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한민족 체제'였던 대마국…삼국통일 이후 우리 역사에서 멀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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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대마국에서 대마도로
기원전 3세기에 한민족 이주
운명 달라진 7세기 중엽
수 천년 간 한·일 잇는 '다리'
기원전 3세기에 한민족 이주
운명 달라진 7세기 중엽
수 천년 간 한·일 잇는 '다리'
고대에 우리 민족사의 영역에는 복잡한 성격의 해양소국이 있었다. 대마국이다.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대마도는 누구의 영토였는가?” “누구의 역사였는가?” 한·일 관계는 시작할 때부터 복잡했고, 역사가 진행될수록 숙명적으로 변했다. 그 한가운데에서 상대방의 심장을 겨누는 ‘단도(短刀)’(K. W. J. Mekel 주장), 연결하는 ‘다리’라는 상반된 역할을 한 곳이 대마도다.
대마도는 남북이 72㎞, 동서가 16㎞, 면적이 714㎢인 비스듬히 누운 고구마꼴이다. 제주도의 3분의 2, 거제도의 2배, 울릉도의 10배에 달하는 큰 섬이다. 부산에서 약 53㎞, 거제도에서는 80여㎞ 거리로 날씨가 맑으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대마도에서 이키섬까지 약 53㎞, 다시 규슈까지는 20여㎞다. 따라서 대마도를 징검다리처럼 이용하면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다. 1노트 내외로 북동진하는 대한난류(쓰시마해류)와 낙조(썰물)의 영향으로 유속은 3노트 이상이 된다. 거기다가 계절풍까지 활용한다면 상호 간 교류는 어렵지 않다. 나는 1983년 8월 ‘해모수’라는 뗏목을 만들어 거제도를 출항했는데, 대마도 북쪽 사고(佐護)까지 불과 4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광의의 ‘한민족 체제’에 속해
대마도의 고시다카(越高) 유적지에서는 약 6500년 전의 융기문 토기들이 발견됐다. 가토(加藤) 해상유적지에서도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됐다. 한편 부산의 동삼동 패총, 울산 서생포 등에서는 죠오몽 토기와 흑요석제 도구들이 나왔고, 근래 여수의 안도 패총에선 규슈산 흑요석이 발견됐다. 이렇게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대마도를 중간기지로 삼아 수천 년 동안 자연스러운 교류와 이주, 초보적인 무역을 했다. 그런데 기원 전 3세기 무렵부터 한민족은 일본열도를 목표로 대대적이고 조직적인 이주와 진출을 시도했고, 그 여파로 야요이 문화가 시작됐다. 대마도 안에서 상자식 석관 등 200기 가까운 고분이 발견됐는데 야요이 토기, 자루식 마제석검을 비롯해 창, 모, 검 등 청동제품과 철제품, 각종 농사기구 등 한반도계 유물이 많이 나왔다.
대마국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 왜인전에 처음 등장한다. 서기 3세기 전반의 대마국 상황이 나와 있다. 구야한국(금관가야)의 해안을 떠나 대마국(對馬國), 일지국(一支國), 말로국(末盧國), 이도국(伊都國) 등을 거쳐 여왕이 다스리는 야마대국(邪馬臺國)에 도착하는 길과 거리, 항해 방식 및 인구, 특산물 등과 지배자의 이름을 기록했다. ‘대마’라는 이름은 마한의 맞은편에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만, 실제로 대마국과 교류한 주체는 변한이었다.
또 다른 명칭인 ‘쓰시마’는 712년에 편찬된 《고사기》에 기록된 ‘津島(ツシマ)’에서 유래했다. 한국어 ‘두 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 밖에 ‘한향지도(韓鄕之嶋)’ ‘대주’ ‘대마주’ 등의 명칭이 있다. 대마국은 비록 ‘왜인전’에 기록됐지만, 그 무렵의 ‘왜(倭)’는 여러 가지 증거로 봤을 때 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와 마찬가지로 ‘한민족 체제’에 속했다고 판단한다.
3세기 전반쯤 대마국에는 1000여 호, 즉 5000명 정도가 거주했다. 삼한의 소국들과 비교하고 척박한 자연환경을 고려하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런데 면적의 88%가 산악지형이고, 농경지는 지금도 불과 4% 정도다. 반면 915㎞에 달하는 리아스식 해안에는 항구가 발달했고, 크고 작은 만들은 수백 척의 선박을 숨기고, 외부세력의 진입을 저지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해양중계 무역에 종사했지만, 식량을 구하기 힘들 때는 해적으로 변신해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섬 안에는 정치세력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야연맹들의 정치적 진출
대마도에 정치적으로 진출한 최초의 세력은 김해에 기반을 둔 구야한국을 비롯해 거제도 서쪽과 섬진강 하구 유역에 있던 가야연맹들이다. 항법상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고, 이미 해양상업 활동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대마도 서안에는 ‘가라’와 관련된 지명, 전설, 가야계 토기 등의 유물이 많다.
17세기에 편찬된 《대주신사지(對州神社志)》에는 옛 이야기가 있다. “…먼 옛날 시다루의 해변에 큰 항아리가 흘러 왔는데,… ‘나는 가라로부터 왔으니 가라국이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다’라고 했다. 항아리를 뒷산에 안치했더니, 만조 때는 물이 찼고, 간조 때는 물이 빠졌다….” 이는 가야인들의 항해 과정과 연관이 깊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만의 안쪽인 이 마을에서는 가야계인 스에키 토기의 파편이 많이 발견됐다.
대마도는 신라와도 관련이 깊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건국한 초기부터 침입한 왜인들의 기사가 자주 나타난다. 주로 남풍이 부는 4~5월경에 침입한 이들 가운데 대마도의 왜인들이 많았다.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가 대마도를 출항해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대마도에는 신공황후와 연관된 전설과 물건들을 숭배하는 신사(神社)들이 있다. 반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408년 왜병들이 대마도에 군대와 무기, 식량 등 군수물자를 쌓아놓고 침공하려 하자 신라는 대마도를 정벌하는 계획을 세웠다.
나는 1982년 겨울 밤, 사고마을의 덴신다쿠쓰다마 신사에서 벌어지는 ‘오이리마세’라는 의례에 참여한 적이 있다. ‘천도(天道)신앙’이라는 고대 신앙을 남긴 이곳을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죄인이 신당에 들어가면 감히 잡지 못한다(罪人 走入神堂 卽亦不敢追捕)’라고 기록했다. 마한에 있던 소도신앙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윤명철 《일본기행》, 1989년)
애증의 한·대마도 관계
7세기 중엽 동아시아 역학관계와 한민족의 역사 방향을 바꾼 ‘동아지중해 국제대전’이 발생하면서 대마도의 운명은 달라졌다. 661년부터 왜국은 부흥운동을 펼치는 백제에 군수물자와 병력을 지원했다. 혈연적·문화적으로 가깝다는 명분과 함께 당나라와 신라의 현실적인 위협을 제거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백·왜 연합군은 663년 8월 나·당연합군과 벌인 백강(백촌강)전투에서 대패했고, 유민들은 왜군들과 일본열도로 대거 탈출했다.
그들은 664년 대마도와 이키섬에 봉화 등 방어체제를 쌓고, 규슈 북부 해안(후쿠오카 지역)의 정청을 지금의 다자이후로 옮긴 뒤 곳곳에 성을 쌓았다. 다시 667년 백제의 달솔인 도훈?쇼(答春初)는 유민들을 지휘해 대마도의 아소만(淺茅灣) 옆 산꼭대기에 가네다성(금전성)을 쌍았다. 소위 ‘백제식 산성’이다. 이렇게 해서 대마도는 신라의 공격을 방어하는 최전선으로 변했으며, 우리 역사에서 이탈했다. 670년 왜국은 국명을 일본으로 변경했고, 통일신라와는 적대적인 관계가 됐다. 하지만 두 나라는 때때로 제한된 교류를 했다. 일본은 대마도에 ‘신라역어(통역관)’를 뒀을 정도였다. 그런데 9세기에는 신라 해적이 일본을 침공했으며, 894년에는 대마도를 두 차례나 공격했다.
13세기에는 왜구들이 등장해 고려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여서 세종 때는 이종무가 전선 227척에 병사 1만7285명으로 대마도를 공격했다. 하지만 조선은 회유책을 택해 식량 등 생필품을 하사하며 무역권을 주었고, 심지어는 관직까지 내렸다. 이 때문에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였다는 우리 기록과 지도들이 많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영토였다. 즉 경제적으로는 우리, 정치적으로는 일본을 선택하는 ‘중간자’의 숙명을 갖고 반독립적인 역사를 유지했던 것이다.
1949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다. 1952년에는 ‘평화선(Lee Line)’을 선포했다. 잃어버린 땅과 잊혀진 역사에 분노하는 일은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왜 잃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일이다.
대마도에 사는 왜인들에게 1000년 이상 괴롭힘을 당했던 우리는 누구인가? 은, 수산물 같은 자원의 보고이며 천혜의 요충지인 대마도를 도대체 왜 ‘우리 영토’로 만들지 못했을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
대마도는 남북이 72㎞, 동서가 16㎞, 면적이 714㎢인 비스듬히 누운 고구마꼴이다. 제주도의 3분의 2, 거제도의 2배, 울릉도의 10배에 달하는 큰 섬이다. 부산에서 약 53㎞, 거제도에서는 80여㎞ 거리로 날씨가 맑으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대마도에서 이키섬까지 약 53㎞, 다시 규슈까지는 20여㎞다. 따라서 대마도를 징검다리처럼 이용하면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다. 1노트 내외로 북동진하는 대한난류(쓰시마해류)와 낙조(썰물)의 영향으로 유속은 3노트 이상이 된다. 거기다가 계절풍까지 활용한다면 상호 간 교류는 어렵지 않다. 나는 1983년 8월 ‘해모수’라는 뗏목을 만들어 거제도를 출항했는데, 대마도 북쪽 사고(佐護)까지 불과 4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광의의 ‘한민족 체제’에 속해
대마도의 고시다카(越高) 유적지에서는 약 6500년 전의 융기문 토기들이 발견됐다. 가토(加藤) 해상유적지에서도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됐다. 한편 부산의 동삼동 패총, 울산 서생포 등에서는 죠오몽 토기와 흑요석제 도구들이 나왔고, 근래 여수의 안도 패총에선 규슈산 흑요석이 발견됐다. 이렇게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대마도를 중간기지로 삼아 수천 년 동안 자연스러운 교류와 이주, 초보적인 무역을 했다. 그런데 기원 전 3세기 무렵부터 한민족은 일본열도를 목표로 대대적이고 조직적인 이주와 진출을 시도했고, 그 여파로 야요이 문화가 시작됐다. 대마도 안에서 상자식 석관 등 200기 가까운 고분이 발견됐는데 야요이 토기, 자루식 마제석검을 비롯해 창, 모, 검 등 청동제품과 철제품, 각종 농사기구 등 한반도계 유물이 많이 나왔다.
대마국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 왜인전에 처음 등장한다. 서기 3세기 전반의 대마국 상황이 나와 있다. 구야한국(금관가야)의 해안을 떠나 대마국(對馬國), 일지국(一支國), 말로국(末盧國), 이도국(伊都國) 등을 거쳐 여왕이 다스리는 야마대국(邪馬臺國)에 도착하는 길과 거리, 항해 방식 및 인구, 특산물 등과 지배자의 이름을 기록했다. ‘대마’라는 이름은 마한의 맞은편에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만, 실제로 대마국과 교류한 주체는 변한이었다.
또 다른 명칭인 ‘쓰시마’는 712년에 편찬된 《고사기》에 기록된 ‘津島(ツシマ)’에서 유래했다. 한국어 ‘두 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 밖에 ‘한향지도(韓鄕之嶋)’ ‘대주’ ‘대마주’ 등의 명칭이 있다. 대마국은 비록 ‘왜인전’에 기록됐지만, 그 무렵의 ‘왜(倭)’는 여러 가지 증거로 봤을 때 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와 마찬가지로 ‘한민족 체제’에 속했다고 판단한다.
3세기 전반쯤 대마국에는 1000여 호, 즉 5000명 정도가 거주했다. 삼한의 소국들과 비교하고 척박한 자연환경을 고려하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런데 면적의 88%가 산악지형이고, 농경지는 지금도 불과 4% 정도다. 반면 915㎞에 달하는 리아스식 해안에는 항구가 발달했고, 크고 작은 만들은 수백 척의 선박을 숨기고, 외부세력의 진입을 저지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해양중계 무역에 종사했지만, 식량을 구하기 힘들 때는 해적으로 변신해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섬 안에는 정치세력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야연맹들의 정치적 진출
대마도에 정치적으로 진출한 최초의 세력은 김해에 기반을 둔 구야한국을 비롯해 거제도 서쪽과 섬진강 하구 유역에 있던 가야연맹들이다. 항법상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고, 이미 해양상업 활동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대마도 서안에는 ‘가라’와 관련된 지명, 전설, 가야계 토기 등의 유물이 많다.
17세기에 편찬된 《대주신사지(對州神社志)》에는 옛 이야기가 있다. “…먼 옛날 시다루의 해변에 큰 항아리가 흘러 왔는데,… ‘나는 가라로부터 왔으니 가라국이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다’라고 했다. 항아리를 뒷산에 안치했더니, 만조 때는 물이 찼고, 간조 때는 물이 빠졌다….” 이는 가야인들의 항해 과정과 연관이 깊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만의 안쪽인 이 마을에서는 가야계인 스에키 토기의 파편이 많이 발견됐다.
대마도는 신라와도 관련이 깊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건국한 초기부터 침입한 왜인들의 기사가 자주 나타난다. 주로 남풍이 부는 4~5월경에 침입한 이들 가운데 대마도의 왜인들이 많았다.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가 대마도를 출항해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대마도에는 신공황후와 연관된 전설과 물건들을 숭배하는 신사(神社)들이 있다. 반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408년 왜병들이 대마도에 군대와 무기, 식량 등 군수물자를 쌓아놓고 침공하려 하자 신라는 대마도를 정벌하는 계획을 세웠다.
나는 1982년 겨울 밤, 사고마을의 덴신다쿠쓰다마 신사에서 벌어지는 ‘오이리마세’라는 의례에 참여한 적이 있다. ‘천도(天道)신앙’이라는 고대 신앙을 남긴 이곳을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죄인이 신당에 들어가면 감히 잡지 못한다(罪人 走入神堂 卽亦不敢追捕)’라고 기록했다. 마한에 있던 소도신앙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윤명철 《일본기행》, 1989년)
애증의 한·대마도 관계
7세기 중엽 동아시아 역학관계와 한민족의 역사 방향을 바꾼 ‘동아지중해 국제대전’이 발생하면서 대마도의 운명은 달라졌다. 661년부터 왜국은 부흥운동을 펼치는 백제에 군수물자와 병력을 지원했다. 혈연적·문화적으로 가깝다는 명분과 함께 당나라와 신라의 현실적인 위협을 제거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백·왜 연합군은 663년 8월 나·당연합군과 벌인 백강(백촌강)전투에서 대패했고, 유민들은 왜군들과 일본열도로 대거 탈출했다.
그들은 664년 대마도와 이키섬에 봉화 등 방어체제를 쌓고, 규슈 북부 해안(후쿠오카 지역)의 정청을 지금의 다자이후로 옮긴 뒤 곳곳에 성을 쌓았다. 다시 667년 백제의 달솔인 도훈?쇼(答春初)는 유민들을 지휘해 대마도의 아소만(淺茅灣) 옆 산꼭대기에 가네다성(금전성)을 쌍았다. 소위 ‘백제식 산성’이다. 이렇게 해서 대마도는 신라의 공격을 방어하는 최전선으로 변했으며, 우리 역사에서 이탈했다. 670년 왜국은 국명을 일본으로 변경했고, 통일신라와는 적대적인 관계가 됐다. 하지만 두 나라는 때때로 제한된 교류를 했다. 일본은 대마도에 ‘신라역어(통역관)’를 뒀을 정도였다. 그런데 9세기에는 신라 해적이 일본을 침공했으며, 894년에는 대마도를 두 차례나 공격했다.
13세기에는 왜구들이 등장해 고려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여서 세종 때는 이종무가 전선 227척에 병사 1만7285명으로 대마도를 공격했다. 하지만 조선은 회유책을 택해 식량 등 생필품을 하사하며 무역권을 주었고, 심지어는 관직까지 내렸다. 이 때문에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였다는 우리 기록과 지도들이 많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영토였다. 즉 경제적으로는 우리, 정치적으로는 일본을 선택하는 ‘중간자’의 숙명을 갖고 반독립적인 역사를 유지했던 것이다.
1949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다. 1952년에는 ‘평화선(Lee Line)’을 선포했다. 잃어버린 땅과 잊혀진 역사에 분노하는 일은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왜 잃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일이다.
대마도에 사는 왜인들에게 1000년 이상 괴롭힘을 당했던 우리는 누구인가? 은, 수산물 같은 자원의 보고이며 천혜의 요충지인 대마도를 도대체 왜 ‘우리 영토’로 만들지 못했을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