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양육비 미지급과 사법정의 실현 방해
재판의 사회적 효용은 분쟁을 종국적으로 해결하는 데 있다. 재판에서 결론이 났는데, 그 결론이 실제로는 집행되지 않거나 집행을 위해 다시 재판이 필요하다면 재판의 사회적 효용은 크게 손상된다.

법원이 판결로 지급의무를 확인한 자녀 양육비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사례가 85%나 된다고 한다. 최근 그런 사람의 신상을 공개한 것이 명예훼손인지 다툰 사례가 있다. 누가 양육비를 얼마나 지급할 것인지는 법원에서 쌍방에게 주장할 기회를 충분히 주고 관련된 모든 사정을 고려해 신중하게 결정한다. 그런데 판결이 확정된 뒤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생겼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양육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정당한 권리자가 오히려 사정을 하고 수모를 겪어야 한다면 이것은 극히 부당하다. 그런데 교묘히 재산을 빼돌리고 양육비를 미지급하는 행위에 대해 효과적이고 간명한 대응책이 없다. 법원의 확정판결과 결정을 고의로 불이행하거나 무력화하는 행위는 형사처벌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양육비 외에도 여러 분야에서 제기된다.

명예훼손을 범죄로 규율하는 것은 사전검열 효과를 일으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위험이 있다. ‘가짜뉴스금지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비범죄화 목표에 멈춘다면 ‘차라리 돈으로 물어주겠다’거나 ‘집행재산이 없어 손해배상이 두렵지 않다’는 사람에 의한 악의적 명예훼손에 대응하기 어렵다. 개별 심사를 거쳐 금지 가처분을 발령한다면 사전검열의 위험을 피할 수 있으며, 그 후 가처분 위반 행위를 처벌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부당해고를 다투는 경우 재판이 오래 걸릴 수도 있어 임시로 일정한 금액의 임금을 지급하도록 가처분으로 명할 수 있다. 그밖에 접근 금지 가처분, 침해행위 금지 가처분, 지속적 지급이 필요한 보험금이나 치료비 지급 가처분 등 여러 가처분에서 집행력 확보가 긴요하다.

영국, 미국 등 국가에서는 법원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 행위를 ‘Contempt of Court’(‘법정모독’으로 번역되고 있으나 그 실체는 ‘사법정의 실현 방해죄’에 가깝다)로 처벌하고 있다. 이들 국가가 권위주의적이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법정의 권위 보호보다 재판의 집행력 확보가 주된 목적이다.

이들 국가는 제소(提訴) 금지 가처분이나 소 취하 단행 가처분 등도 발령하고 있다. 영국과 한국에 같은 내용의 재판이 서로 원고와 피고만 바꿔 제소된 경우 영국 법원이 우리나라 재판의 원고(대체로 한국 국적의 다국적 기업이거나 금융기관)에게 소 취하를 명하면 형사처벌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이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반면 한국 법원이 영국 재판의 원고(대체로 외국 국적의 다국적 기업이거나 금융기관)에게 소 취하를 명하더라도 이를 지키지 않았을 때 강제할 수단이 없다. 이것은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재판주권, 우리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 문제이기도 하다.

중국 화웨이가 중국 법원의 가처분으로 삼성전자의 중국 내 생산을 중단시키려 시도하자 삼성전자는 미국에서 제소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미국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삼성전자가 한국 법원을 찾지 않은 이유는 집행 수단이 없어 실효성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재판권 충돌은 파산, 지식재산권, 해상, 국제거래, 입양 등 많은 분야에서 상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각 국가는 자국 판결의 국제적 집행력 확보를 위해 노력 중이다. 외국 판결의 승인 집행에 관한 다각도의 노력과 협약들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경우 ‘Contempt of Court’ 제도가 없어 국제 경쟁에서 매우 불리하다.

재판에서 당사자들이 진지하게 다투고 오래 심리해 힘들게 결론이 나왔다면, 그 결론은 쉽고 빠르게 그리고 확실하게 집행돼야 한다. 상대방이 재산을 모두 빼돌려 집행이 하나도 되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 상대방이 여전히 흥청망청 사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 고통이 어떻겠는가.

일단 판결이 확정된 후 다시 시간을 끄는 것은 재판 과정에서 쌍방의 사정이 이미 고려된 점을 생각할 때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다. 실현되지 않는 재판은 사법 불신과 법치주의의 붕괴를 불러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