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정치적 정당성은 대표성을 창출하는 선거 시스템보다 정부의 질(質)에 달렸다.”

정치학자 보 로스슈타인이 쓴 ‘정치적 정당성의 창출: 선거 민주주의 대(對) 정부의 질’ 논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선거 민주주의의 확립이 정치적 정당성을 창출하는 열쇠라고 하지만, 실제 정치적 정당성은 정치체제의 투입 측면이 아니라 산출(성과라고 해도 될 듯) 측면에 의해 창출·유지·붕괴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주장이다.

생각할수록 무서운 말이다. 선거 민주주의가 이미 확립된 나라에서 정치권력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무능한 정부’가 아니라 ‘유능한 정부’여야 한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유능한 정부인지 무능한 정부인지 그 진면목은 국가적 위기가 닥칠 때 그대로 드러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위기관리 능력이야말로 정부의 유·무능을 판단할 가장 중요한 잣대이기 때문이다. 과거 정권을 ‘불통’이라고 비판했던 지금 정권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문재인 대통령이 몇 일 전 국무회의에서 마스크 대란과 관련해 “과연 얼마나 절박한 문제로 인식했느냐”며 관련 부처를 질타했다. “대단히 심각하다고 인식하라. 정부가 감수성을 느꼈는지 의심스럽다. 해법을 찾는데 최선을 다하라”는 말도 했다. 코로나19 사태의 전개를 보면서 왜 처음부터 이러지 못했는지 안타깝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감염병 발생시 위기 소통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국민과의 지속적인 소통을 통한 신뢰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효과적인 소통을 위해 먼저 국민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귀담아 듣고 제대로 파악할 것도 주문하고 있다. 위기상황 정보는 투명하게 공유하되, 입증되지 않은 소문, 공중보건에 도움이 안 되는 정보, 환자의 기밀정보, 환자·환자가족·집단을 차별할 수있는 정보 제공은 안된다는 것도 있다. 이런 원칙들을 알고 있어도 실행을 못하면 소용이 없다.

지금 정부가 ‘적폐’로 몰아붙였던 과거 정부가 남긴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매뉴얼’ 또한 숙지할 만한 것이었다. 2015년 메르스 사태가 초기 대응 실패, 컨트롤타워 부재, 안이한 판단과 대응, 투명한 정보공개 실패 등 많은 교훈을 남겼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 때와 비교하면 정보공유 부분을 제외하고는 딱히 개선된 점을 찾기 어렵다.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매뉴얼은 ‘10가지 원칙’을 담고 있다. 이 중에는 코로나19 사태에 비춰볼 때 의미심장한 것이 많다. ‘초기에 신속히 대응하되 정확한 정보에 근거해 브리핑하라’는 첫째 원칙은 이번에도 두고 두고 곱씹어 봐야 할 대목으로 남게 됐다.

‘피해자 등 국민 정서를 항상 염두에 두고 발언·행동하라’는 원칙도 그렇다. 위기시 국민 감정과 동떨어진 발언이나 행동은 국민적 공분을 낳는다며, 1) 피해자 입장에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할 것, 2) 정부 인사의 태도나 행동이 여론의 비판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면서 진지하고 신중한 자세를 유지할 것, 3) 정부 입장이 아닌 국민·언론 등 제 3자의 입장에서 메시지를 생각하고 냉정하게 평가할 것 등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이 매뉴얼 대로면 여기서 일일이 거명할 필요 없이 정부 여당에서 걸러내야 할 장관, 정치인이 한둘이 아니다.

‘감염병 등 진행 중인 위기의 경우 사태 추이 등을 예단하는 발언을 자제하라'는 것도 들어있다. “코로나19는 머지 않아 종식될 것”이라고 했던 문 대통령의 발언이 너무 큰 대가로 돌아오고 있는 현실을 내다본 듯하다. ‘창구를 단일화하고 한 목소리를 유지하라’는 것은 당장에라도 적용돼야 할 원칙이다. ‘전문가 및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라’는 원칙은 진영 논리로 무장한 현 정부에 뼈아픈 대목일 것이다.

‘브리핑 및 취재지원 요령’에도 눈길을 끌어당기는 내용이 많다. ‘사람 중심 시각에서 브리핑 하라’는 것은 모든 정책에 ‘사람 중심’을 갖다붙이는 현 정부에 따끔한 일침으로 들린다.

‘전문 용어나 업계에서 통용되는 약어 사용을 삼가고 쉽고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라’는 지침도 그렇다. 이를 숙지해 제대로 실천했다면, ‘대구 봉쇄’, ‘대구 코로나’ 같은 논란과 갈등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직이 최우선’이라며 솔직하고 겸손한 태도로 정부가 위기 상황에서 진정성을 갖고 대처하고 있다는 평가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라는 지침도 마찬가지다.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는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실패 케이스들은 꼭 다음 중 한두 개 또는 전부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1) 커뮤니케이션 하지 않는다
2) 타이밍을 놓치고 뒤늦게 커뮤니케이션 한다
3) 정확하게 커뮤니케이션 하지 않는다
4) 전략 없이 아무렇게나 커뮤니케이션 한다.
5) 아무나 함부로 커뮤니케이션 한다.
6) 위기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 조직 내부와 외부간 차이를 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몇 개에 해당될까. 소통·불통·먹통의 저자 구현정 교수는 “‘소통’은 상대방에게 내 이야기를 해서 나를 이해시키는 과정이 아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서로 전제로 하는 배경과 정보가 다르면 ‘불통’이 되고, 내 관점만 고수하면 ‘먹통’이 된다.

국가적 재난이 닥칠 때마다 정쟁이 격화되는 것 또한 불통·먹통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면 경제위기와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불통·먹통으로 위기를 극복했다는 정부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