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곳당 10만원 쓰는 꼴
자문사 '울며 겨자먹기' 입찰
국내 시장 규모 10억도 안돼
국내 주식시장에서만 시가총액의 7%에 달하는 132조원의 자금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한 해 동안 의결권 자문에 책정한 예산이다. 국민연금이 투자한 국내 상장사는 800여 개. 의결권 자문사들은 상장사 한 곳당 10만원이라는 헐값에도 생존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계약 따내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최근 국내 주식 의안분석 전문기관으로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을 선정했다. 대신지배구조연구소와의 입찰 경쟁을 거쳐 나온 결과다. 입찰을 거치면서 단가는 1억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KCGS는 향후 1년간 800여 개 상장사의 정기 및 임시주총에 올라오는 모든 안건에 대한 분석은 물론 의결권 행사 지침 등을 국민연금에 제공해야 한다.
국민연금은 수탁자책임 활동의 다른 한 축인 ESG(책임투자)평가 자문에는 9200만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ESG평가는 기관투자가들이 투자 기업을 환경(E), 지속가능성(S), 지배구조(G) 측면에서 평가해 등급을 매기는 것이다. ESG 등급이 낮거나 급격히 떨어진 기업은 국민연금의 주주활동 대상인 ‘중점관리대상’에 선정된다. 100조원이 넘는 지분을 무기로 주주활동에 나서면서 평가의 전문성과 판단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투자엔 약 2억원밖에 쓰지 않는 셈이다.
국민연금이 국내 의결권 자문사에 대한 보수를 낮게 유지하는 이유는 글로벌 시장을 장악한 미국계 자문사 ISS가 ‘종목당 100달러’라는 가격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 국민연금은 투자 중인 해외 기업의 의결권 자문사로 ISS를 이용하고 있다.
한 의결권 자문사 관계자는 “한 기업에 대한 자문 보고서를 1000개가 넘는 고객에 파는 ISS와 많아야 10~20곳 국내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국내 자문사를 같은 선상에 놓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민연금이 규정한 가격이 시장 표준가가 되면서 국내 의결권 자문 시장은 ‘구멍가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의결권 자문으로는 돈이 안 되니 양질의 인력을 뽑을 수 없고 결과적으로 보고서 품질도 나빠지는 악순환 구조에 빠졌다”고 토로했다. 업계에 따르면 영리 목적으로 의결권 자문업을 영위하는 곳은 KCGS와 대신지배구조연구소, 서스틴베스트 등 세 곳으로, 국내 의결권 자문 시장 규모는 10억원이 채 안 되는 실정이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