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 큰 별이 졌다"…83엔에서 123층 월드타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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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타계
▽ 맨손으로 국내 5위 롯데그룹 일궈내…한·일 오가며 그룹 키워
▽ 韓 유통·관광산업 기틀 마련…장례는 롯데그룹장
▽ 맨손으로 국내 5위 롯데그룹 일궈내…한·일 오가며 그룹 키워
▽ 韓 유통·관광산업 기틀 마련…장례는 롯데그룹장
한국 유통·관광업계의 큰 별이 졌다. 맨주먹으로 재계 5위 롯데그룹을 일군 창업주 신격호 명예회장이 19일 별세했다. 한국 근대 산업사에 한 획을 그은 신 명예회장은 국내 제과·관광·유통·면세업 등을 세계적 반열에 올렸다.
◆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타계…향년 99세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이날 오후 4시29분 향년 99세로 별세했다.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 중이던 신 명예회장은 전날부터 급격히 상태가 악화했다. 이날 신동빈 롯데 회장 등 가족이 지키는 중 세상을 떠났다.
신 명예회장은 타지인 일본에서 맨손으로 시작해 재계 5위의 롯데그룹을 일군 자수성가형 기업가다. 제조업 중심이던 한국 산업계에서 전근대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던 한국의 유통과 관광산업에 투자해 성장을 이끄는 데 공헌했다.
신 명예회장은 일제강점기인 1921년 울산에서 5남 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만 20세가 되던 1942년 사촌형이 마련해준 노잣돈 83엔을 갖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와세다대 응용화학부(야간)에 적을 뒀지만 낮에는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는 '주경야독' 생활을 이어갔다.
첫 사업은 1944년 선반(절삭공구)용 기름 제조 공장이었으나 2차 대전에 공장이 전소해 5만엔의 빚만 남았다.
좌절하지 않고 다시 사업자금을 마련해 1946년 세운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란 공장에서 비누와 화장품을 만들어 재기에 성공했다. 패전 후 생필품난을 겪던 일본에서 수제 비누는 큰 인기를 끌어, 1년도 되지 않아 5만엔의 빚을 모두 갚았다.
1947년에는 롯데의 성공의 발판이 된 껌을 만들어 대히트를 쳤다. 조악한 품질의 초산비닐 수지 껌이 주류를 이루는 와중에 신 명예회장은 남미산 천연수지로 당시 최고 수준의 껌을 선보였다.
1948년에 신 명예회장은 제과회사 '롯데'를 설립했다. 한때 작가를 꿈꿨던 신 명예회장은 기업명을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의 이름에서 따왔다. 롯데는 껌 이후 초콜릿과 비스킷, 아이스크림 등의 제품도 성공을 거둬 일본에서 종합 제과기업으로 우뚝 섰다. 이후 롯데 상사·부동산·전자공업·오리온즈(현 롯데마린스) 등 거느리는 재벌 기업이 됐다.
◆ 韓 유통·관광에 선구적 투자…123층 월드타워 '숙원사업' 달성 고국인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은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다. 일본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한국에 자본이 부족하던 모국에 대규모 투자를 집행했다.
한국에 대한 투자의 길이 열리자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했고, 유통과 관광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1973년 서울 소공동에 선보인 롯데호텔과 1979년 롯데쇼핑센터(현 롯데백화점 본점)를 열면서 입지를 굳혔다. 이후 한국경제와 함께 성장을 거듭한 롯데는 화학과 건설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면서 자산규모 100조원, 재계 5위 그룹으로 우뚝 섰다.
이 같은 '신격호 신화'의 비결로는 남다른 카리스마와 현장경영이 꼽힌다. 2011년 당시 신동빈 롯데 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키고 본인은 총괄회장을 맡은 후에도 백화점, 마트 등을 직접 방문해 챙긴 수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신 명예회장은 특히 롯데월드, 롯데면세점 등 관광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한국은 관광입국을 이뤄야 한다'는 신념으로 국내 호텔 브랜드 최초 해외진출 등 관련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 1995년에는 관광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끌어올린 공로로 해당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숙원사업이던 국내 최고층(123층) 빌딩인 롯데월드타워 건설 역시 이 같은 뜻을 바탕으로 시작해 2017년 개장에 성공했다. 1987년 부지를 산 지 30년 만이다. "세계 최고의 것이 있어야 외국 관광객들을 한국으로 유치할 수 있다"는 신 명예회장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신 명예회장에 대해 "전근대적이던 한국 유통산업의 현대화를 이끌었다"며 "국내 유통업계의 경쟁과 성장을 촉발한 대표적인 창업 1세대 경영인"이라고 평가했다.
◆ 70년간 경영 이끌어…'창업 1세대 경영인' 시대 막 내려 신 명예회장은 70년 간 활동한 재계 최장수 최고경영자(CEO)로 꼽히나 순탄치 않은 말년을 보냈다. 2015년 장남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간의 경영권 분쟁이 불거지면서 신 명예회장은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에서 해임됐다. 국내 계열사 이사직에서도 퇴임해 경영에서 손을 놓게 됐다.
재계 5위의 그룹을 세웠지만 자녀에게 승계를 제대로 하지 못해 분쟁 불씨를 남겼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경영권 분쟁으로 일부 지분만으로 계열사 전체를 지배한 불투명한 기업지배 구조도 지적을 받았다. 분쟁이 이어지면서 정신건강 문제가 공개되고 수감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법원은 '정상적인 사무처리 능력이 없다'며 사단법인 선을 한정후견인(법정대리인)으로 지정했다. 이후 경영비리 혐의로 2017년 12월 징역 4년·벌금 35억원을 선고받았으나 고령인 점 등 건강상의 이유로 법정 구속은 면했다.
숙원사업이던 롯데월드타워에서는 임종을 맞지 못했다. 신 명예회장은 2018년 1월 집무실 겸 거처를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롯데월드타워 49층으로 옮겼다. 그러나 가정법원의 결정으로 1년 5개월 만에 다시 소공동 롯데호텔로 돌아와야 했다. 신 명예회장의 별세와 함께 '창업 1세대 경영인' 시대도 막을 내렸다.
장례는 롯데그룹장으로 치러진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명예장례위원장을 맡는다. 황각규·송용덕 롯데지주 대표이사가 장례위원장이 된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22일 오전 6시다. 발인 후 오전 7시 서울 롯데월드몰 롯데콘서트홀에서 영결식이 열린다.
유족으로는 부인 시게미쓰 하츠코(重光初子) 여사와 장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장남 신 전 부회장, 차님 신 회장,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 씨와 딸 신유미 씨 등이 있다.
오정민 한경닷컴 기자 blooming@hankyung.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open@hankyung.com
◆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타계…향년 99세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이날 오후 4시29분 향년 99세로 별세했다.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 중이던 신 명예회장은 전날부터 급격히 상태가 악화했다. 이날 신동빈 롯데 회장 등 가족이 지키는 중 세상을 떠났다.
신 명예회장은 타지인 일본에서 맨손으로 시작해 재계 5위의 롯데그룹을 일군 자수성가형 기업가다. 제조업 중심이던 한국 산업계에서 전근대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던 한국의 유통과 관광산업에 투자해 성장을 이끄는 데 공헌했다.
신 명예회장은 일제강점기인 1921년 울산에서 5남 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만 20세가 되던 1942년 사촌형이 마련해준 노잣돈 83엔을 갖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와세다대 응용화학부(야간)에 적을 뒀지만 낮에는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는 '주경야독' 생활을 이어갔다.
첫 사업은 1944년 선반(절삭공구)용 기름 제조 공장이었으나 2차 대전에 공장이 전소해 5만엔의 빚만 남았다.
좌절하지 않고 다시 사업자금을 마련해 1946년 세운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란 공장에서 비누와 화장품을 만들어 재기에 성공했다. 패전 후 생필품난을 겪던 일본에서 수제 비누는 큰 인기를 끌어, 1년도 되지 않아 5만엔의 빚을 모두 갚았다.
1947년에는 롯데의 성공의 발판이 된 껌을 만들어 대히트를 쳤다. 조악한 품질의 초산비닐 수지 껌이 주류를 이루는 와중에 신 명예회장은 남미산 천연수지로 당시 최고 수준의 껌을 선보였다.
1948년에 신 명예회장은 제과회사 '롯데'를 설립했다. 한때 작가를 꿈꿨던 신 명예회장은 기업명을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의 이름에서 따왔다. 롯데는 껌 이후 초콜릿과 비스킷, 아이스크림 등의 제품도 성공을 거둬 일본에서 종합 제과기업으로 우뚝 섰다. 이후 롯데 상사·부동산·전자공업·오리온즈(현 롯데마린스) 등 거느리는 재벌 기업이 됐다.
◆ 韓 유통·관광에 선구적 투자…123층 월드타워 '숙원사업' 달성 고국인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은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다. 일본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한국에 자본이 부족하던 모국에 대규모 투자를 집행했다.
한국에 대한 투자의 길이 열리자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했고, 유통과 관광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1973년 서울 소공동에 선보인 롯데호텔과 1979년 롯데쇼핑센터(현 롯데백화점 본점)를 열면서 입지를 굳혔다. 이후 한국경제와 함께 성장을 거듭한 롯데는 화학과 건설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면서 자산규모 100조원, 재계 5위 그룹으로 우뚝 섰다.
이 같은 '신격호 신화'의 비결로는 남다른 카리스마와 현장경영이 꼽힌다. 2011년 당시 신동빈 롯데 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키고 본인은 총괄회장을 맡은 후에도 백화점, 마트 등을 직접 방문해 챙긴 수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신 명예회장은 특히 롯데월드, 롯데면세점 등 관광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한국은 관광입국을 이뤄야 한다'는 신념으로 국내 호텔 브랜드 최초 해외진출 등 관련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 1995년에는 관광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끌어올린 공로로 해당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숙원사업이던 국내 최고층(123층) 빌딩인 롯데월드타워 건설 역시 이 같은 뜻을 바탕으로 시작해 2017년 개장에 성공했다. 1987년 부지를 산 지 30년 만이다. "세계 최고의 것이 있어야 외국 관광객들을 한국으로 유치할 수 있다"는 신 명예회장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신 명예회장에 대해 "전근대적이던 한국 유통산업의 현대화를 이끌었다"며 "국내 유통업계의 경쟁과 성장을 촉발한 대표적인 창업 1세대 경영인"이라고 평가했다.
◆ 70년간 경영 이끌어…'창업 1세대 경영인' 시대 막 내려 신 명예회장은 70년 간 활동한 재계 최장수 최고경영자(CEO)로 꼽히나 순탄치 않은 말년을 보냈다. 2015년 장남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간의 경영권 분쟁이 불거지면서 신 명예회장은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에서 해임됐다. 국내 계열사 이사직에서도 퇴임해 경영에서 손을 놓게 됐다.
재계 5위의 그룹을 세웠지만 자녀에게 승계를 제대로 하지 못해 분쟁 불씨를 남겼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경영권 분쟁으로 일부 지분만으로 계열사 전체를 지배한 불투명한 기업지배 구조도 지적을 받았다. 분쟁이 이어지면서 정신건강 문제가 공개되고 수감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법원은 '정상적인 사무처리 능력이 없다'며 사단법인 선을 한정후견인(법정대리인)으로 지정했다. 이후 경영비리 혐의로 2017년 12월 징역 4년·벌금 35억원을 선고받았으나 고령인 점 등 건강상의 이유로 법정 구속은 면했다.
숙원사업이던 롯데월드타워에서는 임종을 맞지 못했다. 신 명예회장은 2018년 1월 집무실 겸 거처를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롯데월드타워 49층으로 옮겼다. 그러나 가정법원의 결정으로 1년 5개월 만에 다시 소공동 롯데호텔로 돌아와야 했다. 신 명예회장의 별세와 함께 '창업 1세대 경영인' 시대도 막을 내렸다.
장례는 롯데그룹장으로 치러진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명예장례위원장을 맡는다. 황각규·송용덕 롯데지주 대표이사가 장례위원장이 된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22일 오전 6시다. 발인 후 오전 7시 서울 롯데월드몰 롯데콘서트홀에서 영결식이 열린다.
유족으로는 부인 시게미쓰 하츠코(重光初子) 여사와 장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장남 신 전 부회장, 차님 신 회장,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 씨와 딸 신유미 씨 등이 있다.
오정민 한경닷컴 기자 bloom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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