 사업가 아버지를 따라 사회 첫 발
손 대표가 어릴 적부터 그의 아버지는 원단 가공 사업을 해왔다. 그 역시 어릴 적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운 원단가공 사업이 몸에 베여서인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지나고 돌아온 곳도 패션업계였다. “아버지께서 30년 넘게 원단 주름을 잡는 기계 주름 사업을 하셨어요. 올해 일흔 아홉이신데 아직도 하고 계시니까요. 제가 대학 2학년 때부터인가 아버지 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면서 주경야독을 실천했죠.(웃음)”
당시 이대, 동대문 일대 업체들을 대상으로 가공 원단을 납품하던 ‘행원주름’을 모르는 이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원단 시장이 호시절이었기에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는 건 손 대표의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하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 일을 돕던 손 대표가 무리하게 물량을 주문한 것이 불량으로 판명나면서 수천만 원의 빚을 떠안게 됐다. “장사가 잘 되니 앞뒤 구분 안하고 무리하게 주문한 게 불량 판명이 나 불량 원단을 모두 떠안아야 했어요. 그 사건 이후 한 달간 아버지한테 욕을 먹었는데···아이고 도저히 못 하겠다고 나와 버렸어요.”
손 대표는 가업을 뒤로한 채 CD룸을 제작하는 중소기업에 입사했다. 이어 몇 번의 이직을 거친 뒤 엔터테인먼트 업계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연예 기획사 영업총괄부장으로 활약하면서 연예계 인맥도 넓혔다. 가수 비 월드투어를 진행하면서 그의 명성은 업계에 퍼지기 시작했다. “엔터 업계에서 손 본부장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다 일이 틀어져서 훌훌 털고 떠났죠. 그때부터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어요.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그동안의 인맥을 재산으로 뭐든지 다 팔았어요. 생리대부터 홍삼까지…. 근데 업계를 나와서보니 다 부질없더라고요. 그것도 얼마 못 갔어요. 그러다 문득 신문에서 키 크는 신발에 관련된 기사를 보게 됐어요. 그 길로 부산에 있는 공장으로 달려갔죠.”
◆'키짱'으로 인생의 단맛 쓴맛 보다
우여곡절 끝에 키 크는 신발 브랜드 ‘키짱’의 총판을 인수한 손 대표는 2년 간 전국 20여개 가맹점을 오픈했다. 신발을 신으면 키가 큰다는 슬로건이 엄마들을 자극했다. 전국에 아이를 가진 엄마들이 매장에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였다. 사업 초반임에도 매출은 날이 갈수록 올랐다. 키 크는 신발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면서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키 크는 신발이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손 대표는 하루아침에 큰 타격을 입었다.
“키 크는 신발이 반응이 좋으니까 대형 브랜드에서도 유사한 제품을 만들어서 팔기 시작하더라고요. 정말 열풍이었죠. 그러다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에서 키 크는 신발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됐다고 방송이 나간 거예요. 저희 브랜드를 꼬집어서 한 건 아니었지만 방송 말미에 키짱 로고가 나간 걸 보고 다음날 가맹점주들이 달려왔어요. 장사 못하겠다고 말이죠. 정말 하루아침에 망해버린 거죠.”
그 한 번의 방송이 손 대표의 모든 걸 앗아갔다. 수 십개의 매장은 문을 닫고 사업도 접어야만 했다. 사무실 한 켠에는 재고 물품만 한 가득이었다. 재기 불능상태로 전락한 손 대표는 그 날 이후 1년 간 밤낮없이 술로 지샜다. “한창 잘나가다가 하루아침에 망해버렸으니 막막했죠. 매일 술만 먹고 살았어요. 아내는 아이들을 키워야 하니까 식당, 파출부 할 것 없이 뛰어다녔고요. 재고 상품을 땡 처리 업체한테 헐값으로 넘길 땐 정말 죽고 싶었어요. 실제로 한강도 3번 정도 갔으니까요.”
◆마흔다섯, 재기를 꿈꾸며 도전한 손 대표
2011년 쓴맛 단맛 다 본 손 대표의 나이는 마흔 다섯이었다. 그렇게 좌절하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였다. 그는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아쿠아 슈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하던 신발이 ‘마사이 신발’과 ‘베어풋(barefoot)’ 제품이었는데, 손 대표는 베어풋을 선택했다.
“키짱을 하면서도 다음 아이템을 늘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때 눈여겨 본 스타일이 베어풋 제품이었어요. 신은 듯 안 신은 듯 발에 착 달라붙는 신발이 유행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정리해서 공장으로 보냈죠,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니 어느 정도 신을만한 샘플이 나왔어요. 그리고 연예 기획사에서의 경험을 살려 제안서를 멋지게 만들었죠. 사실 그땐 제안서를 만들면서도 될 거라는 생각은 안했어요.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그래서 패션 브랜드에다가 제안서를 보냈죠. 근데 아레나에서 연락이 온 거죠.(웃음)”
당시 수영복 브랜드에서 전개하는 슈즈 제품은 슬리퍼가 고작이었다. 워터파크나 바닷가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편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아이템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렇게 아레나와 첫 계약을 성사한 손 대표는 이후 타브랜드와의 계약도 순조롭게 이뤄냈다. 여기에 아쿠아 슈즈 브랜드 ‘엑토스’를 론칭하면서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지원하는 자금도 받았다. 말 그대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였다.
“사업을 하면서 참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타이밍이 좋았던 것 같아요. 만약 신제품개발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밸롭도 망했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직원들과 함께 신제품 개발에도 꾸준히 집중하고 있죠. 요즘 청년들이 취업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는데, 밸롭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들도 마찬가지일거예요. 능력보다 인성이 먼저예요. 대부분의 회사는 팀플레이로 일하기 때문에 개인의 능력보다 서로 간의 협업이 중요해요. 좋은 스펙보다 조직에 잘 스며들 수 있는 인성을 먼저 길러보세요.”
잡앤조이=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아쿠아 슈즈 브랜드 ‘밸롭’을 전개하고 있는 손대원 지티에스글로벌 대표는 인터뷰 내내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연신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에게나 학창시절의 추억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치열한 세상 속에서 생존을 놓고 순간순간의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하는 CEO들에게도 순수했던 학창시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아직도 기억에 남는 사건 하나
성남서고(現 성남고) 12회 졸업생인 손 대표는 학창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 있는 친구로 통했다. 공부도 운동도 곧잘 했던 손 대표는 고 3때 학도호국단장을 맡을 정도로 리더십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친구들이나 선생님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어요. 고 2땐가 성적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는데, 그때 부모님께서 이혼을 하셨어요. 당시엔 어리기도 했고, 힘들어서 마음을 못 잡다가 가출을 해 버렸지요.”
이렇다 할 고비 없이 보낸 손 대표의 학창시절 가운데 가출은 큰 사건이었다. 일주일 동안 친구 집을 전전하다 다시 집으로 들어간 그를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받아준 건 아버지였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안함에 그는 고 3이 되면서 머리를 삭발하고 공부에 전념해 경기대 무역학과에 진학했다. “그때만 해도 교복이 없어지고 두발과 복장이 자율이었거든요. 다들 머리 기르는데, 저만 머리를 빡빡 깎고 학교에 가니 선생님께서 ‘반항하냐’며 혼내기도 하셨죠.(웃음)”
◆원단 가공 사업가 아버지를 따라 사회 첫 발
손 대표가 어릴 적부터 그의 아버지는 원단 가공 사업을 해왔다. 그 역시 어릴 적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운 원단가공 사업이 몸에 베여서인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지나고 돌아온 곳도 패션업계였다. “아버지께서 30년 넘게 원단 주름을 잡는 기계 주름 사업을 하셨어요. 올해 일흔 아홉이신데 아직도 하고 계시니까요. 제가 대학 2학년 때부터인가 아버지 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면서 주경야독을 실천했죠.(웃음)”
당시 이대, 동대문 일대 업체들을 대상으로 가공 원단을 납품하던 ‘행원주름’을 모르는 이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원단 시장이 호시절이었기에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는 건 손 대표의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하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 일을 돕던 손 대표가 무리하게 물량을 주문한 것이 불량으로 판명나면서 수천만 원의 빚을 떠안게 됐다. “장사가 잘 되니 앞뒤 구분 안하고 무리하게 주문한 게 불량 판명이 나 불량 원단을 모두 떠안아야 했어요. 그 사건 이후 한 달간 아버지한테 욕을 먹었는데···아이고 도저히 못 하겠다고 나와 버렸어요.”
손 대표는 가업을 뒤로한 채 CD룸을 제작하는 중소기업에 입사했다. 이어 몇 번의 이직을 거친 뒤 엔터테인먼트 업계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연예 기획사 영업총괄부장으로 활약하면서 연예계 인맥도 넓혔다. 가수 비 월드투어를 진행하면서 그의 명성은 업계에 퍼지기 시작했다. “엔터 업계에서 손 본부장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다 일이 틀어져서 훌훌 털고 떠났죠. 그때부터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어요.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그동안의 인맥을 재산으로 뭐든지 다 팔았어요. 생리대부터 홍삼까지…. 근데 업계를 나와서보니 다 부질없더라고요. 그것도 얼마 못 갔어요. 그러다 문득 신문에서 키 크는 신발에 관련된 기사를 보게 됐어요. 그 길로 부산에 있는 공장으로 달려갔죠.”
◆'키짱'으로 인생의 단맛 쓴맛 보다
우여곡절 끝에 키 크는 신발 브랜드 ‘키짱’의 총판을 인수한 손 대표는 2년 간 전국 20여개 가맹점을 오픈했다. 신발을 신으면 키가 큰다는 슬로건이 엄마들을 자극했다. 전국에 아이를 가진 엄마들이 매장에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였다. 사업 초반임에도 매출은 날이 갈수록 올랐다. 키 크는 신발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면서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키 크는 신발이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손 대표는 하루아침에 큰 타격을 입었다.
“키 크는 신발이 반응이 좋으니까 대형 브랜드에서도 유사한 제품을 만들어서 팔기 시작하더라고요. 정말 열풍이었죠. 그러다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에서 키 크는 신발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됐다고 방송이 나간 거예요. 저희 브랜드를 꼬집어서 한 건 아니었지만 방송 말미에 키짱 로고가 나간 걸 보고 다음날 가맹점주들이 달려왔어요. 장사 못하겠다고 말이죠. 정말 하루아침에 망해버린 거죠.”
그 한 번의 방송이 손 대표의 모든 걸 앗아갔다. 수 십개의 매장은 문을 닫고 사업도 접어야만 했다. 사무실 한 켠에는 재고 물품만 한 가득이었다. 재기 불능상태로 전락한 손 대표는 그 날 이후 1년 간 밤낮없이 술로 지샜다. “한창 잘나가다가 하루아침에 망해버렸으니 막막했죠. 매일 술만 먹고 살았어요. 아내는 아이들을 키워야 하니까 식당, 파출부 할 것 없이 뛰어다녔고요. 재고 상품을 땡 처리 업체한테 헐값으로 넘길 땐 정말 죽고 싶었어요. 실제로 한강도 3번 정도 갔으니까요.”
◆마흔다섯, 재기를 꿈꾸며 도전한 손 대표
2011년 쓴맛 단맛 다 본 손 대표의 나이는 마흔 다섯이었다. 그렇게 좌절하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였다. 그는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아쿠아 슈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하던 신발이 ‘마사이 신발’과 ‘베어풋(barefoot)’ 제품이었는데, 손 대표는 베어풋을 선택했다.
“키짱을 하면서도 다음 아이템을 늘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때 눈여겨 본 스타일이 베어풋 제품이었어요. 신은 듯 안 신은 듯 발에 착 달라붙는 신발이 유행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정리해서 공장으로 보냈죠,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니 어느 정도 신을만한 샘플이 나왔어요. 그리고 연예 기획사에서의 경험을 살려 제안서를 멋지게 만들었죠. 사실 그땐 제안서를 만들면서도 될 거라는 생각은 안했어요.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그래서 패션 브랜드에다가 제안서를 보냈죠. 근데 아레나에서 연락이 온 거죠.(웃음)”
당시 수영복 브랜드에서 전개하는 슈즈 제품은 슬리퍼가 고작이었다. 워터파크나 바닷가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편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아이템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렇게 아레나와 첫 계약을 성사한 손 대표는 이후 타브랜드와의 계약도 순조롭게 이뤄냈다. 여기에 아쿠아 슈즈 브랜드 ‘엑토스’를 론칭하면서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지원하는 자금도 받았다. 말 그대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였다.
“사업을 하면서 참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타이밍이 좋았던 것 같아요. 만약 신제품개발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밸롭도 망했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직원들과 함께 신제품 개발에도 꾸준히 집중하고 있죠. 요즘 청년들이 취업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는데, 밸롭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들도 마찬가지일거예요. 능력보다 인성이 먼저예요. 대부분의 회사는 팀플레이로 일하기 때문에 개인의 능력보다 서로 간의 협업이 중요해요. 좋은 스펙보다 조직에 잘 스며들 수 있는 인성을 먼저 길러보세요.”
잡앤조이=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