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인수합병(M&A)이 잇따르면서 관련 기업들의 덩치가 커지고 있다.

비메모리로도 불리는 시스템 반도체는 한국 기업의 존재감이 미미한 분야다. 메모리 반도체 비중이 압도적이다 보니 사업을 전개하는 게 쉽지 않았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지난해부터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시스템 반도체 수탁 생산) 사업 확대를 선언하고 오픈소스 기반의 시스템 반도체 사업에 박차를 가하면서 소규모 디자인하우스(반도체 설계 후공정 업체)들이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메이드 인 코리아’ 꼬리표가 붙은 중앙처리장치(CPU),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이미지센서 등이 속속 등장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시스템 반도체 허리' 디자인하우스 몸집 커진다
덩치 키우는 반도체 디자인하우스

반도체 설계업체 세미파이브는 20일 국내 디자인하우스인 세솔반도체 인수를 마무리했다고 발표했다. 세미파이브는 리스크파이브(RISC-V) 기술을 기반으로 시스템 반도체를 빠르고 저렴하게 설계할 수 있는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 리스크파이브는 개방형 설계자산(IP) 시스템이다. 반도체 설계 기술을 공개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 업계의 유닉스나 리눅스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세솔반도체는 삼성전자 파운드리 설계 솔루션 파트너(DSP)다. 세미파이브는 이번 인수를 통해 디자이너 80여 명을 거느린 업체로 거듭났다. 조명현 세미파이브 대표는 “리스크파이브 기반의 새로운 설계 기술을 활용하면 해외 업체들과의 격차를 빠르게 줄일 수 있다”며 “세솔반도체와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또 다른 파운드리 DSP인 하나텍은 지난해 11월 실리콘하모니와 한배를 탔다. 실리콘하모니는 미국계 파운드리 업체들의 협력사 중 하나다. 삼성전자와 중첩되는 기술이 많아 수주할 수 있는 일감이 상당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카메라 모듈과 음향기기 부품을 만드는 코아시아는 지난해 9월 삼성전자 LSI사업부에 제조업자개발생산(ODM) 방식으로 칩을 제작해 납품하는 세미하우와 넥셀 등을 인수했다. 본격적으로 시스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기로 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세계 최대의 파운드리 업체 TSMC 대신 삼성전자를 택한 디자인하우스도 늘고 있다.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한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가 풍성해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국내 업체인 에이디테크놀로지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회사는 오는 3월 TSMC와 계약이 끝나는 대로 삼성전자로 협력처를 바꿀 예정이다.

“오픈소스 활용하면 비용 뚝”

디자인하우스는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의 허리에 해당한다. 팹리스(반도체 설계) 업체가 칩의 핵심 기능을 설계하면 디자인하우스가 이를 받아 바로 생산이 가능한 수준으로 설계도를 업그레이드한다. 지금까지 국내엔 이렇다 할 디자인하우스 강자가 없었다.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대한 관심이 없다 보니 생태계 형성이 어려웠다는 지적이다.

최근 디자인하우스들이 변신에 나선 것은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 전략을 바꾸고 있어서다. 메모리 반도체뿐 아니라 파운드리도 함께 육성할 것이란 기대가 커졌다는 설명이다.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17.8%다. 1위 TSMC(52.7%)와의 격차를 조금씩 좁히고 있다.

라이선스 비용 없이 자유롭게 반도체 IP를 이용할 수 있는 리스크파이브가 세를 넓히고 있는 것도 업계에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팹리스 업체나 디자인하우스의 연구개발(R&D) 비용을 대폭 낮춰주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처음으로 리스크파이브를 이용해 2세대 5G용 통신칩을 생산했다. 이 칩을 올해 나올 스마트폰에 적용할 계획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국내의 반도체 설계 역량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인텔과 ARM이 정점에 있는 글로벌 생태계에 직접 뛰어들 만한 덩치가 못됐다”며 “삼성전자의 전략 변경과 오픈소스 열풍이 글로벌 시장 진입장벽을 낮췄다”고 설명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