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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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경기 이천의 LG인화원. LG화학 임원 워크숍이 열렸다. 220여 명의 LG화학 임원이 글로벌 기업 3M에서 온 최고경영자(CEO)를 처음으로 공식 대면하는 자리였다. 워크숍에 참석한 임원들은 3M에 평직원으로 입사해 한국인 최초로 수석부회장까지 오른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의 첫 일성에 귀를 기울였다. 신 부회장이 이날 꺼낸 화두는 ‘기본’과 ‘원칙’이었다.

기본과 원칙 중시하는 CEO

신 부회장은 “기업은 고객과 주주, 임직원, 사회에 대한 책임이 막중하다”며 “타협할 수 없는 가치관을 조직에 뿌리내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윤리경영을 기반으로 하는 LG그룹의 행동 방식인 ‘정도경영’ 실천을 주문한 것이다.

신 부회장의 경영철학은 임원 워크숍 전에도 드러났다. 지난해 4월 전남 여수에 있는 화학회사들의 공장에서 대기오염물질 배출 조작 사태가 터졌을 때다. 환경부는 당시 오염물질 배출량을 조작한 측정 대행업체와 이를 의뢰한 여수 산업단지 내 사업장들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여수에 공장을 둔 많은 화학회사 가운데 가장 먼저 사과문을 발표한 곳은 LG화학이었다.

신 부회장은 당시 “이번 사태는 LG화학의 경영이념과 나의 경영철학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으로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고, 어떤 경우에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사과했다. 이어 “이번 사태에 대해 통렬히 반성하고 모든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덧붙였다. 신 부회장은 관련 생산시설을 전격 폐쇄하는 결단을 내렸다. 해당 생산시설의 연매출은 1000억원 수준이었다.

지난해 LG화학의 소송 제기로 시작된 SK이노베이션과의 배터리 분쟁도 신 부회장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을 영업비밀 침해 건으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와 델라웨어주 연방법원 등에 제소했다. 당시 회사 안팎에서 소송 제기를 말리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신 부회장은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그는 최근 사석에서 “전기차 배터리를 생산하는 공정 하나하나와 원재료 구입처 목록, 생산시설 배치도 등은 LG화학이 수십 년간 온갖 오류를 수정해가며 쌓아올린 것”이라며 “회사의 영업비밀 하나 지키지 못한다면 CEO는 필요없는 존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글로벌 회사들은 영업비밀을 침해당하면 상대 회사와 법대로 풀어가면서 다른 분야에선 협력도 하는데 한국에선 그게 쉽지 않다”며 “이번 기회에 그렇게 해볼 것”이라고 했다. SK이노베이션에 대한 소송 건과는 별개로 협력할 분야에서는 손을 잡겠다는 의미다.

“글로벌 스탠더드 갖춘 기업으로”

신 부회장이 기본과 원칙을 강조하는 것은 LG화학을 글로벌 스탠더드를 갖춘 글로벌 톱 수준의 기업으로 키워내기 위해서다. 그는 지난해 7월 취임 후 처음으로 연 기자간담회에서 “기업이 아무리 차별화한 경쟁력을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려면 기업윤리, 준법정신, 환경안전, 품질을 포함한 기본 원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원칙을 갖춘 뒤에야 지속 가능성을 확보해 글로벌 기업으로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신 부회장의 이런 인식은 글로벌 기업인 3M에서의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1984년 한국3M에 입사해 기술지원담당 업무를 맡았다. 이후 3M 글로벌 전자재료사업부 부사장, 산업용 비즈니스총괄 수석부사장 등을 거쳤다. 2017년엔 3M 글로벌 연구개발(R&D)을 비롯해 전략 및 사업개발, 제조물류본부 등을 모두 책임지는 수석부회장에 올랐다. LG화학 관계자는 “오랜 시간 글로벌 톱 기업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3M이란 회사에서 익힌 ‘자세’가 몸에 밴 듯하다”며 “기술력을 발판 삼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 중인 LG화학에 새로운 혁신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밸류체인 구축해 100년 기업으로”

신 부회장의 꿈은 LG화학을 3M처럼 키우는 데 있다. 그가 임직원에게 지속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1902년 미국 미네소타에서 광업회사로 출발한 3M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생산하는 제품 종류만 5만5000여 개에 이른다.

신 부회장은 지난달 신년사에서 “지속 가능성은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라 기업의 생존 조건”이라며 “지속 가능성을 우리의 핵심 경쟁력으로 삼자”고 말했다. 그는 “원료 조달, 생산, 소비, 폐기로 이어지는 전 밸류체인(가치사슬) 영역에서 지속 가능성을 LG화학만의 차별화한 가치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며 “전 사업 분야에서 지속 가능 경영을 강화할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했다.

현장 경영과 소통 중시

신 부회장은 취임 후 현장을 많이 찾고 있다. 올 들어선 지난달 대전 기술연구원을 시작으로 충북 오창공장, 경기 파주공장, 충남 대산공장 등 국내 사업장을 방문했다. 독일 폴란드 중국 미국 등지의 해외 사업장도 들렀다. 취임 후 1년 동안 신 부회장이 이동한 거리는 18만7160㎞로, 지구 다섯 바퀴에 가깝다.

신 부회장이 현장을 자주 찾는 것은 직원들과의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회사 관계자는 “신 부회장은 국내외 현장을 방문할 때마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개별 과제를 주문한다”며 “개별 과제 주문은 고객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3M 본사 근무 당시 미국 시장을 제대로 알기 위해 3개월간 미국 전역의 도시를 방문하면서 현장 경영의 중요성을 체득했다는 설명이다.

신 부회장은 “리더가 사무실에 앉아 ‘고객이 중요하다. 고객과 시간을 많이 보내라’고 백 번 말한들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며 “조직 구성원은 리더의 말을 따르지 않고, 리더의 행동을 따른다”고 임원들에게 수시로 강조한다.

신 부회장은 앞으로 직원들과 소통하는 기회를 더 늘릴 계획이다. 직원 중에서도 ‘2030 밀레니얼 세대’와의 만남을 통해 젊은 세대 직원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는 구상이다.

■ 신학철 LG화학 부회장 약력

△1957년 충북 괴산 출생
△1975년 청주고 졸업
△1979년 서울대 기계공학과 졸업
△1984년 한국3M 입사
△1991년 한국3M 소비자사업본부장
△1995년 3M필리핀 사장
△1999년 3M 연마재사업 부사장
△2005년 3M 산업용 비즈니스총괄 수석부사장
△2006년 3M 산업 및 운송비즈니스 수석부회장
△2011년 3M 해외사업부문 수석부회장
△2017년 3M 글로벌R&D, 전략 및 사업개발 등 총괄책임 수석부회장
△2019년 LG화학 부회장


김재후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