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시작되는 곳, 해남] ② 향기로운 매화, 푸르른 차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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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문화의 성지' 명맥 잇는 설아다원
대흥사가 있는 해남 두륜산 반대편 자락의 설아다원은 일 년 내내 초록빛으로 가득한 곳이다.
향기로운 꽃내음과 녹음이 어우러진 차밭의 한옥에서 하룻밤 머물며 다도를 배우고 판소리 가락을 즐길 수 있다.
◇ 차 문화의 성지, 해남
두륜산 자락 대흥사에서 약 1㎞가량 산길을 올라가면 초가집이 나온다.
조선 최고의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가 40년간 기거했던 일지암이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다서(茶書)의 고전인 동다송과 다신전을 저술했다.
해남, 그리고 일지암이 '차 문화의 성지'로 불리는 이유다.
두륜산 반대편 자락의 설아다원은 차 문화 성지의 명맥을 조용히 잇고 있는 곳이다.
다원의 주인장은 해남 토박이인 오근선, 마승미 부부. 원래 벼농사를 했던 부부는 일지암에 기거했던 여연 스님과 교류하면서 차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스님과 함께 다회를 만들어 차를 공부하다가 1997년에는 아예 작목을 바꿔 두륜산 남쪽 자락 땅에 차를 심었다.
◇ 두륜산 뒤편에 숨겨진 비밀의 정원
한옥으로 된 카페 건물 뒷문을 열고 나가니 입구에서 보이지 않았던 푸르른 차밭이 펼쳐졌다.
부부가 23년째 가꿔온 차밭은 1만여평에 달한다.
병풍처럼 차밭을 둘러싼 두륜산이 매서운 북서풍을 막아주고 남쪽에서 따뜻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차 가꾸기에 좋다고 한다.
차밭 한가운데에는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에서 봤던 커다란 녹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조금 더 걸어가니 매화 한 그루가 흐드러지게 꽃을 피웠다.
이곳의 특징은 다양한 나무가 차밭 곳곳에 심겨 있다는 것이다.
부부는 차밭을 가꾸기 전부터 있었던 대나무와 소나무에 녹나무, 삼나무, 배롱나무, 목련, 매화, 동백, 은행, 단풍 등 다양한 나무를 매년 심어왔다고 한다.
덕분에 철마다 아름다운 꽃이 차밭을 장식한다.
오근선 씨는 "차나무는 그늘진 곳에서도 잘 자라고 번식하는 음수(陰樹)"라면서 "나무로 그늘을 만들어줘야 부드럽고 맛있는 차를 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설아다원은 농약이나 화학 비료를 전혀 하지 않고 유기농 방식으로 차를 재배한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차밭 고랑에 봄까치부터 개망초, 별꽃에 이르기까지 온갖 야생화와 풀이 지천이었다.
오씨는 "다양한 종류의 풀들이 함께 더불어 사는 땅이 건강한 땅"이라며 "무엇 하나 더하거나 빼지 않고 자연의 힘만으로 자라도록 하는 것이 우리 방식"이라고 했다.
◇ 더하거나 빼지 않고 자연 그대로
연두색 새순이 돋는 4월 중순에는 찻잎을 따는 작업이 시작된다.
4월 21일 곡우 전에 딴 어린 잎으로 만든 차를 '우전', 곡우 후 7일 이내 채취한 차를 '곡우', 곡우 후 8∼10일 사이에 딴 차를 '세작'이라고 한다.
설아다원에서는 기계를 쓰지 않고 사람 손으로 찻잎을 따서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가마솥에 찻잎을 덖는다.
찻잎을 따서 덖는 작업이 이뤄지는 4∼5월에 이곳에 오면 차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우리가 방문한 시기는 새순이 돋기 전인 2월이어서 차 만들기 대신 가향 체험을 해 볼 수 있었다.
가향은 약한 숯불로 묵은 차의 습기를 날리는 작업이다.
발효시키지 않은 녹차는 보통 1년이 지나면 눅눅해지면서 맛과 향이 떨어지는데 가향을 하면 향이 살아난다고 한다.
숯불을 피운 화로 위에 기왓장을 올린 뒤 묵은 녹차를 얹었다.
조금 지나니 찻잎이 따뜻해졌다.
한 꼬집 입에 넣고 씹어 보니 쓰지 않고 바삭바삭하다.
입안이 개운해졌다.
가향할 때에는 차가 타지 않도록 은근한 불에 찻잎이 따뜻해질 정도로만 데워 습기를 날리는 것이 포인트다.
숯불을 피우기 힘든 가정에서는 음식 냄새가 배지 않은 깨끗한 프라이팬을 약한 가스 불에 올려 가향할 수 있다.
찻잎을 찧어 동그랗게 빚은 뒤 발효시킨 떡차도 숯불에 구우면 훨씬 풍미가 살아난다고 한다.
◇ 향기로운 차, 흥겨운 가락
가향을 했으니 다도를 배우면서 가향한 차를 음미해 보기로 했다.
우선 다관(주전자)에 찻잎을 넣지 않은 채 따뜻한 물을 넣고 잔에 나눠 따른 뒤 버린다.
첫 번째 물은 잔을 데우고 깨끗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두 번째 물부터 찻잎을 우려 잔에 천천히 따르는데, 우린 차를 한 번에 찻잔 가득 채우지 않고 3분의 1씩 채우면서 잔을 번갈아 가며 따른다.
차의 농도를 고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다관의 찻물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따라야 재탕할 때 좋은 차 맛을 보존할 수 있다고 한다.
차를 채운 찻잔에 매화나무에서 따온 청매 한 송이를 띄웠다.
연노란 찻물 위로 봄빛을 머금은 매화가 새하얗게 빛난다.
잔을 입에 대니 매화 향기가 은은하게 퍼진다.
다도를 가르쳐주던 마승미 씨가 어느새 북을 들고 와 진도 아리랑을 개사한 녹차 아리랑을 멋들어지게 뽑아낸다.
향기로운 차에 한번 취하고 흥겨운 가락에 또 한번 취했다.
차를 사랑하는 주인 부부는 다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차를 내오며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듯하다.
차 이야기로 시작한 다담(茶談)은 음식 이야기, 여행 이야기, 사는 이야기로 이어지며 그칠 줄 몰랐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
대흥사가 있는 해남 두륜산 반대편 자락의 설아다원은 일 년 내내 초록빛으로 가득한 곳이다.
향기로운 꽃내음과 녹음이 어우러진 차밭의 한옥에서 하룻밤 머물며 다도를 배우고 판소리 가락을 즐길 수 있다.
◇ 차 문화의 성지, 해남
두륜산 자락 대흥사에서 약 1㎞가량 산길을 올라가면 초가집이 나온다.
조선 최고의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가 40년간 기거했던 일지암이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다서(茶書)의 고전인 동다송과 다신전을 저술했다.
해남, 그리고 일지암이 '차 문화의 성지'로 불리는 이유다.
두륜산 반대편 자락의 설아다원은 차 문화 성지의 명맥을 조용히 잇고 있는 곳이다.
다원의 주인장은 해남 토박이인 오근선, 마승미 부부. 원래 벼농사를 했던 부부는 일지암에 기거했던 여연 스님과 교류하면서 차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스님과 함께 다회를 만들어 차를 공부하다가 1997년에는 아예 작목을 바꿔 두륜산 남쪽 자락 땅에 차를 심었다.
◇ 두륜산 뒤편에 숨겨진 비밀의 정원
한옥으로 된 카페 건물 뒷문을 열고 나가니 입구에서 보이지 않았던 푸르른 차밭이 펼쳐졌다.
부부가 23년째 가꿔온 차밭은 1만여평에 달한다.
병풍처럼 차밭을 둘러싼 두륜산이 매서운 북서풍을 막아주고 남쪽에서 따뜻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차 가꾸기에 좋다고 한다.
차밭 한가운데에는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에서 봤던 커다란 녹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조금 더 걸어가니 매화 한 그루가 흐드러지게 꽃을 피웠다.
이곳의 특징은 다양한 나무가 차밭 곳곳에 심겨 있다는 것이다.
부부는 차밭을 가꾸기 전부터 있었던 대나무와 소나무에 녹나무, 삼나무, 배롱나무, 목련, 매화, 동백, 은행, 단풍 등 다양한 나무를 매년 심어왔다고 한다.
덕분에 철마다 아름다운 꽃이 차밭을 장식한다.
오근선 씨는 "차나무는 그늘진 곳에서도 잘 자라고 번식하는 음수(陰樹)"라면서 "나무로 그늘을 만들어줘야 부드럽고 맛있는 차를 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설아다원은 농약이나 화학 비료를 전혀 하지 않고 유기농 방식으로 차를 재배한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차밭 고랑에 봄까치부터 개망초, 별꽃에 이르기까지 온갖 야생화와 풀이 지천이었다.
오씨는 "다양한 종류의 풀들이 함께 더불어 사는 땅이 건강한 땅"이라며 "무엇 하나 더하거나 빼지 않고 자연의 힘만으로 자라도록 하는 것이 우리 방식"이라고 했다.
◇ 더하거나 빼지 않고 자연 그대로
연두색 새순이 돋는 4월 중순에는 찻잎을 따는 작업이 시작된다.
4월 21일 곡우 전에 딴 어린 잎으로 만든 차를 '우전', 곡우 후 7일 이내 채취한 차를 '곡우', 곡우 후 8∼10일 사이에 딴 차를 '세작'이라고 한다.
설아다원에서는 기계를 쓰지 않고 사람 손으로 찻잎을 따서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가마솥에 찻잎을 덖는다.
찻잎을 따서 덖는 작업이 이뤄지는 4∼5월에 이곳에 오면 차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우리가 방문한 시기는 새순이 돋기 전인 2월이어서 차 만들기 대신 가향 체험을 해 볼 수 있었다.
가향은 약한 숯불로 묵은 차의 습기를 날리는 작업이다.
발효시키지 않은 녹차는 보통 1년이 지나면 눅눅해지면서 맛과 향이 떨어지는데 가향을 하면 향이 살아난다고 한다.
숯불을 피운 화로 위에 기왓장을 올린 뒤 묵은 녹차를 얹었다.
조금 지나니 찻잎이 따뜻해졌다.
한 꼬집 입에 넣고 씹어 보니 쓰지 않고 바삭바삭하다.
입안이 개운해졌다.
가향할 때에는 차가 타지 않도록 은근한 불에 찻잎이 따뜻해질 정도로만 데워 습기를 날리는 것이 포인트다.
숯불을 피우기 힘든 가정에서는 음식 냄새가 배지 않은 깨끗한 프라이팬을 약한 가스 불에 올려 가향할 수 있다.
찻잎을 찧어 동그랗게 빚은 뒤 발효시킨 떡차도 숯불에 구우면 훨씬 풍미가 살아난다고 한다.
◇ 향기로운 차, 흥겨운 가락
가향을 했으니 다도를 배우면서 가향한 차를 음미해 보기로 했다.
우선 다관(주전자)에 찻잎을 넣지 않은 채 따뜻한 물을 넣고 잔에 나눠 따른 뒤 버린다.
첫 번째 물은 잔을 데우고 깨끗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두 번째 물부터 찻잎을 우려 잔에 천천히 따르는데, 우린 차를 한 번에 찻잔 가득 채우지 않고 3분의 1씩 채우면서 잔을 번갈아 가며 따른다.
차의 농도를 고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다관의 찻물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따라야 재탕할 때 좋은 차 맛을 보존할 수 있다고 한다.
차를 채운 찻잔에 매화나무에서 따온 청매 한 송이를 띄웠다.
연노란 찻물 위로 봄빛을 머금은 매화가 새하얗게 빛난다.
잔을 입에 대니 매화 향기가 은은하게 퍼진다.
다도를 가르쳐주던 마승미 씨가 어느새 북을 들고 와 진도 아리랑을 개사한 녹차 아리랑을 멋들어지게 뽑아낸다.
향기로운 차에 한번 취하고 흥겨운 가락에 또 한번 취했다.
차를 사랑하는 주인 부부는 다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차를 내오며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듯하다.
차 이야기로 시작한 다담(茶談)은 음식 이야기, 여행 이야기, 사는 이야기로 이어지며 그칠 줄 몰랐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