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해 6월 네덜란드를 전격 방문했다. 그는 고위급 회담 직후 “안보 이익을 위태롭게 하지 말고 미국 요구에 동참하라”는 강경 발언을 했다. 당시엔 ‘화웨이 통신 장비 사용을 겨냥한 것’이란 해석이 많았다.

폼페이오가 겨눈 건 반도체 장비 수출이었다. 로이터는 최근 ‘폼페이오가 지난해 네덜란드 총리에게 최신 반도체 장비의 중국 판매 차단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네덜란드 ASML이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중국에 공급하려는 걸 막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EUV 장비는 중국에 못 들어가고 있다.

ASML EUV 장비가 글로벌 반도체업계의 판도를 흔들고 있다. 미국과 중국 정부가 15일 1단계 무역합의안에 서명했지만 EUV 장비가 당장 중국에 수출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起·우뚝 일어섬)’를 누르는 카드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등 국내 반도체 업체들엔 추격자인 중국 업체들의 기술 발전을 늦출 수 있어 ‘나쁠 게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없어서 못 파는 EUV 장비

中에 수출될까 겁나는 설비…'반도체 판' 흔드는 ASML의 노광장비
ASML은 네덜란드 벨트호벤에 본사를 둔 반도체 장비 제조 기업이다. 창사(1984년) 34년 만인 2018년 연 매출 100억유로를 처음 돌파했다. 지난해 매출 추정치는 116억8400만유로(약 15조214억원)다.

ASML의 성장을 이끈 건 EUV 장비다. 반도체 원판인 웨이퍼에 빛으로 회로를 그리는 노광 공정에 쓰인다. 노광 공정에선 회로 선폭(전자가 흐르는 트랜지스터 게이트의 폭)이 얇을수록 웨이퍼 한 장에서 나오는 칩의 수가 증가한다. 도화지에 크레파스보다 색연필로 더 많은 선을 그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칩에 더 많은 기능을 담을 수도 있다. 삼성전자 TSMC 등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들이 5㎚(1㎚=10억분의 1m) 이하로 선폭을 얇게 하는 기술 경쟁을 벌이는 이유다.

선폭을 얇게 하려면 회로를 그리는 빛의 파장이 짧아야 한다. ASML이 독점 생산하는 노광 장비는 광원 파장이 13.5㎚인 EUV를 광원으로 쓴다. 기존 제품의 1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ASML은 2007년 반도체 최적화 솔루션 업체 브리온을 인수하고 2013년 EUV 광원에 대한 독점 기술을 갖고 있던 사이머를 자회사로 편입하면서 상용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초미세공정을 가동하려면 EUV 장비가 꼭 필요하다”며 “대당 2000억원이 넘는 가격에도 주문이 밀려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현재 10대 이상 운용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중국 수출 막아라”

ASML의 최신 EUV 노광장비를 중국 파운드리 업체 SMIC가 탐내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SMIC는 14㎚ 공정을 주력으로 하는 세계 5위권 업체다. SMIC가 EUV 장비를 갖게 되면 중국 반도체산업의 발전 속도가 훨씬 빨라질 것이란 게 업계 전망이다. 중국 화웨이의 고성능 모바일칩 물량을 SMIC가 가져가면 기술 노하우를 쌓을 수 있어서다.

1단계 무역합의안 서명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SMIC의 EUV 장비 도입을 수수방관하진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첨단기술 관련 내용은 미·중 양국의 이번 합의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으로 반도체 첨단 기술이 들어가는 걸 경계하는 미국의 기조는 상당 기간 유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의 ASML 통제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1위 TSMC(점유율 52.7%)를 뒤쫓고 있는 2위 삼성전자(17.4%)에 ‘나쁜 소식’은 아니라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경쟁 업체의 초미세공정 도입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어서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