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700년 지속한 강대국 고구려…말·철·황금 결합한 군수산업이 토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20) 고구려 '강대국의 조건'
제철산업의 발달
말과 철의 결합 '철기병'
'황금의 나라' 고구려
금목걸이·가락지 등 장신구 풍부
제철산업의 발달
말과 철의 결합 '철기병'
'황금의 나라' 고구려
금목걸이·가락지 등 장신구 풍부
고구려가 700년 이상 존재하던 기간, 유라시아 대륙을 뒤흔든 흉노, 유연, 돌궐 등 유목제국들을 비롯해 중국에서는 후한, 위나라, 동진, 북위, 송, 제, 양, 진, 심지어는 수나라까지 수십 개의 나라들이 명멸했다. 앨빈 토플러는 《권력이동(Power Shift)》에서 강대국이 되는 조건으로 ‘힘(power)’ ‘부(wealth)’ ‘지식(knowledge)’을 꼽았다. 고구려에 이 세 가지는 철과 말을 바탕으로 한 군수산업과 황금 무역이었다.
《삼국지》에 따르면 부여는 소를 잘 사육하고 명마를 생산했다. 지린(吉林)성 북부 농안이나 대안지역에서는 지금도 말을 키운다. 나는 1995년 이곳에서 한 마리에 12만원씩, 세 마리를 사서 직접 타고 지안(集安)까지 내려왔다(윤명철 《말타고 고구려가다》). 목동이자 기마민인 주몽은 소수의 기마병으로 홀본부여를 굴복시키고 고구려를 건국했다. 모본왕은 서기 49년에 북평(北平) 어양(漁陽) 등 현재의 베이징 근처까지 3000리(약 1200㎞)를 기마병으로 공격했다. 광개토태왕은 즉위 첫해에 동몽골 일대에 거주하던 거란인들을 공격해 소·말·양 떼를 몰고 개선했다. 북방종족이나 한족과 본격적인 기마전을 벌이려면 말산업을 육성하고, 3월 3일의 국중대회처럼 인재를 뽑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다.
말산업·제철산업 연계한 고구려
235년에는 양쯔강 하류(난징·南京)에 있던 손권의 오나라에 말을 수백 필 주었다. 하지만 사신선이 적어 80필만 싣고 갔다(《삼국지》). 광개토태왕은 산둥반도에 있던 남연에서 물소나 앵무새 등을 수입하고, 말(송나라 책 《태평어람》에는 천리마), 모피, 화살 등을 수출했다. 장수왕은 439년에 800필의 말을 배에 실어 건강(지금의 난징)이 수도인 송나라에 수출했다. 공동의 적인 북위를 압박하는 정치적인 목적과 무역을 겸한 것이다. 또 6세기 후반에는 대흥안령 지역의 실위(室韋)에 철을 수출하고 말을 수입하는 ‘마철(馬鐵)무역’을 했으며, 일부의 말은 초피(담비가죽) 등과 함께 중국의 남쪽 국가에 파는 중계무역을 했다. 고구려에는 말이 얼마나 많았는지 《삼국사기》와 《신당서》에는 당나라가 요동 전투에서 말 5만 마리와 소 5만 마리를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는 경제강국, 군사강국이 되기 위해 말산업을 제철산업과 연결시켰다. 2세기에 들어와 원조선이 활용했던 자원 영토를 더 확장시켰고, 철 생산량을 늘렸다. 압록강 이남의 시중군, 중강군, 개천, 은률, 재령 등과 두만강 유역의 무산에는 풍부한 철광산이 있었다. 또 광개토태왕이 404년에 장악한 안시성·건안성·요동성 지역은 동아시아 최대의 철 생산지였다. 고구려는 풍부해진 철광석을 원료로 기술력을 개선시켜 제철산업을 발전시켰다. 탄소 함유량이 0.5% 안팎인 강철 또는 주강 제품을 생산했고, 창 끝은 탄소 함유량을 0.31% 정도로 만들었다. 섭씨 1500도의 용광로에서 생산한 이런 강철 제품들은 현재의 것과 거의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리태영 《조선광업사》).
유럽 기사보다 위력적인 개마무사
고구려인들이 사용한 무기는 실물들도 발견됐지만 덕흥리고분, 안악 3호분, 개마총, 삼실총, 무용총, 장천 1호분 등에 구체적으로 나온다. 병사들은 투구부터 신발까지 철제로 무장했으며, 통구 12호 고분벽화처럼 미늘갑옷을 입었다. 철화살촉도 앞 끝이 뾰족한 모양, 도끼날처럼 넓적한 모양, 은행잎 모양, 세 가닥 난 낚시고리 모양, 소리 내며 날아가는 명적 등을 제작했다. 또 허리에 차는 1m 남짓한 둥근고리 긴 칼, 30㎝ 정도의 짧은 칼을 비롯해 쇠도끼, 뾰족한 창, 두 갈래로 갈라진 창, 기병을 말에서 끌어내리는 긴 갈고리창 등 다양한 무기를 생산했다.
그런데 말과 철이 결합하면서 철제 재갈과 편자, 등자 등을 사용하는 철기병이 등장했다. 동천왕은 요동지방과 서안평(압록강 하구)을 놓고 위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인 246년에 철기병 5000명을 동원했다. 이후 중무장한 철기병들이 등장하면서 기마전 양상에 혁신이 생겼다. 약수리 고분, 안악 3호분, 쌍영총 등에서 보이는 개마무사(갑옷 입힌 말을 탄 무사)들은 길이 3㎝에서 29㎝의 철편들을 이어 제작한 미늘갑옷을 착용했으므로 3m 넘는 긴 창을 들고 마상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또 타원형, 사다리꼴 모양의 철등자에 끼운 신발 바닥에는 철못들을 박아 보병들을 내려찍는 데 사용했다. 심지어 말도 철제투구, 철제다래, 꼬리장식품 등으로 무장시켜 방어력을 높이면서 위엄도 과시했다. 그로부터 1000여 년 후에 나타난 통짜 갑옷을 입고 장창을 찌른 유럽기사들보다도 더 위력적인 무장이었다.
광개토태왕이 400년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으로 남진한 이후, 신라와 가야는 고구려의 기술을 습득해 비로소 기마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래서 부산의 복천동 11호분이나 함안의 말이산 고분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철제갑옷, 철제투구, 말투구, 말방울, 말갑옷 등의 조각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황금의 나라, 고구려
신라를 ‘황금의 나라’라고 말한다. 아름답고, 뛰어난 금관들이 6점이나 발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황금의 나라는 고구려였다. 우리 조상은 유목민족과 마찬가지로 유난히 금을 좋아했다. 《삼국지》에는 부여의 귀족이 금·은으로 모자와 옷을 장식했으며, 고구려인은 무덤에 부장품을 많이 넣어 금·은 같은 재물이 없어진다고 기록했다. 중국 사서들은 고구려의 귀족이 저택과 모자 의복을 금·은·구슬로 치장하고, 금목걸이·금귀고리·금가락지 등의 장신구를 소유했다고 썼다. 또 무덤에서는 금동등자, 금동재갈, 안장, 금동화살촉 등이 출토됐다.
그런데 고구려에도 금관이 있었다. 1941년에는 평양 진파리 6호분에서 ‘금동 해모양구름무늬 뚫음새김’ 장식품이 나왔다. 동명왕릉에서는 심엽형 보요와 금실 100여 점을 비롯한 금관 장식품이 출토됐다. 4세기 말~5세기 초 고분인 평양 용산리 7호 무덤에서 절풍 모양의 금동관이 출토됐다. 평양 청암리 토성 부근에서는 관테 둘레와 세움 장식이 하나로 이어진 불꽃뚫음무늬 금동관이 출토됐는데, 청동 위에 아말감 도금을 했다. 당연히 수은을 채취해 정교하게 이용하는 화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손영종 《조선수공업사》). 광개토태왕릉에서 직경이 0.2㎜가 채 안 되고 표면에 요철 문양이 새겨진 금실이 나왔다. 주조, 압연, 도금, 합금, 가늘새김 등의 금세공술로 현대에도 재현하기 힘든 기술이다(박선희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그뿐만 아니다. 《신당서》에는 당나라가 645년 요동전투에서 말들과 함께 명광개(금갑, 금휴개) 1만 벌(《구당서》에는 5000벌)을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다. 놀랍게도 고구려 병사들은 황옻칠 또는 금도금을 해서 햇빛을 받으면 반사되는 특수한 갑옷을 착용하고 전투한 것이다.
군수산업으로 부국강병
평안북도 운산 등은 금의 산지였고, 송화강 중류와 상류 주변에는 사금 광산이 많았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이 부여를 점령한 이후 금 생산은 더욱 늘어났을 것이다. 《위서》에는 고구려가 북위에 황금 200근(120㎏), 백은 400근(240㎏)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금과 은 무역을 했다. 왜국의 최초 사찰인 ‘아스카사’는 고마척(高麗尺)을 사용해 고구려 형식으로 지어졌는데, 영양왕은 수나라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황금 300냥(11.25㎏)을 보내 불상을 제조하게 했다. 이어 금과 은을 또 왜국에 보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당태종에게 다량의 백금(은)을 보낸 적이 있다. 중국 기록(《고광록》)에는 은광산에 수백 가구에 이르는 사람이 주거하며 채굴·제련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고구려는 풍부한 금과 은을 다량으로 채굴해 수출하는 한편, 주조·압연·도금·합금·가늘새김 등의 뛰어난 금세공술로 찬란한 황금문화를 발전시켰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주 지안 일대에는 1만2000여 기의 고분이 있다. 광개토태왕릉을 비롯해 직경이 60여m에서 80여m에 이르는 대형 피라미드가 10여 기 이상이다. 토목공학이 발달하고, 경제력이 뛰어난 결과물이다. 700여 년 지속된 고구려의 부국강병은 철과 황금 등의 풍부한 자원과 뛰어난 기술력을 활용한 군수산업 발달 덕분이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
《삼국지》에 따르면 부여는 소를 잘 사육하고 명마를 생산했다. 지린(吉林)성 북부 농안이나 대안지역에서는 지금도 말을 키운다. 나는 1995년 이곳에서 한 마리에 12만원씩, 세 마리를 사서 직접 타고 지안(集安)까지 내려왔다(윤명철 《말타고 고구려가다》). 목동이자 기마민인 주몽은 소수의 기마병으로 홀본부여를 굴복시키고 고구려를 건국했다. 모본왕은 서기 49년에 북평(北平) 어양(漁陽) 등 현재의 베이징 근처까지 3000리(약 1200㎞)를 기마병으로 공격했다. 광개토태왕은 즉위 첫해에 동몽골 일대에 거주하던 거란인들을 공격해 소·말·양 떼를 몰고 개선했다. 북방종족이나 한족과 본격적인 기마전을 벌이려면 말산업을 육성하고, 3월 3일의 국중대회처럼 인재를 뽑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다.
말산업·제철산업 연계한 고구려
235년에는 양쯔강 하류(난징·南京)에 있던 손권의 오나라에 말을 수백 필 주었다. 하지만 사신선이 적어 80필만 싣고 갔다(《삼국지》). 광개토태왕은 산둥반도에 있던 남연에서 물소나 앵무새 등을 수입하고, 말(송나라 책 《태평어람》에는 천리마), 모피, 화살 등을 수출했다. 장수왕은 439년에 800필의 말을 배에 실어 건강(지금의 난징)이 수도인 송나라에 수출했다. 공동의 적인 북위를 압박하는 정치적인 목적과 무역을 겸한 것이다. 또 6세기 후반에는 대흥안령 지역의 실위(室韋)에 철을 수출하고 말을 수입하는 ‘마철(馬鐵)무역’을 했으며, 일부의 말은 초피(담비가죽) 등과 함께 중국의 남쪽 국가에 파는 중계무역을 했다. 고구려에는 말이 얼마나 많았는지 《삼국사기》와 《신당서》에는 당나라가 요동 전투에서 말 5만 마리와 소 5만 마리를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는 경제강국, 군사강국이 되기 위해 말산업을 제철산업과 연결시켰다. 2세기에 들어와 원조선이 활용했던 자원 영토를 더 확장시켰고, 철 생산량을 늘렸다. 압록강 이남의 시중군, 중강군, 개천, 은률, 재령 등과 두만강 유역의 무산에는 풍부한 철광산이 있었다. 또 광개토태왕이 404년에 장악한 안시성·건안성·요동성 지역은 동아시아 최대의 철 생산지였다. 고구려는 풍부해진 철광석을 원료로 기술력을 개선시켜 제철산업을 발전시켰다. 탄소 함유량이 0.5% 안팎인 강철 또는 주강 제품을 생산했고, 창 끝은 탄소 함유량을 0.31% 정도로 만들었다. 섭씨 1500도의 용광로에서 생산한 이런 강철 제품들은 현재의 것과 거의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리태영 《조선광업사》).
유럽 기사보다 위력적인 개마무사
고구려인들이 사용한 무기는 실물들도 발견됐지만 덕흥리고분, 안악 3호분, 개마총, 삼실총, 무용총, 장천 1호분 등에 구체적으로 나온다. 병사들은 투구부터 신발까지 철제로 무장했으며, 통구 12호 고분벽화처럼 미늘갑옷을 입었다. 철화살촉도 앞 끝이 뾰족한 모양, 도끼날처럼 넓적한 모양, 은행잎 모양, 세 가닥 난 낚시고리 모양, 소리 내며 날아가는 명적 등을 제작했다. 또 허리에 차는 1m 남짓한 둥근고리 긴 칼, 30㎝ 정도의 짧은 칼을 비롯해 쇠도끼, 뾰족한 창, 두 갈래로 갈라진 창, 기병을 말에서 끌어내리는 긴 갈고리창 등 다양한 무기를 생산했다.
그런데 말과 철이 결합하면서 철제 재갈과 편자, 등자 등을 사용하는 철기병이 등장했다. 동천왕은 요동지방과 서안평(압록강 하구)을 놓고 위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인 246년에 철기병 5000명을 동원했다. 이후 중무장한 철기병들이 등장하면서 기마전 양상에 혁신이 생겼다. 약수리 고분, 안악 3호분, 쌍영총 등에서 보이는 개마무사(갑옷 입힌 말을 탄 무사)들은 길이 3㎝에서 29㎝의 철편들을 이어 제작한 미늘갑옷을 착용했으므로 3m 넘는 긴 창을 들고 마상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또 타원형, 사다리꼴 모양의 철등자에 끼운 신발 바닥에는 철못들을 박아 보병들을 내려찍는 데 사용했다. 심지어 말도 철제투구, 철제다래, 꼬리장식품 등으로 무장시켜 방어력을 높이면서 위엄도 과시했다. 그로부터 1000여 년 후에 나타난 통짜 갑옷을 입고 장창을 찌른 유럽기사들보다도 더 위력적인 무장이었다.
광개토태왕이 400년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으로 남진한 이후, 신라와 가야는 고구려의 기술을 습득해 비로소 기마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래서 부산의 복천동 11호분이나 함안의 말이산 고분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철제갑옷, 철제투구, 말투구, 말방울, 말갑옷 등의 조각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황금의 나라, 고구려
신라를 ‘황금의 나라’라고 말한다. 아름답고, 뛰어난 금관들이 6점이나 발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황금의 나라는 고구려였다. 우리 조상은 유목민족과 마찬가지로 유난히 금을 좋아했다. 《삼국지》에는 부여의 귀족이 금·은으로 모자와 옷을 장식했으며, 고구려인은 무덤에 부장품을 많이 넣어 금·은 같은 재물이 없어진다고 기록했다. 중국 사서들은 고구려의 귀족이 저택과 모자 의복을 금·은·구슬로 치장하고, 금목걸이·금귀고리·금가락지 등의 장신구를 소유했다고 썼다. 또 무덤에서는 금동등자, 금동재갈, 안장, 금동화살촉 등이 출토됐다.
그런데 고구려에도 금관이 있었다. 1941년에는 평양 진파리 6호분에서 ‘금동 해모양구름무늬 뚫음새김’ 장식품이 나왔다. 동명왕릉에서는 심엽형 보요와 금실 100여 점을 비롯한 금관 장식품이 출토됐다. 4세기 말~5세기 초 고분인 평양 용산리 7호 무덤에서 절풍 모양의 금동관이 출토됐다. 평양 청암리 토성 부근에서는 관테 둘레와 세움 장식이 하나로 이어진 불꽃뚫음무늬 금동관이 출토됐는데, 청동 위에 아말감 도금을 했다. 당연히 수은을 채취해 정교하게 이용하는 화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손영종 《조선수공업사》). 광개토태왕릉에서 직경이 0.2㎜가 채 안 되고 표면에 요철 문양이 새겨진 금실이 나왔다. 주조, 압연, 도금, 합금, 가늘새김 등의 금세공술로 현대에도 재현하기 힘든 기술이다(박선희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그뿐만 아니다. 《신당서》에는 당나라가 645년 요동전투에서 말들과 함께 명광개(금갑, 금휴개) 1만 벌(《구당서》에는 5000벌)을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다. 놀랍게도 고구려 병사들은 황옻칠 또는 금도금을 해서 햇빛을 받으면 반사되는 특수한 갑옷을 착용하고 전투한 것이다.
군수산업으로 부국강병
평안북도 운산 등은 금의 산지였고, 송화강 중류와 상류 주변에는 사금 광산이 많았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이 부여를 점령한 이후 금 생산은 더욱 늘어났을 것이다. 《위서》에는 고구려가 북위에 황금 200근(120㎏), 백은 400근(240㎏)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금과 은 무역을 했다. 왜국의 최초 사찰인 ‘아스카사’는 고마척(高麗尺)을 사용해 고구려 형식으로 지어졌는데, 영양왕은 수나라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황금 300냥(11.25㎏)을 보내 불상을 제조하게 했다. 이어 금과 은을 또 왜국에 보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당태종에게 다량의 백금(은)을 보낸 적이 있다. 중국 기록(《고광록》)에는 은광산에 수백 가구에 이르는 사람이 주거하며 채굴·제련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고구려는 풍부한 금과 은을 다량으로 채굴해 수출하는 한편, 주조·압연·도금·합금·가늘새김 등의 뛰어난 금세공술로 찬란한 황금문화를 발전시켰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주 지안 일대에는 1만2000여 기의 고분이 있다. 광개토태왕릉을 비롯해 직경이 60여m에서 80여m에 이르는 대형 피라미드가 10여 기 이상이다. 토목공학이 발달하고, 경제력이 뛰어난 결과물이다. 700여 년 지속된 고구려의 부국강병은 철과 황금 등의 풍부한 자원과 뛰어난 기술력을 활용한 군수산업 발달 덕분이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