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만찬] "변리사가 최고 직업?…일 쉽고 소득도 높은 '꿈같은' 직업은 없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오세중 대한변리사회 회장
오세중 대한변리사회 회장이 변리사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건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1991년, 34세가 되던 해였다. 운동권 출신으로 대학에서 두 차례나 제명되고, 14년이라는 긴 여정 끝에 간신히 졸업했지만 그의 이름에 그어진 빨간 줄은 취업 길을 단단히 틀어막아 버렸다. 이듬해, 그에게는 가정까지 생겼다.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며 간신히 살아가던 오 회장에게 오직 ‘시험 결과’만으로 문을 열어주는 변리사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매일 10시간씩 홀로 싸우기를 3년, 그는 마침내 1995년, 변리사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철학도에서 변리사회 회장이 되기까지 오 회장의 지난했던 학창시절을 듣기 위해 서울 청파로 한국경제매거진 회의실에 그와의 인터뷰 자리를 마련했다. 현재 경희대 이과대학 정보디스플레이학과 겸임교수로도 재직 중인 그는 특히 대학생과 취업준비생에게도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철학과를 졸업했다. 어떻게 철학을 전공하게 됐나.
“스토리가 조금 있다. 1977년, 인문계열에 입학했는데 그 해에 긴급조치와 유신헌법 철폐, 민주화 요구 시위에 연달아 참여하면서 ‘긴급조치 9호’ 위반 명목으로 제명이 돼 버렸다. 1980년 특별구제 형식으로 복학했으나 5월 광주항쟁 때 다시 잡혀가면서 1987년부터 제대로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대학을 14년 간 다닌 것이다. 이때 복학하면서 철학과를 선택하게 됐다.”
▶복학하기까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나.
“입학하자마자 쫓겨났기에 진로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학력이 고졸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장 컸다. 우선 공부를 열심히 해둬야겠다고 결심했다. 특히 영어공부에 신경을 많이 썼다. 선배들이 어느 분야로 가든 외국어는 꼭 할 줄 알아야한다고 조언해줬기 때문이다. 요즘 학생들처럼 회화학원이나 토익‧토플학원도 열심히 다녔다. 일본어도 공부했다. 일주일 만에 문법을 떼서 책을 읽을 정도가 됐다. 독서도 많이 했다.”
▶변리사는 주로 공대생이 많은데 철학도로서 어떻게 변리사를 선택했나.
“졸업하니 33세였다. 시위전력 때문에 취업이 쉽지 않았고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생활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특허 출원할 일이 있다며 특허법률사무소를 다녀오시더니 좋은 직장인 것 같다며 변리사를 추천해주셨다. 그때만 해도 변리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변리사가 되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당시 동기들 대부분은 사법고시나 교수직을 준비했는데 그들과 다른 길을 가보고 싶었고 도전을 결심했다.”
▶시험은 어떻게 준비했나.
“변리사 준비 후 최종 합격까지 3년이 좀 안 걸렸다. 1차 시험은 약 3개월 만에 붙었고 세 번 만에 2차 시험에도 합격했다. 공부 장소가 가장 고민이었다. 교재 양이 상당해서 일반 도서관은 어려웠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고시원에 들어갔다. 그런데 혼자 막힌 곳에서 하루 종일 있으려니 너무 힘들었다. 대신 책을 두고 출퇴근하는 식으로 공부했다. 자연히 최단시간에 끝내는 데 집중하게 됐다.”
▶남다른 합격 포인트가 있었을 듯하다.
“하루 10시간을 목표로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온전히 공부만 했다. 우선 먼저 한 것은 경향파악이다. 최근 20년간 출제경향을 분석하고, 중요하지만 안 나온 문제는 별표를 쳐 두었다. 2차 시험 과목은 전부 한 권씩 책으로 만들어 정리했다. 또 준비가 안 되면 시험 응시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시험이 있으면 무조건 봤다. 그러면서 내 실력을 점검하고 풀이시간 등을 테스트 해 봤다. 자격시험은 절대적인 시간 투자가 필요하다. 우선 완벽하게 내용을 이해한 뒤 암기하고 응용까지 한다면 합격의 가도에 올랐다고 보면 된다.”
▶실패의 순간은 어떻게 견뎠나.
“시험 준비할 때 이미 난 결혼한 상태였다. 얼마나 다급했겠나. 명절만 되면 정말 괴로웠다. 우선 자신의 선택이 옳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확신이 선다면 다음은 문제를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그러면 남은 건 시간문제다. 그만큼 호흡을 길게 가져가야 한다. 누구든 되기까지는 불안하다. 난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성경도 많이 읽었는데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믿음은 바라는 바의 실상이다(히11:1)’이다. 맹자에도 ‘하늘은 뜻을 내리는 사람을 혹독하게 시험한다’는 ‘천강대임론(天降大任論)’ 문장이 있다. 이들 문장이 큰 힘이 됐다.”
▶최근 변리사 시험환경은 어떠한가.
“특정 전공이 유독 부족하다. 이 분야에서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게 전자공학 전공자인데 전자계열은 대우가 좋은 직장이 많다 보니 응시자가 적다. 또 최근 바이오 업계가 확대하면서 바이오 전공 경력직도 필요로 한다.”
▶정부가 창업을 독려하면서 변리사의 대우도 좋아졌을 듯한데.
“그렇지 않다. 초봉은 올랐는데 평균 연봉은 줄거나 유지되는 상태다. 정부가 창업아카데미 등 사업으로 청년 창업을 많이 지원하는데 특허 지원금은 절반 수준으로 낮춰 버렸다. 특허출원 비용은 비슷하지만 등록 후의 성사금을 없애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고급기술에도 오랜 시간을 투자하기가 사실상 힘들다. 기술개발만큼 특허를 잡는 데도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특히 글로벌 시장은 특허권 허들 없이는 나가봐야 소용이 없다.”
▶변리사의 단점을 꼽는다면.
“이쪽 업계가 일이 많은 것은 맞다. 게다가 최근 수익성이 나빠지면서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제대로 일하려면 저녁 9~10시에는 퇴근해야 한다. 일반 직장인처럼 추가 수당을 받는 것도 아니다. 유명 로펌 변호사들도 저녁에 미팅한 뒤 다시 업무에 복귀해서 밤 12시, 새벽 1시에 이메일을 보내오더라.”
▶변리사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은 무엇인가.
“공학과 법률지식을 합한 ‘융합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언어능력도 필요하다. 전 세계의 상표 담당자, 지식재산 담당자, 변호사, 변리사 등이 모이는 국제 행사 참석 기회가 많다.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는 행사만 3~4개이고 지역 컨퍼런스까지 합하면 수십 개에 달한다.”
▶ 대표 변리사로 있는 해오름 국제특허법률사무소에서 직접 변리사를 선발하기도 한다. 심사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학 학보사나 홍보대사, 동아리에서의 총무나 회장 경험 등 조직생활 이력을 본다. 사회는 집단생활이기에 이 안에서의 소통과 리더십이 매우 중요하다. 책임을 맡아 원만하게 성과를 냈다거나 하는 성과를 보여주면 좋다. 나 역시 학창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홍보업무를 했던 게 지금도 도움이 많이 된다. 물론 전공공부는 열심히 해야 한다. 전공이 평생을 따라가니까. 하지만 학점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대학은 수업만 들으라고 보내는 곳이 아니다. 교외 활동을 많이 담아 달라. 성실하게 꾸준히 일할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 변리사는 특히 초기 1~2년 간 투자하는 교육량이 상당하다. 이직이 잦을 경우 고객사로부터 불신을 얻을 수밖에 없다. 변리사 면접을 볼 때도 이런 역량을 본다.”
▶서류심사에서는 무엇을 가장 중점적으로 보나.
“자기소개서다. 얼마나 자신을 논리적으로 잘 표현하는지를 본다. 문서를 보면 작성자의 주의력도 알 수 있다. 오탈자가 나온다는 건 입사 후에도 ‘갑 회사에 보낼 문서를 을 회사에 보내는’ 등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거듭 말하지만 외국어도 중요하다.”
▶취업준비생 대다수가 진로를 확실히 정하지 못해 힘들어한다. 조언을 해 준다면.
“대학생 뿐 아니라 중‧고등학생도 같은 고민을 하더라. 일할 곳이 없는 게 아니다. 다만 다양한 직장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법대생도 특허법률사무소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꼭 변리사가 아니어도 스태프도 많이 필요하다. 큰 사무소는 변리사만 200~300명에 달한다. 발명 내용을 문서로 정리하거나 조사를 돕는 엔지니어, 법률 대응 지원, 회계 관리, 일반 사무관리 등 필요한 직군은 많다. 특허법률사무소도 일종의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있다. 이쪽에 있다 보니 브랜드 디자인이나, 브랜드 네이밍 등 시장도 꽤 크더라. 시장 규모가 연간 5천억원 이상은 된다. 대학생은 찾기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다. 기업 브랜드 이름을 지어주거나 디자인 로고를 제작해주는 건데 대개 아는 사람끼리 뽑고 있다.”
▶대학생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은 어느 직업이든 그 자체로 대박 내는 경우는 없다. 뭐든 성실히 해야 한다. 일은 쉽고 소득은 높은 그런 꿈같은 직업은 없다. 예전에 한 대기업 신입사원과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자료를 밤 10시라도 기다릴 테니 보내 달라’ 하더라. 고객이 기다린다는데 우리가 퇴근할 수 있나. 그렇게 다들 필사적으로 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확고한 꿈이 필요하다. 최근 사회가 안정되면서 부모들이 자녀를 지나치게 관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젊은이들이 자신의 꿈을 갖기가 어렵다. 얼마 전, 어린 아이들의 일생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확고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아이들은 그 꿈을 이뤘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성인이 돼서도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청소년기에 꿈에 대해 교육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잡앤조이=이도희 기자 tuxi0123@hankyung.com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며 간신히 살아가던 오 회장에게 오직 ‘시험 결과’만으로 문을 열어주는 변리사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매일 10시간씩 홀로 싸우기를 3년, 그는 마침내 1995년, 변리사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철학도에서 변리사회 회장이 되기까지 오 회장의 지난했던 학창시절을 듣기 위해 서울 청파로 한국경제매거진 회의실에 그와의 인터뷰 자리를 마련했다. 현재 경희대 이과대학 정보디스플레이학과 겸임교수로도 재직 중인 그는 특히 대학생과 취업준비생에게도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철학과를 졸업했다. 어떻게 철학을 전공하게 됐나.
“스토리가 조금 있다. 1977년, 인문계열에 입학했는데 그 해에 긴급조치와 유신헌법 철폐, 민주화 요구 시위에 연달아 참여하면서 ‘긴급조치 9호’ 위반 명목으로 제명이 돼 버렸다. 1980년 특별구제 형식으로 복학했으나 5월 광주항쟁 때 다시 잡혀가면서 1987년부터 제대로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대학을 14년 간 다닌 것이다. 이때 복학하면서 철학과를 선택하게 됐다.”
▶복학하기까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나.
“입학하자마자 쫓겨났기에 진로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학력이 고졸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장 컸다. 우선 공부를 열심히 해둬야겠다고 결심했다. 특히 영어공부에 신경을 많이 썼다. 선배들이 어느 분야로 가든 외국어는 꼭 할 줄 알아야한다고 조언해줬기 때문이다. 요즘 학생들처럼 회화학원이나 토익‧토플학원도 열심히 다녔다. 일본어도 공부했다. 일주일 만에 문법을 떼서 책을 읽을 정도가 됐다. 독서도 많이 했다.”
▶변리사는 주로 공대생이 많은데 철학도로서 어떻게 변리사를 선택했나.
“졸업하니 33세였다. 시위전력 때문에 취업이 쉽지 않았고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생활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특허 출원할 일이 있다며 특허법률사무소를 다녀오시더니 좋은 직장인 것 같다며 변리사를 추천해주셨다. 그때만 해도 변리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변리사가 되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당시 동기들 대부분은 사법고시나 교수직을 준비했는데 그들과 다른 길을 가보고 싶었고 도전을 결심했다.”
▶시험은 어떻게 준비했나.
“변리사 준비 후 최종 합격까지 3년이 좀 안 걸렸다. 1차 시험은 약 3개월 만에 붙었고 세 번 만에 2차 시험에도 합격했다. 공부 장소가 가장 고민이었다. 교재 양이 상당해서 일반 도서관은 어려웠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고시원에 들어갔다. 그런데 혼자 막힌 곳에서 하루 종일 있으려니 너무 힘들었다. 대신 책을 두고 출퇴근하는 식으로 공부했다. 자연히 최단시간에 끝내는 데 집중하게 됐다.”
▶남다른 합격 포인트가 있었을 듯하다.
“하루 10시간을 목표로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온전히 공부만 했다. 우선 먼저 한 것은 경향파악이다. 최근 20년간 출제경향을 분석하고, 중요하지만 안 나온 문제는 별표를 쳐 두었다. 2차 시험 과목은 전부 한 권씩 책으로 만들어 정리했다. 또 준비가 안 되면 시험 응시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시험이 있으면 무조건 봤다. 그러면서 내 실력을 점검하고 풀이시간 등을 테스트 해 봤다. 자격시험은 절대적인 시간 투자가 필요하다. 우선 완벽하게 내용을 이해한 뒤 암기하고 응용까지 한다면 합격의 가도에 올랐다고 보면 된다.”
▶실패의 순간은 어떻게 견뎠나.
“시험 준비할 때 이미 난 결혼한 상태였다. 얼마나 다급했겠나. 명절만 되면 정말 괴로웠다. 우선 자신의 선택이 옳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확신이 선다면 다음은 문제를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그러면 남은 건 시간문제다. 그만큼 호흡을 길게 가져가야 한다. 누구든 되기까지는 불안하다. 난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성경도 많이 읽었는데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믿음은 바라는 바의 실상이다(히11:1)’이다. 맹자에도 ‘하늘은 뜻을 내리는 사람을 혹독하게 시험한다’는 ‘천강대임론(天降大任論)’ 문장이 있다. 이들 문장이 큰 힘이 됐다.”
▶최근 변리사 시험환경은 어떠한가.
“특정 전공이 유독 부족하다. 이 분야에서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게 전자공학 전공자인데 전자계열은 대우가 좋은 직장이 많다 보니 응시자가 적다. 또 최근 바이오 업계가 확대하면서 바이오 전공 경력직도 필요로 한다.”
▶정부가 창업을 독려하면서 변리사의 대우도 좋아졌을 듯한데.
“그렇지 않다. 초봉은 올랐는데 평균 연봉은 줄거나 유지되는 상태다. 정부가 창업아카데미 등 사업으로 청년 창업을 많이 지원하는데 특허 지원금은 절반 수준으로 낮춰 버렸다. 특허출원 비용은 비슷하지만 등록 후의 성사금을 없애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고급기술에도 오랜 시간을 투자하기가 사실상 힘들다. 기술개발만큼 특허를 잡는 데도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특히 글로벌 시장은 특허권 허들 없이는 나가봐야 소용이 없다.”
▶변리사의 단점을 꼽는다면.
“이쪽 업계가 일이 많은 것은 맞다. 게다가 최근 수익성이 나빠지면서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제대로 일하려면 저녁 9~10시에는 퇴근해야 한다. 일반 직장인처럼 추가 수당을 받는 것도 아니다. 유명 로펌 변호사들도 저녁에 미팅한 뒤 다시 업무에 복귀해서 밤 12시, 새벽 1시에 이메일을 보내오더라.”
▶변리사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은 무엇인가.
“공학과 법률지식을 합한 ‘융합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언어능력도 필요하다. 전 세계의 상표 담당자, 지식재산 담당자, 변호사, 변리사 등이 모이는 국제 행사 참석 기회가 많다.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는 행사만 3~4개이고 지역 컨퍼런스까지 합하면 수십 개에 달한다.”
▶ 대표 변리사로 있는 해오름 국제특허법률사무소에서 직접 변리사를 선발하기도 한다. 심사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학 학보사나 홍보대사, 동아리에서의 총무나 회장 경험 등 조직생활 이력을 본다. 사회는 집단생활이기에 이 안에서의 소통과 리더십이 매우 중요하다. 책임을 맡아 원만하게 성과를 냈다거나 하는 성과를 보여주면 좋다. 나 역시 학창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홍보업무를 했던 게 지금도 도움이 많이 된다. 물론 전공공부는 열심히 해야 한다. 전공이 평생을 따라가니까. 하지만 학점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대학은 수업만 들으라고 보내는 곳이 아니다. 교외 활동을 많이 담아 달라. 성실하게 꾸준히 일할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 변리사는 특히 초기 1~2년 간 투자하는 교육량이 상당하다. 이직이 잦을 경우 고객사로부터 불신을 얻을 수밖에 없다. 변리사 면접을 볼 때도 이런 역량을 본다.”
▶서류심사에서는 무엇을 가장 중점적으로 보나.
“자기소개서다. 얼마나 자신을 논리적으로 잘 표현하는지를 본다. 문서를 보면 작성자의 주의력도 알 수 있다. 오탈자가 나온다는 건 입사 후에도 ‘갑 회사에 보낼 문서를 을 회사에 보내는’ 등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거듭 말하지만 외국어도 중요하다.”
▶취업준비생 대다수가 진로를 확실히 정하지 못해 힘들어한다. 조언을 해 준다면.
“대학생 뿐 아니라 중‧고등학생도 같은 고민을 하더라. 일할 곳이 없는 게 아니다. 다만 다양한 직장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법대생도 특허법률사무소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꼭 변리사가 아니어도 스태프도 많이 필요하다. 큰 사무소는 변리사만 200~300명에 달한다. 발명 내용을 문서로 정리하거나 조사를 돕는 엔지니어, 법률 대응 지원, 회계 관리, 일반 사무관리 등 필요한 직군은 많다. 특허법률사무소도 일종의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있다. 이쪽에 있다 보니 브랜드 디자인이나, 브랜드 네이밍 등 시장도 꽤 크더라. 시장 규모가 연간 5천억원 이상은 된다. 대학생은 찾기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다. 기업 브랜드 이름을 지어주거나 디자인 로고를 제작해주는 건데 대개 아는 사람끼리 뽑고 있다.”
▶대학생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은 어느 직업이든 그 자체로 대박 내는 경우는 없다. 뭐든 성실히 해야 한다. 일은 쉽고 소득은 높은 그런 꿈같은 직업은 없다. 예전에 한 대기업 신입사원과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자료를 밤 10시라도 기다릴 테니 보내 달라’ 하더라. 고객이 기다린다는데 우리가 퇴근할 수 있나. 그렇게 다들 필사적으로 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확고한 꿈이 필요하다. 최근 사회가 안정되면서 부모들이 자녀를 지나치게 관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젊은이들이 자신의 꿈을 갖기가 어렵다. 얼마 전, 어린 아이들의 일생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확고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아이들은 그 꿈을 이뤘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성인이 돼서도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청소년기에 꿈에 대해 교육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잡앤조이=이도희 기자 tuxi0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