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의 컬처 insight] '1인치 장벽' 넘어 글로벌 시장으로 뛰어드는 한국 영화
“우리는 단 하나의 언어를 쓴다고 생각합니다. 그 언어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정의한 수많은 말 중 이보다 적확한 말이 있을까. 지난 5일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사진)의 수상 소감을 들은 영화인들은 누구나 단번에 공감했을 것이다. 스크린에 가득 펼쳐지는 다채로운 이야기와 매혹적인 영상의 세계 앞에서 우리 모두는 국적을 불문하고 하나의 선처럼 연결된다. 그런데 봉 감독이 이 단순한 진리를 강조한 것엔 이유가 있다. 작은 장벽 때문이다.

봉 감독은 “자막, 그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은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언어를 가진 나라의 영화를 잘 보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는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 있다. 봉 감독은 그 분위기에 대한 아쉬움과 가까스로 열리기 시작한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함께 담아 말한 것이 아닐까.

작지만 견고한 영화의 1인치 장벽. 이 장벽을 한국 영화는 넘어서기 시작했다. 봉 감독은 스스로 그 장벽을 넘는 주역이 됐다. ‘기생충’은 한국 영화 최초로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았으며, 해외에서 83개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다음달 9일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수상할 가능성이 높다.

‘기생충’뿐 아니라 독립영화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해외 주요 영화제에서 잇달아 수상하며 44관왕에 올랐다. ‘독립영화계의 기생충’이라 불릴 정도다. 언어가 다른 나라 한 곳에서만 인정을 받아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이젠 숫자를 세는 일조차 어려울 정도로 한국 영화는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1919년 ‘의리적 구토’로 시작된 한국 영화는 100여 년 동안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럼에도 1인치의 장벽을 뚫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해외 관객들에게 언어의 차이는 곧 커다란 문화의 차이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아시아, 이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늦게 북미와 유럽 시장에 알려지기 시작한 한국 영화가 닻을 내리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하지만 그 문은 이제 열리기 시작했다. ‘기생충’과 ‘벌새’는 견고한 장벽에도 얼마든지 균열을 낼 수 있으며, 그 균열이 얼마나 크게 날 수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굳이 할리우드 영화를 따라 하거나 고난도의 컴퓨터그래픽(CG) 기술을 총동원하지 않아도 된다. 지극히 ‘한국적’인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다.

‘기생충’은 반지하라는 한국에만 있는 특수한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대만 카스텔라’ 사태가 불러일으킨 사회적 파장 등도 한국인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다. ‘벌새’에도 한국적 요소가 강하게 녹아 있다. 1994년 서울에 살고 있는 중학생 소녀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주요 사건으로 배치돼 있고, 대치동 철거민들의 현수막도 카메라에 자주 잡힌다. 그러나 두 작품은 한국적 요소 안에 깃든 갈등과 고민을 치밀하게 그려냄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도달한다. ‘기생충’의 기우(최우식 분)가 느꼈을 상대적 박탈감, ‘벌새’에서 예측하기 힘든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은희(박지후 분)의 불안감. 모두 어느 나라에 있든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고 느꼈을 감정이 아닌가. 두 작품은 그렇게 한국 영화이자 세계의 영화가 됐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법을 갑자기 깨달은 걸까.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아온 한국 영화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생충’이 있기 이전엔 봉 감독이 오마주한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있었다. 1960년 제작된 이 작품은 당시 중산층으로 올라선 서울의 한 가정에 들어간 하녀를 통해 계층의 문제를 담아냈다. 이 가정에 침투하려는 하녀(이은심 분)와 하녀로 인해 다시 하층민이 될까 두려워하는 동식(김진규 분)네 가족의 불안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존재해온 보편적인 감정과 갈등이다.

봉 감독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캐나다 언론이 “한국이 독창성으로 인정받는 소감이 어떤가”라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한국에서 멋진 아티스트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감정적으로 역동적인 나라다.” 이제 그동안 응축돼온 감정의 역동성을 마음껏 쏟아낼 시간이다. 그 서막은 이미 올랐다.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