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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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이어 유럽연합(EU)도 중국 화웨이의 5세대(5G) 통신장비 사용을 금지하지 않기로 했다. 보안을 강조하면서도 제한적으로나마 화웨이 장비 사용에 길을 터줬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영어권 5개국 기밀정보 동맹체)의 일원으로 민감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영국으로 황급히 날아갔지만, 미국이 주도해온 ‘반(反)화웨이 동맹’의 균열은 불가피해 보인다. 캐나다도 영국 방식을 따를 태세다.

미국은 절대적 수준의 보안을 강조하며 반화웨이 연합전선을 독려해왔지만, 동맹국들의 입장에서는 중국과의 관계에 따라 보안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상대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음이 확인됐다. 때마침 영국의 경제분석기관인 옥스퍼드이코노믹스는 5G 통신장비의 경쟁 제한이 주요국에 미칠 투자비용 증가와 국내총생산(GDP) 감소 전망도 내놨다. 이런 전망이 나온 배후에 화웨이의 입김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국 정부에 절충점을 찾을 구실을 제공해준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에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후 미국 동맹국들과 얽히고 설킨 경제적 관계를 돌이키기 어려운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미국이 화웨이를 무너뜨리기 위해 동맹국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과정이다. 산업적 측면에서 보면 반화웨이 동맹이 흔들리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안보와 보안을 강조하며 반화웨이 동맹을 주도하는 미국이지만, 그토록 중요하다는 5G 통신장비 분야에서 정작 화웨이와 경쟁할 자국기업은 없다. 시스코 등 통신장비 업체들이 있기는 하지만 화웨이와 보완·협력의 관계일 수는 있어도 무선 네트워크에서 직접 경쟁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은 게 미국의 현실이다. 다르게 말하면 중국의 화웨이는 미국 산업 생태계의 빈 공간을 정확히 봤고, 여기서 약점을 잡아 승부를 걸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내수를 기반으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면 높은 가성비로 글로벌 시장에서 기존 통신장비 업체들을 따돌리고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치밀한 계산도 했을 것이다.

화웨이와 경쟁할 만한 자국기업이 없는 미국이 동맹국들에 관세 등으로 압박을 하는 것 말고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 옵션이라는 것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동맹국들에 스웨덴의 에릭슨, 핀란드의 노키아, 한국의 삼성전자 통신장비를 사용하라고 권고한다지만, 선택 여부는 어디까지나 각 동맹국이 처한 이해관계에 달린 문제다. 미국 정부는 뒤늦게 시스코와 오라클, 심지어 애플에까지 5G 무선 통신장비 진출을 제안했다가 반응이 신통치 않자 화웨이 통신장비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오픈소스 5G 기술개발로 눈을 돌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오픈소스는 통신장비 업계 입장에서 보면 진입장벽이 일거에 무너지는 것이어서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게다가 4차 산업혁명으로 갈 길이 바쁜 동맹국들이 미국이 화웨이를 무너뜨릴 대안을 제시할 때까지 5G 서비스를 미루며 기다려줄 리도 만무하다.

삼성전자가 5G 통신장비 분야에서 화웨이의 경쟁 상대로 부상한 데는 미국의 반화웨이 동맹이 큰 몫을 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이 과거 일본 천하로 가던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진입할 당시, 특정분야에서 자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독점을 특히 경계하는 미국의 덕을 본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삼성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국내는 물론 미국과 일본 시장에서 5G 통신장비의 입지를 구축하는데 일단 성공했다. 하지만 반화웨이 동맹이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다면 이제부터는 실력으로 유럽 인도 남미 등의 시장을 공략해 글로벌 차원에서 규모의 경제를 갖추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설 연휴에 브라질로 날아간 이유와도 무관치않을 것이다. 만약 중국의 화웨이가 세계 통신장비 시장을 압도적으로 장악하는 날이 온다면 한국이 지금까지 선도해오던 통신 서비스의 향후 로드맵에도 차질이 불가피할 게 뻔하다. 당장 6G, 7G 서비스 등으로 가면 중국만 쳐다봐야 하는 상황이 올 지 모른다.

어느 나라든 경쟁할 기업이 사라지면 산업의 주도권을 잃게 되고, 나중엔 대응을 하려고 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과 맞닥뜨려야 한다. 그 때는 동맹관계라는 것도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미국이 주도하는 반화웨이 동맹이 흔들리는 데서 한국이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한국이 반도체를 왜 지켜야 하는지, 첨단 통신장비에서 글로벌 기업이 왜 절실한지 이유가 더욱 명백해지고 있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