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 속에 자란 두 분단국 지도자의 '평행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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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태 명예교수 '빌리 브란트와 김대중' 출간
너무나 유사한 점이 많은 독일과 한국 정치 지도자의 인생과 정책, 특히 분단 조국의 통일 정책을 분석한 '빌리 브란트와 김대중'(성균관대학교출판부)이 출간됐다.
독일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독일 현대사 전문가 최영태 전남대학교 명예교수가 썼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한 나라의 지도자로 성장해 탁월한 업적을 남긴 정치인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브란트와 김대중의 생애는 '유사함'이라고 간단히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점에서 일치한다.
저자 표현을 빌리면 둘의 인생은 '데칼코마니' 같았다.
책은 이들이 각각 사생아와 서자로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이 속한 사회의 아웃사이더였다고 설명한다.
사생아였던 브란트는 어머니 성을 따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이라는 이름으로 출생 신고됐다.
빌리 브란트는 나치 정권을 피해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좌익 언론인으로 활동할 때 쓴 가명이었으나 1948년 이 이름으로 공식 개명했다.
가족 중 누구도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해 주지 않았고 브란트도 묻지 않았다.
브란트는 훗날 자서전에 30세가 넘어 딱 한 번, 그것도 편지로 아버지에 관해 물었고 어머니는 '함부르크 태생 존 묄러'라는 쪽지를 건넨 것이 아버지에 관한 대화의 전부였다고 썼다.
그나마 어머니도 외할아버지의 친딸이 아니었다.
저자는 아마도 중세 '초야권' 전통이 남아있던 메클렌부르크 출신인 외할머니가 결혼 전 영주에게 불려가 하룻밤을 보내는 동안 브란트 어머니를 잉태한 것이라고 짐작한다.
이 같은 가족사는 그의 개인적 불행에 그치지 않았다.
정적들이 끊임없이 그의 가족사를 들추며 공격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에게도 내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가족사가 있었다.
사후 발간된 자서전에서 "아버지는 부인이 두 사람이었고, 내 어머니는 둘째 부인이었다"고 썼다.
정적들로부터 가족사에 관해 공격을 받은 것은 브란트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자신의 출생에 관한 온갖 루머에 시달리면서도 생전에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평생 '작은댁'으로 산 어머니 명예를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두 사람은 인생의 출발점에서부터 국외자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후 걷게 되는 인생행로와 정치적 궤적도 너무나 닮아 놀라울 정도다.
브란트가 서베를린이라는 당시 서독의 섬 같은 변방에서 정치를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김대중 역시 한국의 정치적 변방이라고 할 호남에서 정치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두 사람 모두 선거에서 숱한 패배를 경험했고 오랫동안 야당 대표를 지낸 것이나 개혁적·진보적 정치 성향으로 색깔 공세의 표적이 된 것도 똑같다.
브란트가 청년기 14년간 망명 생활을 한 것과 같이 김대중도 투옥과 연금, 사형선고, 두 차례 망명 등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이혼과 사별 등을 겪으며 가정사가 순탄치 못한 것도 공통점이다.
이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브란트는 세 번, 김대중은 네 번의 도전 끝에 각각 모국에서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내면서 총리와 대통령이 됐다.
두 사람 모두 자기 나라에서 대학 졸업장 없이 최고 지도자에 오른 최초의 인사다.
학력의 부족을 폭넓은 독서로 보완한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당연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특히 두 사람이 좋아하고 천착한 학문 분야는 역사였다.
인생의 경험이 비슷하다고 해서 생각과 신념이 같을 수는 없고, 정치인인 경우 정책 방향이 같으리라는 법도 없다.
그러나 브란트와 김대중의 정치철학은 유사한 점이 많고 두 사람 모두에게 가장 중요했던 통일 정책에서는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좁게는 동서독과 남북한의 긴장 완화와 공존을 모색하고, 더 넓게는 외교적 지평을 주변 국가로 확장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지금은 새로운 것도 없는 관점이지만 이들이 처음 이 방향을 제시했을 때만 해도 기존 사고의 틀을 깨는 파격적 제안이었고 그만큼 격렬한 반대공세에 직면해야 했다.
'동방정책'과 '햇볕정책' 사이에는 공통점 못지않게 차이도 두드러진다.
브란트는 '통일'이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정책은 통일보다는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평화 구현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에게 통일은 어쩌면 먼 미래의 과제였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역사관의 바탕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한 반성이 깔려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김대중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통일문제를 거론했다.
그는 독일과는 달리 우리 민족의 분단은 순전히 타의에 의한 것이며, 우리는 1천300년 이상 통일을 유지해온 민족임을 강조했다.
저자는 두 사람이 추진한 통일정책의 결과적 차이에도 주목한다.
서독에서도 '동방정책'에 대한 반대는 거셌지만, 브란트 후임자인 같은 사민당 출신 헬무트 슈미트는 물론 그 뒤를 이은 기민당 출신 헬무트 콜 등 역대 독일 총리들은 '동방정책' 기조를 계승했고 동서독 교류와 동질성 회복 정책은 정권과 상관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 결과 아마도 브란트가 생전에 보지 못할 것으로 여겼을 독일 통일은 1990년 마침내 현실이 됐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후임 정권들이 '햇볕정책'을 이어가지 못했고 남북관계는 지금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저자는 아쉬워한다.
608쪽. 3만5천원. /연합뉴스
너무나 유사한 점이 많은 독일과 한국 정치 지도자의 인생과 정책, 특히 분단 조국의 통일 정책을 분석한 '빌리 브란트와 김대중'(성균관대학교출판부)이 출간됐다.
독일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독일 현대사 전문가 최영태 전남대학교 명예교수가 썼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한 나라의 지도자로 성장해 탁월한 업적을 남긴 정치인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브란트와 김대중의 생애는 '유사함'이라고 간단히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점에서 일치한다.
저자 표현을 빌리면 둘의 인생은 '데칼코마니' 같았다.
책은 이들이 각각 사생아와 서자로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이 속한 사회의 아웃사이더였다고 설명한다.
사생아였던 브란트는 어머니 성을 따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이라는 이름으로 출생 신고됐다.
빌리 브란트는 나치 정권을 피해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좌익 언론인으로 활동할 때 쓴 가명이었으나 1948년 이 이름으로 공식 개명했다.
가족 중 누구도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해 주지 않았고 브란트도 묻지 않았다.
브란트는 훗날 자서전에 30세가 넘어 딱 한 번, 그것도 편지로 아버지에 관해 물었고 어머니는 '함부르크 태생 존 묄러'라는 쪽지를 건넨 것이 아버지에 관한 대화의 전부였다고 썼다.
그나마 어머니도 외할아버지의 친딸이 아니었다.
저자는 아마도 중세 '초야권' 전통이 남아있던 메클렌부르크 출신인 외할머니가 결혼 전 영주에게 불려가 하룻밤을 보내는 동안 브란트 어머니를 잉태한 것이라고 짐작한다.
이 같은 가족사는 그의 개인적 불행에 그치지 않았다.
정적들이 끊임없이 그의 가족사를 들추며 공격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에게도 내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가족사가 있었다.
사후 발간된 자서전에서 "아버지는 부인이 두 사람이었고, 내 어머니는 둘째 부인이었다"고 썼다.
정적들로부터 가족사에 관해 공격을 받은 것은 브란트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자신의 출생에 관한 온갖 루머에 시달리면서도 생전에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평생 '작은댁'으로 산 어머니 명예를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두 사람은 인생의 출발점에서부터 국외자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후 걷게 되는 인생행로와 정치적 궤적도 너무나 닮아 놀라울 정도다.
브란트가 서베를린이라는 당시 서독의 섬 같은 변방에서 정치를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김대중 역시 한국의 정치적 변방이라고 할 호남에서 정치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두 사람 모두 선거에서 숱한 패배를 경험했고 오랫동안 야당 대표를 지낸 것이나 개혁적·진보적 정치 성향으로 색깔 공세의 표적이 된 것도 똑같다.
브란트가 청년기 14년간 망명 생활을 한 것과 같이 김대중도 투옥과 연금, 사형선고, 두 차례 망명 등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이혼과 사별 등을 겪으며 가정사가 순탄치 못한 것도 공통점이다.
이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브란트는 세 번, 김대중은 네 번의 도전 끝에 각각 모국에서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내면서 총리와 대통령이 됐다.
두 사람 모두 자기 나라에서 대학 졸업장 없이 최고 지도자에 오른 최초의 인사다.
학력의 부족을 폭넓은 독서로 보완한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당연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특히 두 사람이 좋아하고 천착한 학문 분야는 역사였다.
인생의 경험이 비슷하다고 해서 생각과 신념이 같을 수는 없고, 정치인인 경우 정책 방향이 같으리라는 법도 없다.
그러나 브란트와 김대중의 정치철학은 유사한 점이 많고 두 사람 모두에게 가장 중요했던 통일 정책에서는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좁게는 동서독과 남북한의 긴장 완화와 공존을 모색하고, 더 넓게는 외교적 지평을 주변 국가로 확장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지금은 새로운 것도 없는 관점이지만 이들이 처음 이 방향을 제시했을 때만 해도 기존 사고의 틀을 깨는 파격적 제안이었고 그만큼 격렬한 반대공세에 직면해야 했다.
'동방정책'과 '햇볕정책' 사이에는 공통점 못지않게 차이도 두드러진다.
브란트는 '통일'이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정책은 통일보다는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평화 구현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에게 통일은 어쩌면 먼 미래의 과제였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역사관의 바탕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한 반성이 깔려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김대중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통일문제를 거론했다.
그는 독일과는 달리 우리 민족의 분단은 순전히 타의에 의한 것이며, 우리는 1천300년 이상 통일을 유지해온 민족임을 강조했다.
저자는 두 사람이 추진한 통일정책의 결과적 차이에도 주목한다.
서독에서도 '동방정책'에 대한 반대는 거셌지만, 브란트 후임자인 같은 사민당 출신 헬무트 슈미트는 물론 그 뒤를 이은 기민당 출신 헬무트 콜 등 역대 독일 총리들은 '동방정책' 기조를 계승했고 동서독 교류와 동질성 회복 정책은 정권과 상관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 결과 아마도 브란트가 생전에 보지 못할 것으로 여겼을 독일 통일은 1990년 마침내 현실이 됐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후임 정권들이 '햇볕정책'을 이어가지 못했고 남북관계는 지금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저자는 아쉬워한다.
608쪽. 3만5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