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자격' 시험대 선 韓…식력을 성장동력 삼고
정부 규제는 과감히 철폐…산업·금융 분야 혁신 절실
복지제도 전면 조정…한·미, 한·일 관계 돈독히 해야
박재윤 <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
중진국권의 선두인 한국이 중진국 함정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모든 국민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보장하고 각자 능력과 노력에 따라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선진국 기준에 부합하는 나라는 룩셈부르크, 미국, 일본 등 21개국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국가의 2013~2018년 1인당 평균소득은 3만7835달러(일본)~10만9147달러(룩셈부르크) 정도다. 같은 기준으로 한국의 1인당 소득은 3만18달러다. 룩셈부르크와 비교하면 27.5%에 불과하다.
한국이 중진국권으로 진입한 지 반세기가 되는 2027년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올해부터 연평균 3.0%씩 성장해야 한다. 1인당 소득이 최소 4만달러에 도달하기 위한 조건이다.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1999~2002년 연평균 8.3%에 달했다. 같은 기간 세계 경제성장률(3.5%)의 2.4배였다. 세계 성장률을 밑돈 건 2003년부터다. 2018년 한국의 성장률은 2.7%로 세계 성장률(3.6%) 수준을 크게 하회했고, 작년에는 그 차이가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무엇보다 ‘지식력’을 새 성장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지식력은 정보를 이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기업들은 직원을 대상으로 지식력 강화 연수를, 주민센터는 과거 새마을운동과 같은 ‘새시민운동’에 나설 것을 제안한다. 한국의 경제 체질을 획기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다. 혁신도 빼놓을 수 없다. 정부 규제는 물론 산업 및 금융 구조 등 다각도의 혁신이 뒤따라야 한다. 경제 분야의 규제를 과감히 폐지하되, 폐지할 수 없다면 간접규제 방식으로 전환해 최소한의 규제만 남길 필요가 있다. 생필품 가격 안정이 필요할 때 정부가 가격을 직접 통제하지 않고 해당 생필품 공급을 늘려 가격을 낮추는 게 간접규제 방식이다.
포용정책은 재분배 단계서 해야
한국 경제는 고속 성장 과정에서 계층 간 격차 확대의 부작용을 경험했다. 사회적 불만이 커져 지속적 성장에 중대한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회 불만을 해소하지 않고선 성장동력을 효과적으로 작동시킬 수 없다. ‘포용’에 대한 고민이 과거보다 훨씬 많아져야 한다는 의미다. 다만 포용정책을 시행할 때도 금도가 있다. 정부가 기업의 생산분배 과정에 직접 개입해선 안 된다. 예컨대 최저임금제와 근로시간상한제는 ‘기본 인권의 관점에서 허용될 수 있는’ 최저임금과 근로시간 상한으로 책정돼야 한다. 실제 임금과 근로시간은 기업 경영전략 및 노사 협상에 따라 결정되도록 하는 게 맞다. 포용정책은 생산·분배가 아니라 재분배 단계에서 시행돼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차원에서 소득세와 재산세의 누진 구조는 강화돼야 한다. 확충된 재원의 범위 내에서 각종 보조금과 복지를 전면 조정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포용정책은 결국 ‘기본소득제’ 도입으로 완성될 것으로 보고 있다. 기본소득제는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일정한 소득을 동일하게 지급하는 제도다. 각종 보조금이나 복지수당을 폐지하고 모든 국민에게 동일한 기본소득을 지급하되, 상위 소득계층은 자신이 받은 기본소득과 하위 소득계층의 기본소득을 합친 금액의 소득세를 납부한다. 이렇게 하면 하위 소득계층의 기본소득을 상위 소득계층이 일정 정도 부담하는 식이 된다. 다만 기본소득을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보다 다소 낮게 책정해 하위 소득계층의 근로 의욕을 꺾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포용정책의 중요한 대상 중 하나는 주거 문제다. 장기 할부주택금융제도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서민층이 손쉽게 주택을 구입할 수 있다. 최하위 소득계층에는 무상 공공임대주택을 대량 공급하면 된다. 또 다른 주요 분야는 교육이다. 대학 등록금을 자율화하고 등록금 수입의 일정 비율을 장학금으로 사용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노사 간 공정거래 확립 필요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을 확충하려면 ‘공정’ 역시 필수다. 재화 생산 및 판매 과정에서의 모든 거래가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 노동조합 활동을 간섭하는 불공정을 차단해야 하지만, 노조의 불공정 행위 역시 예방할 수 있는 장치를 둬야 한다. 공정 정책은 노사 양측의 공정거래 행위를 확립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포용정책의 수단으로 이용해선 안 된다.
경제 외적 여건의 안정화도 중요하다. 미세먼지를 예로 들어보자. 국내에선 발생 요인을 찾아 극소화하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지만 중국 및 주변국과 같이 협의체를 구성하는 게 좋다. 홍수 지진 등 자연재해 때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강구하되, 적어도 50년 이상 장기적 관점에서 연구해야 한다.
대외관계의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 한국 경제는 내수시장만으로는 높은 수준의 소득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다. 대외지향적 발전을 지속하고 고도의 개방체제를 유지해야 한다. 한반도 통일이 이뤄진 뒤에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한국 기업엔 핵심 시장이다. 미국이 인류사회의 발전을 선도하는 국가라는 점에서도 미국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정부는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한국 기업의 미국시장 진출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한·일관계도 미래지향적으로 정립해야 한다. 중국 의존도를 서서히 줄일 필요가 있다. 대신 인도, 베트남 등 신흥개발도상국에 대한 연구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한국 기업들이 이런 신흥국에 진출할 때 정부가 지원을 확대하는 것도 좋다. 북한과의 관계는 복잡하다. 통일 후 경제협력 방안을 예비적으로 마련해 놓되 안보 이슈에 따라 경제적으로 신중히 접근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 안정을 위해선 현실적으로 정치 안정이 수반돼야 한다. 국회가 정쟁 과정에서 기업인들을 청문회나 국정감사에 부르는 등 정치적 불안정이 한국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정치 선진화가 있어야 경제 선진화도 가능하다.
정치권 '공동 규범' 마련해야
한국 정치의 선진화를 위해 정치학계가 ‘10계명’을 제시해주면 좋겠다.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들이 따라야 할 공동 규범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소속 정당의 불합리한 결정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 ‘주체’가 될 것을 명시하는 식이다.
한국 경제는 2020년대 후반에 반드시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한다. 기업과 시민이 각자 지식력을 강화하는 훈련을 받음으로써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혁신포용공정안정을 통해 지속적 성장과 경제사회 발전을 추구할 수 있다. 정부가 ‘한국 경제 선진화 기초확립 10개년 계획’을 수립해 범국가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