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 당국이 전(前) 왕세자를 비롯한 최고위급 왕족 네 명을 전격 체포했다. 사우디 일각에선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34세)가 아버지인 살만 빈 압둘라지즈 사우디 왕을 일찍 퇴위시키고 올해 하반기 중 왕위에 오르려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왕위 계승 작업에 본격 나서면서 차기 위협이 될 만한 이들을 숙청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사우디 왕자 넷 "쿠데타 혐의" 체포

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전날 사우디 당국은 왕자 네 명을 반역 혐의로 긴급 체포해 조사한 후 각 왕자들을 각자 자택으로 보냈다. 당국은 내무부 관료, 육군 고위장성 수십명도 쿠데타 시도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조사하기로 했다.

이중 두 명은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보다 먼저 공식·비공식적으로 사우디 차기 왕 후보에 올랐던 이들이다. 이번에 체포된 무함마드 빈 나예프 왕자는 살만 왕의 조카로 2017년까지 왕세제 겸 내무장관이었다. 사우디 왕실 내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 반대파들이 미국 정보기관 등과 친밀한 등 미국에도 일부 지지세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살만 왕의 유일한 동복 동생인 아흐메드 빈 압둘라지즈 왕자도 왕위 후보 물망에 꾸준히 오른 인물이다. 사우디는 그간 왕의 형제가 왕위를 계승해서다. 2015년 집권한 살만 왕이 이 원칙을 깨고 빈살만 왕세자를 왕세자로 올렸다. 체포된 왕자 중 나머지 두 명은 각각 무함마드 빈 나예프 왕자의 동생, 아흐메드 빈 압둘라지즈 왕자의 아들이다.

◆“빈살만 왕세자는 11월 전에 왕위 오르고 싶어해”

중동 현지 언론인 미들이스트아이는 사우디 관계자를 인용해 “빈살만 왕세자는 오는 11월 사우디 리야드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이전에 왕이 되고 싶어한다”고 보도했다. 다른 소식통은 “빈살만 왕세자는 아버지인 살만 왕 생전에 왕위를 이양받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이번 체포를 두고 올해 84세인 살만 왕의 건강 악화설도 나왔다. 왕이 왕위를 이양할 때가 되자 빈살만 왕세자가 쿠데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선수를 쳤다는 주장이다. 이날 사우디 국영 SPA통신은 살만 국왕이 대사 두 명을 접견하는 사진을 내보내 건강이상설을 간접적으로 부인했다.

주요 외신들은 체포된 왕자들이 실제 쿠데타를 시도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고 있다. 애초에 그럴 힘이 꺾였다는 지적이다. 무함마드 빈 나예프 왕자는 2017년 왕세제 자리를 뺏긴 이래 내무장관직에서도 쫓겨났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후 빈살만 왕세자는 무함마드 빈 나예프 왕자의 재산을 동결하고 해외여행도 금지했다.

빈살만 왕세자 지지 세력은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무함마드 빈 나예프 왕자가 진통제 등 마약에 중독됐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무함마드 빈 나예프 왕자는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로 살면서 자신은 왕위에 관심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저자세를 유지해왔다.

◆인기 떨어진 와중 숙청 나서
뉴욕타임스(NYT)는 “빈살만 왕세자가 나라 안팎 여론이 악화된 상황에 주요 왕자들 숙청에 나섰다”고 분석했다. 빈살만 왕세자가 주도하고 있는 사우디 경제 개혁안은 유가 급락,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 여파로 계획에 비해 한참 뒤처진 상태다. 사우디 경제는 작년 성장률이 0.3%에 그쳤다. 전년(2.4%)보다 훨씬 낮고, 정부 전망치인 0.4%에도 미치지 못한 수치다. 유가가 확 내리면서 사우디 증시도 급락세다.

사우디 밖에서도 빈살만 왕세자 인기가 떨어졌다. 코로나19 여파다. 사우디는 최근 이슬람 최고 성지인 메카를 방문하는 비정기 성지순례(움라)를 중단시켰다. 이슬람 교리상 성지순례는 이슬람 교도가 평생 한 번은 해야 하는 종교 의무 중 하나다. NYT는 “성지순레를 막은 것은 이슬람 역사에서 선례가 거의 없는 조치”라며 “이슬람 각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모하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외국인 순례객은 막는 반면 자신이 도입한 영화관 등은 여전히 폐쇄를 하지 않고 있다며 비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 사우디 고위 관계자는 “이번 숙청은 빈살만 왕세자가 2017년 벌인 첫번째 것과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 빈살만 왕세자는 젊고 대담한 개혁가 이미지를 앞세워 반부패 명목으로 반대파를 제거했지만, 이번 숙청은 일련의 추문 이후 일어났기 때문”이라며 “빈 살만 왕세자가 큰 논란 하나를 일으켜 다른 논란들을 회피하려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빈살만 왕세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선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간 빈살만 왕세자의 든든한 지지 세력 역할을 해왔다. 유엔 등 국제기구가 언론인 자말 까쇼끄지 살해 배후로 빈 살만 왕세자를 지목해 조사를 요구했을 때도 트럼프 대통령은 언급을 회피하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빈살만 왕세자, '난 웃어른도 쳐' 경고한 것”
올해 왕위 노리는 빈살만, 삼촌 등에 '피의 숙청' 벌인다 [선한결의 중동은지금]
전문가들은 이번 숙청이 빈살만 왕세자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에 체포된 왕자 두 명은 각각 빈살만 왕세자의 삼촌, 당숙이다. 런던에 본부를 둔 영국 싱크탱크인 왕립국방연구소의 마이클 스티븐스 연구원은 “빈살만 왕세자는 아버지 세대 왕자를 체포해 젊은 왕자들에게 ‘나는 왕실 어른도 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준 것”이라며 “이에 따라 젊은 왕자들도 알아서 빈살만 왕세자 쪽에 줄을 설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숙청에 대해 내부적으로든 밖에서든 큰 반발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알자지라도 “이번 소식은 왕실 중 누구든 설치지 말라는 경고”라며 “아버지의 유일한 동복 동생인 아흐메드 빈 압둘라지즈 왕자가 체포될 수 있다면, 왕실 모든 사람이 체포될 수 있다는 신호를 주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체포된 왕자들이 곧 빈살만 왕세자에 공식 ‘충성 선언’을 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WP에 따르면 아흐메드 빈 압둘라지즈 왕자는 가족들에게 공식 행사에서 입는 옷을 보내달라고 체포 하루 뒤인 지난 7일 요청했다. WP는 “그가 강압에 의해 곧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는 추측이 나온다”고 분석했다. 미들이스트아이는 “소식통에 따르면 아흐메드 빈 압둘라지즈 왕자는 체포 전 빈살만 왕세자를 전력 지지한다고 약속하라는 압력을 받았다”며 “그가 지지를 약속하지 않자 당국이 체포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