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가 황호섭, 마법처럼 번지는 色방울…"무한의 우주 수놓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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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가 황호섭, 한경갤러리서 초대전
20대 중반에 파리로 건너가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 졸업
세계적 화상 장 푸르니에 만나
전속작가로 활동하며 이름 알려
전위적 예술가들과도 교류
20대 중반에 파리로 건너가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 졸업
세계적 화상 장 푸르니에 만나
전속작가로 활동하며 이름 알려
전위적 예술가들과도 교류
캔버스에 떨군 물감이 원을 그리며 번져나간다. 빨강, 노랑, 파랑, 보라, 초록, 주황, 검정 등 색색의 원들이 수없이 겹쳐진다. 물감이 번져간 위에 뿌려진 철분, 금가루, 은가루, 운모, 망간 등 다양한 광물성 안료들은 저마다 빛을 발하며 이미지를 연출한다. 코발트블루의 포도송이, 겹겹이 펼쳐진 산수화, 주황색이나 보라색 열대 과일의 단면, 단단한 암회색 바위 안에 응축된 알맹이 같은 모습…. 지구를 우주 멀리서 바라본 듯도 하다. 암회색 구형의 표면에 아마존 열대우림을 담은 것 같기도 하고, 초록 숲으로 둘러싸인 지구 중심부에서 노랗게 달궈진 마그마가 이글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난 2일부터 서울 청파로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서양화가 황호섭 초대전 ‘마법의 순간’에 걸린 그림들이다. 작가는 하얀 바탕에 떨군 물감을 공기분사기(컴프레서)로 불어 캔버스에 뿌려지고 흩어지는 대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물감의 색과 양, 분사기의 압력 및 방향, 캔버스와의 거리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가 생성된다. 바람을 맞은 물감은 번지고, 튀고, 엉키고, 고이고, 흘러내린다. 언뜻 거친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매우 섬세하고 정교한 작업이다.
크고 작은 원들이 만들어내는 형상들은 물리학의 프랙탈(fractal)이나 나노입자를 연상케 한다. 각각의 원형은 그 자체로 독립적 세계인 동시에 서로 연결된 우주다. 세상 만물은 서로 얽혀있는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불교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을 떠올리게도 한다.
황호섭 화백(65)의 오랜 지기(知己)인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의 피에르 캉봉 수석큐레이터는 이를 ‘동그라미 놀이’라고 불렀다. 우주의 별처럼 무수한 둥근 개체들이 작가가 이끄는 대로 우연히 만나거나 포개지면서 요술을 부리듯 기기묘묘한 형상을 빚어낸다는 것이다. 그가 “황호섭의 ‘마법의 순간’ 연작은 추상적인 동시에 연상적”이라고 하는 이유다.
사실 황 화백은 ‘붓을 놓은’ 지 오래다.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 유학 시절인 1980년대 초부터 붓 대신 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1990년대부터는 색색의 아크릴 물감을 손으로 칠한 후 물로 씻고 마르면 그 위에 다시 칠하고 씻고 말리는 작업을 반복했다. 물감의 90%는 씻겨 나가고 완성하기까지 시간도 많이 걸리는 고비용 작업. 하지만 우연성이 빚어내는 추상회화는 오묘했다. 영롱하고 무한한 우주, 밤하늘의 은하수가 화면에 펼쳐졌다.
4각의 화폭을 벗어나 조각, 설치작업도 했다. 천을 구기고 만진 후 레진으로 고정시켜 한지 조형처럼 여성의 몸을 입체적으로 드러나게 했고, 구리 망(網)을 손으로 다듬고 휘고 눌러서 자비로운 불상의 얼굴에 베일처럼 둘러서 도발적 여인의 이미지를 중첩시킨 ‘붓다 시리즈’도 선보였다. 빛의 반사에 따라 달라지는 부처의 얼굴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드러냈다.
20대 중반에 파리로 건너간 황 화백은 일찍부터 프랑스 명문 화랑 장 푸르니에 갤러리의 전속 작가로 활약하며 이름을 알렸다. 무명의 미술학교 학생이던 그가 1984년 졸업작품전에 유럽 굴지의 화상이던 장 푸르니에를 초대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어느 날 우연히 어떤 화랑에 들어가 그림을 둘러봤는데 그게 장 푸르니에 갤러리였어요. 그런 것도 모른 채 대뜸 직원에게 주인을 좀 불러달라고 하니 다들 머리가 이상한 사람 취급했죠. 그때 마침 지나가던 푸르니에가 ‘왜 그러느냐’고 해서 곧 졸업작품전을 하는데 와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하하.”
푸르니에와의 만남은 그의 미술인생을 확 바꿨다. 경제적인 지원은 물론 당대의 전위적 조류를 이끈 예술가들과 교류도 이어졌다. 프랑스 문화부가 지원하는 작업실도 제공받았다. 그의 예술성을 높이 산 김환기 화백의 부인 김향안 여사를 비롯해 박명자 갤러리 현대 회장, 정기용 원화랑 회장 등도 그를 적극 지원했다. 1995년 뉴욕 전시 때는 고(故) 백남준 선생이 휠체어를 타고 나와 그를 격려했다. 윤영달 크라운해태홀딩스 회장도 그의 든든한 지지자다.
황 화백의 명성은 국제적이다. 프랑스 미국 영국 등 해외 유명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열었다.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연 개인전과 단체전은 100회에 육박한다. 파리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까르띠에재단, 국립현대미술관진흥재단, BNP파리바은행, 휴렛팩커드재단과 서울의 국립현대미술관, 환기재단, 서울·대구 시립미술관 등 다양한 기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경기 청평의 아틀리에에서 작업한 ‘마법의 순간’ 연작 27점을 걸었다. 전시 제목이자 연작의 제목인 ‘마법의 순간’은 황 화백과 절친한 재즈가수 나윤선의 대표곡 ‘모멘토 마지코(Momento Magico)’에서 따왔다. 색채가 마법처럼 번져가며 무한의 우주를 탄생시키는 그의 작품은 오는 26일까지 전시된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지난 2일부터 서울 청파로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서양화가 황호섭 초대전 ‘마법의 순간’에 걸린 그림들이다. 작가는 하얀 바탕에 떨군 물감을 공기분사기(컴프레서)로 불어 캔버스에 뿌려지고 흩어지는 대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물감의 색과 양, 분사기의 압력 및 방향, 캔버스와의 거리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가 생성된다. 바람을 맞은 물감은 번지고, 튀고, 엉키고, 고이고, 흘러내린다. 언뜻 거친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매우 섬세하고 정교한 작업이다.
크고 작은 원들이 만들어내는 형상들은 물리학의 프랙탈(fractal)이나 나노입자를 연상케 한다. 각각의 원형은 그 자체로 독립적 세계인 동시에 서로 연결된 우주다. 세상 만물은 서로 얽혀있는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불교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을 떠올리게도 한다.
황호섭 화백(65)의 오랜 지기(知己)인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의 피에르 캉봉 수석큐레이터는 이를 ‘동그라미 놀이’라고 불렀다. 우주의 별처럼 무수한 둥근 개체들이 작가가 이끄는 대로 우연히 만나거나 포개지면서 요술을 부리듯 기기묘묘한 형상을 빚어낸다는 것이다. 그가 “황호섭의 ‘마법의 순간’ 연작은 추상적인 동시에 연상적”이라고 하는 이유다.
사실 황 화백은 ‘붓을 놓은’ 지 오래다.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 유학 시절인 1980년대 초부터 붓 대신 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1990년대부터는 색색의 아크릴 물감을 손으로 칠한 후 물로 씻고 마르면 그 위에 다시 칠하고 씻고 말리는 작업을 반복했다. 물감의 90%는 씻겨 나가고 완성하기까지 시간도 많이 걸리는 고비용 작업. 하지만 우연성이 빚어내는 추상회화는 오묘했다. 영롱하고 무한한 우주, 밤하늘의 은하수가 화면에 펼쳐졌다.
4각의 화폭을 벗어나 조각, 설치작업도 했다. 천을 구기고 만진 후 레진으로 고정시켜 한지 조형처럼 여성의 몸을 입체적으로 드러나게 했고, 구리 망(網)을 손으로 다듬고 휘고 눌러서 자비로운 불상의 얼굴에 베일처럼 둘러서 도발적 여인의 이미지를 중첩시킨 ‘붓다 시리즈’도 선보였다. 빛의 반사에 따라 달라지는 부처의 얼굴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드러냈다.
20대 중반에 파리로 건너간 황 화백은 일찍부터 프랑스 명문 화랑 장 푸르니에 갤러리의 전속 작가로 활약하며 이름을 알렸다. 무명의 미술학교 학생이던 그가 1984년 졸업작품전에 유럽 굴지의 화상이던 장 푸르니에를 초대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어느 날 우연히 어떤 화랑에 들어가 그림을 둘러봤는데 그게 장 푸르니에 갤러리였어요. 그런 것도 모른 채 대뜸 직원에게 주인을 좀 불러달라고 하니 다들 머리가 이상한 사람 취급했죠. 그때 마침 지나가던 푸르니에가 ‘왜 그러느냐’고 해서 곧 졸업작품전을 하는데 와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하하.”
푸르니에와의 만남은 그의 미술인생을 확 바꿨다. 경제적인 지원은 물론 당대의 전위적 조류를 이끈 예술가들과 교류도 이어졌다. 프랑스 문화부가 지원하는 작업실도 제공받았다. 그의 예술성을 높이 산 김환기 화백의 부인 김향안 여사를 비롯해 박명자 갤러리 현대 회장, 정기용 원화랑 회장 등도 그를 적극 지원했다. 1995년 뉴욕 전시 때는 고(故) 백남준 선생이 휠체어를 타고 나와 그를 격려했다. 윤영달 크라운해태홀딩스 회장도 그의 든든한 지지자다.
황 화백의 명성은 국제적이다. 프랑스 미국 영국 등 해외 유명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열었다.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연 개인전과 단체전은 100회에 육박한다. 파리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까르띠에재단, 국립현대미술관진흥재단, BNP파리바은행, 휴렛팩커드재단과 서울의 국립현대미술관, 환기재단, 서울·대구 시립미술관 등 다양한 기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경기 청평의 아틀리에에서 작업한 ‘마법의 순간’ 연작 27점을 걸었다. 전시 제목이자 연작의 제목인 ‘마법의 순간’은 황 화백과 절친한 재즈가수 나윤선의 대표곡 ‘모멘토 마지코(Momento Magico)’에서 따왔다. 색채가 마법처럼 번져가며 무한의 우주를 탄생시키는 그의 작품은 오는 26일까지 전시된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