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논설실] 시중에 돈 넘쳐난다는데…내 지갑, 내 통장에는 왜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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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맥경화' 심각
저성장·저물가 벗어나지 못하면 더 심해질 것
저성장·저물가 벗어나지 못하면 더 심해질 것
왜 ‘돈’인가.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통되고 회전되지 않으면 돈이 아니다. 화폐를 ‘경제의 핏줄’이라고 하고, 돈이 돌지 않으면 ‘돈맥경화’라고 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돈맥강화는 혈액 순환이 제재로 되지 않아 치명상을 입히는 ‘동맥경화’(動脈硬化)에 빗댄 말이다. 그만큼 돈의 원활한 흐름, 화폐의 유통 속도는 중요하다. 돈의 흐름에 따라, 즉 소비와 투자에 따라 일자리가 생기고 개인과 기업의 수익이 생긴다. 이 수익을 두고 쉬운 말로 ‘돈을 번다’‘돈이 오간다’‘돈이 생긴다’라고 한다.
툭하면 시중에 돈은 넘쳐난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부동자금’이라고도 하고 ‘유동자금’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한다. 현금과 현금성 자산을 의미하는 유동자금이 요즘 1000조원을 넘어섰다.(2019년 11월말 기준, 1010조7030억원) 주택시장으로, 리츠상품으로, 단기 금융상품으로 몰려다닌다는 부동자금이 여전히 많다고 한다. 부자 빈자 모두의 저축금이 경제를 키우는 ‘좋은 투자’에 쓰이지 않고 금융권만 맴돌고 있다.
어떻든 시중에 돈은 있다는 데, 갈 곳 못 찾은 자금이 많다는 데, 내게는 왜 없나? 결국은 돈이 돌지 않기 때문이다. 화폐 시스템에 문제라도 생겼나? 우리 경제에 근본적 문제점이 생긴 것인가? 이래저래 정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은 “경제가 점점 좋아 진다”라고 정색을 하며 말한다. 정말로 그런가. 그렇다면 ‘내 지갑’‘내 통장’에는 왜 돈이 없나?
이번 주 들어 흥미로운 연구보고서가 하나 나왔다. 민간 싱크탱크인 한국경제연구원에서 낸 것이다. ‘통화 유통속도의 추이와 정책시사점 분석’이라는 제목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한 마디로 시중에서 돈이 도는 속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놀라운 것은 화폐의 유통속도가 조사대상이 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6개국 중 꼴찌(2018년)다. 16개국을 분석대상으로 한 것은 비교분석 자료를 세계은행의 통계에서 인용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돈의 유통속도는 통화량과 GDP(명목)의 상관관계로 분석됐다. 이 자료는 한국은행 것이다. 그 속도가 2004년 0.98에서 2018년 0.72로 계속 떨어졌다. 0.72는 월가가 뒤흔들리며 글로벌 금융위기를 빚어졌던 2008년보다 더 나빠졌다는 의미다. 복잡한 이론과 어려운 설명을 정리하면, 성장률과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높을수록 돈의 회전속도는 빨라지고, 저성장과 저물가는 돈의 속도를 늦춘다는 것이다. 지금은 2%가 쉽지 않을 정도로 유례없는 저성장에다 디플레이션을 걱정할 정도로 저물가 국면이다. 구조적으로 돈이 돌지 않게 된 것이다.
한경연은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유통속도가 빨라진다는 점도 지적했다. 소득이 늘어날수록 신용(카드)결제를 선호하게 되는 데 이게 화폐보유에 대한 수요 감소, 곧 유통속도 증가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현실하고 맞는 얘기다. 화폐의 유통속도가 떨어지는 것은 많은 나라에서 나타나기도 하는 현상이지만, 한국에서는 하락속도가 과도하다는 게 문제다.
한국은행도 이런 현상, 아니 사실에 주목하면서 우려를 표시한 적 있다. 신중하고 점잖은 한국은행이다 보니 그런 사실을 좀 어렵게 말할 뿐이다. 일부러 빙빙 둘러대는 게 아니라, 중앙은행의 격(?)에 맞게 화폐금융론 혹은 화폐학으로 얘기하다 보니 그럴 것이다. 결국 부진한 투자, 침체된 경기, 위기의 경제 문제를 거론해야 하는 데 정부 비판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한국은행이 독립했다지만,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만성 고혈압 등으로 인한 동맥경화가 심해지면 건강을 잃게 된다. 경제에서도 ‘돈맥경화’가 지속되면 경제체력이 고갈된다. 투자를 일으키고, 소비를 회복시켜, 경제를 살려야 하는 이유다. 감세, 투자의 걸림돌 제거(규제완화), 유연한 노동시장 구축(임금과 노동의 유연성 강화)이 절실하다.
이게 안 되면 ‘내 지갑’‘내 통장’에 돈이 들어오기 어렵다. 시중에 부동자금, 유동자금이 아무리 많아도 다 소용이 없다. ‘소득주도성장’이라며, 말이 마차를 끄는 게 아니라 마차가 말을 끄는 경제로 계속 갈 수는 없다. 최저임금을 올리니 노조가 공고한 기존 취업자에게만 유리할 뿐 취업시장의 신규진입 희망자나 한계산업, 부실기업 근로자에게는 꼭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몇 년간 국가부채를 확대해가며 유례없이 많은 정부 돈을 풀고 있으나 관제 노인일자리나 만들었을 뿐 청년층에는 그다지 도움도 안 된다.
정부 예산 집행이 늘어나지만 돈의 흐름은 느리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가는 화폐 유통속도만 더 떨어뜨릴 것이다. 그 결과는? “내 주머니에 돈이 없다”“내 통장 잔액이 줄어든다”는 개인들만 계속 늘어날 것이다. 빨리 바뀌어야 한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툭하면 시중에 돈은 넘쳐난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부동자금’이라고도 하고 ‘유동자금’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한다. 현금과 현금성 자산을 의미하는 유동자금이 요즘 1000조원을 넘어섰다.(2019년 11월말 기준, 1010조7030억원) 주택시장으로, 리츠상품으로, 단기 금융상품으로 몰려다닌다는 부동자금이 여전히 많다고 한다. 부자 빈자 모두의 저축금이 경제를 키우는 ‘좋은 투자’에 쓰이지 않고 금융권만 맴돌고 있다.
어떻든 시중에 돈은 있다는 데, 갈 곳 못 찾은 자금이 많다는 데, 내게는 왜 없나? 결국은 돈이 돌지 않기 때문이다. 화폐 시스템에 문제라도 생겼나? 우리 경제에 근본적 문제점이 생긴 것인가? 이래저래 정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은 “경제가 점점 좋아 진다”라고 정색을 하며 말한다. 정말로 그런가. 그렇다면 ‘내 지갑’‘내 통장’에는 왜 돈이 없나?
이번 주 들어 흥미로운 연구보고서가 하나 나왔다. 민간 싱크탱크인 한국경제연구원에서 낸 것이다. ‘통화 유통속도의 추이와 정책시사점 분석’이라는 제목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한 마디로 시중에서 돈이 도는 속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놀라운 것은 화폐의 유통속도가 조사대상이 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6개국 중 꼴찌(2018년)다. 16개국을 분석대상으로 한 것은 비교분석 자료를 세계은행의 통계에서 인용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돈의 유통속도는 통화량과 GDP(명목)의 상관관계로 분석됐다. 이 자료는 한국은행 것이다. 그 속도가 2004년 0.98에서 2018년 0.72로 계속 떨어졌다. 0.72는 월가가 뒤흔들리며 글로벌 금융위기를 빚어졌던 2008년보다 더 나빠졌다는 의미다. 복잡한 이론과 어려운 설명을 정리하면, 성장률과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높을수록 돈의 회전속도는 빨라지고, 저성장과 저물가는 돈의 속도를 늦춘다는 것이다. 지금은 2%가 쉽지 않을 정도로 유례없는 저성장에다 디플레이션을 걱정할 정도로 저물가 국면이다. 구조적으로 돈이 돌지 않게 된 것이다.
한경연은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유통속도가 빨라진다는 점도 지적했다. 소득이 늘어날수록 신용(카드)결제를 선호하게 되는 데 이게 화폐보유에 대한 수요 감소, 곧 유통속도 증가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현실하고 맞는 얘기다. 화폐의 유통속도가 떨어지는 것은 많은 나라에서 나타나기도 하는 현상이지만, 한국에서는 하락속도가 과도하다는 게 문제다.
한국은행도 이런 현상, 아니 사실에 주목하면서 우려를 표시한 적 있다. 신중하고 점잖은 한국은행이다 보니 그런 사실을 좀 어렵게 말할 뿐이다. 일부러 빙빙 둘러대는 게 아니라, 중앙은행의 격(?)에 맞게 화폐금융론 혹은 화폐학으로 얘기하다 보니 그럴 것이다. 결국 부진한 투자, 침체된 경기, 위기의 경제 문제를 거론해야 하는 데 정부 비판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한국은행이 독립했다지만,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만성 고혈압 등으로 인한 동맥경화가 심해지면 건강을 잃게 된다. 경제에서도 ‘돈맥경화’가 지속되면 경제체력이 고갈된다. 투자를 일으키고, 소비를 회복시켜, 경제를 살려야 하는 이유다. 감세, 투자의 걸림돌 제거(규제완화), 유연한 노동시장 구축(임금과 노동의 유연성 강화)이 절실하다.
이게 안 되면 ‘내 지갑’‘내 통장’에 돈이 들어오기 어렵다. 시중에 부동자금, 유동자금이 아무리 많아도 다 소용이 없다. ‘소득주도성장’이라며, 말이 마차를 끄는 게 아니라 마차가 말을 끄는 경제로 계속 갈 수는 없다. 최저임금을 올리니 노조가 공고한 기존 취업자에게만 유리할 뿐 취업시장의 신규진입 희망자나 한계산업, 부실기업 근로자에게는 꼭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몇 년간 국가부채를 확대해가며 유례없이 많은 정부 돈을 풀고 있으나 관제 노인일자리나 만들었을 뿐 청년층에는 그다지 도움도 안 된다.
정부 예산 집행이 늘어나지만 돈의 흐름은 느리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가는 화폐 유통속도만 더 떨어뜨릴 것이다. 그 결과는? “내 주머니에 돈이 없다”“내 통장 잔액이 줄어든다”는 개인들만 계속 늘어날 것이다. 빨리 바뀌어야 한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